소설리스트

179화 (179/235)

악연은 악연으로

깊은 곳, 아래 땅에 도착했을 때.

명한은 공기가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영기의 농도가 지금까지보다 더 짙어졌다는 의미였다.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한 현상.

"사부님."

"못난 아이가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구나."

무언가 술법이 발동했다는 뜻이었다.

요동치는 기운을 따라서 다급하게 뛰었다.

숨이 빠르게 차올라 턱 끝을 간질일 즈음이 되어서, 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피로 만들어진 기하학적인 문양과 일렁이는 기운의 파도를 목도할 수 있었다.

숨이 턱 하니 막힐 정도로 엄청난 농도의 영기였다.

"하하하. 이거 관객이 더 찾아왔군."

그 중앙에 양생이 있었다.

그의 몸 주변으로 핏빛의 기운이 망토처럼 일렁거렸다.

마치 하나의 ‘격’을 덧씌운 느낌.

그 전의 양생과 지금의 양생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양생."

"후후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절대의 힘을 얻었다."

"절대의 힘이라고? 영굴의 힘?"

"루의 늙은이나 서복은 나라는 개인의 집착을 과소평가했어. 나는 마침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의 힘을 모두 거둔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네가 이 땅의 힘을 모두 거두었다고?"

"그래. 바로 내가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된 첫 번째 존재다."

양생이 두 손을 펼쳐 대각선으로 교차했다.

핏빛 물결이 사방을 덮으며 밀려왔다.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명한은 주먹에 호흡을 담고 짧게 그 앞을 터뜨렸다.

펑―!

무너지는 공간과 흔들리는 기운.

파편이 날아와서 몸에 박히고 충격에 내부가 뒤틀렸다.

입과 귀. 코에서 피가 물처럼 쏟아졌다.

"큭큭. 그래도 재주가 좀 있다는 건가? 한 수 막을 정도의 힘은 있나 보군."

양생은 다시 손을 교차했다.

피로 만들어진 창이 그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응축된 기운은 수십, 수백의 생명을 집약한 듯 거대하고도 불길했다.

이건 막을 수 없다.

명한이 아득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미요."

"응. 이건 아직 할 수 없겠어."

그때, 미요가 아홉 개의 꼬리를 펼치며 그 앞을 막았다.

오색 창연하게 피어나는 영기가 막을 이루고 핏빛의 창고 대치했다.

"몸을 추슬러라."

"후우. 네, 사부님."

명한은 의문을 풀기보다는 행동을 시작했다.

몸에 박힌 파편을 몸 안으로 빨아들여서 천천히 녹여냈다.

피로 물든 지독한 기운이었지만, 이미 지독함이라면 익숙한 명한이었다.

수천, 수만의 고통 섞인 비명도 받아낸 이력이 있다.

그들의 비명과 절규를 받아들였다.

‘……그런 식이었나.’

양생은 역대 황제가 희생한 피의 기운을 매개체로 영굴을 다루고 있었다.

인간의 집착과 저주가 자연의 거대한 기운에 매달려서 억지로 끌어내린 격이었다.

분명 획기적이고 기발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명한은 한계를 느꼈다.

"여우 따위가 인간의 길을 막지 마라!!"

"지저분한 인간에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은데?"

피의 창과 오색 창연한 구미호의 힘이 충돌했다.

피가 퍼지고 터지고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막에 달라붙어 끈질기게 기어오르는 모습은 힘의 본질 그 자체였다.

양생이 바라는 것이 이 순간의 힘이었다면 분명 성공이라 말했을 광경이다.

하지만……

"인간의 집착과 저주는 가장 먼저 인간을 갉아먹기 마련이다."

은휘의 말대로.

양생의 힘은 분명 인간을 초월하고 있었지만, 구현자가 인간인 이상 한계가 있었다.

저주가 그의 정신을 좀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은 모르겠지만, 밖에 있는 은휘와 명하에게는 뚜렷하게 보였다.

침식돼 가는 붉은 파도.

"크하하하!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도 별것 없구나! 나는 신이다! 신의 힘을 가졌다! 너희 같은 신수들이 설치는 시대도 이제 끝이 났다! 이젠 내가 모든 걸 지배한다!"

"못났네, 정말. 너 같은 인간이 역사적으로 없었던 것 같아? 하나같이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다고 여겼지. 하지만 결국에는 다 똑같은 결말을 맞이했어. 파멸."

"닥쳐라, 여우! 나는 인간을 초월한 신이다!"

양생의 붉은빛은 더욱 거칠어졌다.

몸에 두르고 있던 피의 막은 점차 짙어지며 그의 육신을 침범하여 겹쳐졌다.

마치 피가 인간인 그를 탐하여 하나가 되는 모습이었다.

그건 마치 피로 만들어진 인간, 혈인(血人)이었다.

"오래가지 못하겠군. 소백, 넌 막군천을 찾아라. 이곳은 나와 미요가 막지."

"막군천이요?"

이름 석 자에 명한이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이 공간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구석에 처박혀 있던 인간이 지금은 없다.

"저 힘이 폭주하며 인간의 저주로 만들어진 쐐기가 된다. 막군천은. 아니, 막군천의 뒤에 있는 인간은 필시 이것도 예상했을 터. 그로 하여금 영굴 안쪽에서 무언가를 하게 했을 거다. 그를 막아라."

"알겠습니다. 다만……"

"나와 미요 걱정은 필요 없다. 피로 점철된 인간의 저주가 강한 것은 맞으나, 우리 역시 오래 묵은 존재들이니까. 저주가 무르익기 전까지 적당히 상대만 할 테니, 나머지를 부탁하마."

"무탈하세요."

두 번은 필요 없다.

명한이 짧게 포권으로 인사를 대신한 뒤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양생이 두른 피의 타도가 그를 발견하고 덮쳐왔지만, 미묘의 꼬리가 그 앞을 막았다.

‘어디로 갔냐, 막군천.’

바닥으로 이어진 흔적은 뚜렷하게 하나.

명한은 망설임 없이 그 뒤를 쫓았다.

#

습작에서도 막군천은 최강의 숙적 중 하나였다.

최후반까지도 주인공을 괴롭히던 인물이다.

내용이 바뀌고 모든 상황이 전과 같지 않음에도 그 질긴 인연은 여전했다.

혈교 교주 양생이 날뛸 때도 명한이 신경 쓴 건 막군천이었다.

"막군천!"

소리가 통로를 타고 울렸다.

부스스 무너지는 모래 사이로 희뿌연 형체가 흔들렸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

자각과 동시에 발로 땅을 강하게 눌렀다.

퍼엉―!

바로 앞에서 부서지는 지면.

흙더미가 위로 치솟고 충격에 땅이 갈라졌다.

흔들리는 지각 위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고 손으로 허공을 긁었다.

모래 먼지와 함께 ‘어떤 것’도 함께 긁혀서 벽면에 처박혔다.

첫 번째는 굉음이.

두 번째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쉬익.

볼을 스치는 건 종이 두께의 철편.

벽을 두부처럼 파고 들어갈 만큼 예리했다.

"언제까지 숨어있을 셈이냐, 막군천?"

"건방진 놈. 내가 네놈이 두려워 숨은 것 같나?"

이번에는 머리 위였다.

벼락같이 내려꽂히는 검격에 명한이 마보를 취하며 상단으로 주먹을 뻗었다.

쿠르르릉.

힘과 힘의 충돌에 땅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뿌리 깊은 명한의 반격도 강하지만, 막군천의 검격 역시 범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실력을 숨겼던 건가, 막군천?"

"무인이라면 삼 할은 숨기는 것이 정석. 양생 그 모자란 놈이 언젠가 네 보호자를 떼어낼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다."

"그 둘이 없으면 네가 날 막을 수 있다고 보는 건가?"

"건방 떨지 마라, 촌놈. 신교에서 호의호식한 네놈이 모든 것을 잃고 떠돈 내 간절함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간절함이라. 그 간절함이라는 것이 고작 그거냐?"

명한의 주먹이 벼락같이 허공을 때렸다.

폭음이 연달아 터지고 그림자가 충격에 밀려났다.

바닥에 발을 딛고도 전부 해소가 되지 않아 구석에 닿을 정도였다.

"말해라, 막군천. 네 몸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은 대체 누구의 것이냐?"

"큭큭큭. 재수 없는 새끼. 쓸데없이 눈만 좋군."

먼지를 걷어내며 막군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당등룡다운 당당하고 거침없는 걸음.

하지만 그의 팔과 다리.

육신의 형태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대체 몇이나 집어삼킨 거지?"

"하하. 네놈도 이런 능력에는 일가견이 있지 않나? 극천일무기. 파괴의 순간에서 그 열기를 먹어 치운다지? 죽음의 순간에서 좌절과 절망을 삼키는 혈식마도(血食魔道)와 짝을 이룰만해."

"혈식마도? 극천일무기가 삼키는 건 어디까지나 순간의 격렬함이다. 네놈처럼 그 잔재를 직접 먹어치우지는 않아!"

"어째서? 어차피 죽어서 사라질 존재 아닌가? 그럼 먹혀서 양분이 되는 편이 그들에게도 좋을 거야. 낭비하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다, 소백."

흉흉하게 웃으며 막군천이 몸을 움직였다.

그때마다 그 안에서 영혼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자들의 고통 자체가 막군천의 힘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인간의 혼을 삼킬 수는 없어.’

양생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

지금의 막군천에게는 드러난 힘 말고도 무언가가 존재했다.

"네가 모시는 분의 작품인가?"

"후후.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야, 소백. 네놈들이 아버님을 살해했을 때, 나는 정파라는 것들의 위선을 깨달았어. 힘이 없으면 무당의 장문조차 그렇게 사라지는 거야. 해서 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를 택했다."

"퍽이나 자랑스럽겠군. 네 잘난 아버지라는 작자는 죽을 만하니까 죽었어. 그걸 남 핑계로 돌리는 것도 모자라서 고작 타인에게 의탁한 걸 선택이라고?"

"……그 대가로 나는 위대한 힘을 얻었다."

"멍청한 놈."

은휘는 답으로 주먹을 제시했다.

왜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

"너는 아직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명한이 호흡을 정리하며 두 주먹을 들어 올렸다.

#

양생의 힘이 부풀어 공터 전체를 채웠다.

들끓는 힘은 마치 신처럼 거대했다.

손으로 바위를 들고 발로는 산을 부술 것만 같았다.

자신의 육체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모른 채, 양생은 그렇게 힘에 취했다.

"쯧쯧. 애꿎은 놈들의 싸움에 등만 터지는구나."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

"하하. 전설 속의 신수가 약한 소리는."

타박에 은휘가 자신의 몸을 실체화했다.

그는 이미 육체를 버리고 영의 세계로 들어간 존재.

속세와 명계의 중간에서 의식으로만 그 위치를 지키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모든 것을 속세에 드러내는 건 이치상으로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끼―――익.

무언가를 비틀며 은휘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공간이 뒤틀려서 깨진 유리처럼 엇나가고, 모든 법칙이 구조를 벗어나서 날뛰었다.

충격에 밀려나던 돌과 모래가 물처럼 녹아서 바닥으로 깔렸다.

철퍽, 그 위를 은휘가 걸었다.

"확실히 하늘의 그물이 느슨해진 건 사실이야."

아직 끊을 수는 없지만, 매듭을 비틀어서 여는 건 쉽다.

이건 세상의 구조가 그만큼 연약해졌다는 증거.

은휘는 가볍게 혀를 차며 손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눌렀다.

덜컥.

양생의 몸이 바닥으로 짜부라졌다.

"……뭐?"

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알만 굴렸다.

신과 같은 힘을 지녔는데 아무런 반응도 못 하고 제압당하는 건 이상했다.

다시 거력을 모아서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있거라. 네가 쐐기가 되어 그물에 상처가 생기면 좋을 게 없으니."

하지만 이번에도 은휘의 손짓에 벽에 처박혔다.

온몸을 바동거려도 꼼짝할 수 없었다.

이건 불가능하다.

인간의 집착과 저주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될 리가 없었다.

몸이 터져라 힘을 쥐어짰다.

"……!!"

그리고 봤다.

눈앞에 실체를 드러낸 은휘라는 자의 그림자를.

왜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지는 곧바로 이해됐다.

아무리 인간이 발버둥을 쳐도 태풍을 손으로 막을 수는 없는 법.

눈앞의 존재는 인간의 형태를 취했을 뿐, 인간이 아니었다.

모든 광기와 분노.

집착과 저주가 겁을 먹고 쪼그라들었다.

"옳지. 그리만 있거라."

그 앞에서 웃는 은휘.

양생은 따라서 웃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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