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235)

쐐기

은휘는 자연스럽게 미요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가는 시선에는 꽤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무엇인가요?’ 명한은 궁금했지만, 입에 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것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잠깐의 눈 맞춤 이후로 은휘가 입을 열었다.

"대충 눈치챘겠지만, 여기 미요와는 과거에 잠깐 인연이 있어."

"사부님이 중원에 맞수를 찾아서 헤매실 때 말이죠?"

"그래. 인간 중에는 상대가 없던 터라 영물까지 뒤졌지. 그러다가 우연히 여기 미요와 만나서 한 칠 일 밤낮을 싸웠어. 지형까지 바꿔버리는 큰 싸움이었지."

"흥. 그 바보 같은 싸움 때문에 괜히 나만 책잡혔다고."

"그때는 미안했어. 그만큼 어울릴 수 있는 존재는 처음 만난 거라."

미요도 입술만 비죽거릴 뿐 진심으로 타박하진 않았다.

"어쨌든 그 싸움 이후로 우린 종종 어울렸어. 인간 세상이나 영물의 세계에 대한 지식도 나눴지. 그러다가 오래전에 있었던 큰 사건을 이야기하게 됐어."

"그게 황제의 이야기라는 건가요?"

"우리만이 아니라 영물 세계에서도 큰일이었으니까. 황제가 시도한 영생의 법은 그야말로 천기를 송두리째 흔드는 일. 천기가 뒤틀리고 세계의 영적 흐름이 요동쳤어."

"그렇게나 어마어마한 일을 벌였던 거군요."

"천기라는 건 굉장히 빡빡한 거야. 하늘의 그물은 엉성한 듯 보이나 벗어날 수 없다. 옛말대로 벗어날 수 없는, 벗어나서는 안 되는 그물이 바로 천기야."

은휘가 손으로 허공을 두드렸다.

공간이 물결처럼 일그러지더니 사방으로 번졌다.

그 안에서 겹치고 튀는 몇 개의 흐름이 명한의 눈에도 보였다.

"슬슬 이것이 보이는 모양이구나."

"방금 그것들이……?"

"그래. 쉬이 설명하자면 매듭이다. 인과라는 선들이 얽히고설켜서 만든 매듭. 그 매듭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 천기라는 그물이지."

"그런 걸 뒤흔들 정도라면…… 대체 황제는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어마어마했지. 네가 방문했던 명왕도. 신교의 천산. 무당의 심처. 중원 각지에 숨겨져 있는 영맥들. 그리고 바로 이곳. 모든 기운의 중심이 되는 영굴. 황제는 모든 지점에 쐐기를 박으려 했다."

"쐐기요?"

은휘는 답을 손짓으로 대신했다.

앞서 그려 두었던 천기의 흐름을 손으로 가볍게 눌렀다.

잔잔히 퍼지던 물결이 멈추고 그 흐름의 방향이 달라졌다.

천에 큰 바위를 두어 물길을 바꾸는 것과 같은 요령이었다.

"이 거대한 흐름을 단번에 바꾸는 건 불가능하지만, 여러 흐름에 쐐기를 박아서 전체를 일그러뜨리는 건 가능하지. 그래서 중원 곳곳에 쐐기를 박아서 원하는 흐름을 만들었다. 그게 최초의 황제진경에 적힌 불사종법이지."

"성공…… 하지는 못한 거죠?"

"당연하지. 제아무리 황제의 힘이 강해도 중원 전체를 그렇게 마음대로 주무르지는 못해. 영굴은 영굴 나름대로 각지의 영맥은 영맥 나름대로 방어에 성공했다. 그 결과 황제는 일부의 흐름밖에 바꾸지 못했어."

"근데 왜 강행했던 거죠?"

"그게 핵심이다."

"……?"

의아함 가득한 명한을 바라보며 은휘가 가볍게 웃었다.

제자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는 건 스승의 즐거움이었다.

"애초에 황제의 술법은 실패하도록 고안되었던 거다."

"애초에 실패하도록 고안됐다고요? 어째서죠?"

"술법을 준비한 자는 알았던 거지. 천기라는 단단하고 성긴 그물을 한 번에 바꾸지는 못한다는 거야. 해서, 큰 실패로 천기를 흔들고 다음 기회를 본 거다."

"그럼 황제는……?"

"굳이 말하자면 희생양이 된 거지."

명한은 명왕도 저편에서 봤던 ‘신’을 떠올렸다.

그가 보였던 집착과 공허함.

만약 그것이 타인에 의한 희생이라면 단순한 업보라고 칭하기는 어렵다.

영생을 탐한 벌로 끝없이 ‘밖’을 떠도는 죄라면 차라리 필멸이 나았을 터.

그가 자신에게 닿은 것이 우연이라면 그토록 집착하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외로웠을 테니까.’

끝없는 공허 속에서 만난 유일한 벗.

재미없는 글을 끝까지 읽어준 열혈 독자의 이유로는 지나치게 컸다.

"그럼, 사부님이 이곳으로 절 보낸 것도 같은 맥락인가요?"

"직접 확인해야 했다. 아니, 그런 흐름이었지. 나와 비슷한 수준의 존재라면 같은 생각을 품었을 거야. 그러니 그 무당의 아이와 혈교의 무뢰배가 이곳까지 온 거지."

"혈교의 교주도 사부님과 같은 수준이라는 겁니까?"

"설마. 그 아이는 그저 욕심과 머리가 좋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영굴의 힘을 차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겠지."

"……아니라는 건가요?"

"영굴의 힘은 인간 하나가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건 나나 너나. 여기 미요도 마찬가지야. 혈교의 아이는 자신이 상황을 주도한다고 여기지만, 그건 착각일 뿐이지. 움직이는 건 아마도 서복일 거다."

은휘는 가볍게 혀를 차며 미요를 돌아봤다.

"뭐? 왜?"

"슬슬 영굴 안쪽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줘야지. 내 생각이 맞다면 혈교의 아이가 찾았다는 고문은 아마도 옛 쐐기의 파편. 인간 자체를 통째로 녹여서 쐐기로 삼을 셈이다."

"그건 나도 알아. 과거로부터 자행돼 온 지독한 피의 행적을 제물로 삼아서 그를 집어삼키겠지. 이용당하며 이용당하는 사실조차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은 무섭지 않아. 문제는……"

"무당에서 온 아이겠지."

"맞아. 그 아이 내면에는 뭔가가 있어. 그게 뭔지를 읽을 수 없으니 두려워."

"미요, 너도 읽지 못하는 무언가라. 역시 환상이라는 이름 그대로인가."

"환상? 환상이라면 설마……"

"쉿. 아직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마라. 네가 그를 인지하면 그도 너를 선명하게 인지할 터. 네 공부가 깊어지기 전까지는 피하는 것이 좋아."

손짓에 명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나 하던 가정이 사실이 되었지만, 함부로 거론조차 어려웠다.

"일단, 청청 저 아이가 깨어나거든 영굴의 안쪽으로 향하자. 만약의 경우라도 최소한의 대비는 해야지."

"방법이 있나요, 사부님?"

"있지. 세상사가 복잡할 때는 언제나 단순한 것이 답이 되는 법."

툭툭. 은휘가 두드리는 건……

명한의 주먹이었다.

#

영굴이라 칭해지는 공간은 얼핏 평범한 동굴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길게 이어진 통로에 돌뿐인 바닥.

부스스 무너지는 모래 먼지를 털고 나면 특별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걸 지나갈 수 있는 건가?"

통로 안을 꽉 채운 오색의 기운이었다.

마치 홍수로 범람한 강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았다.

숨마저 턱 하니 막혀서 한 발을 내딛기조차 쉽지 않았다.

"영맥에서도 가장 영기가 짙은 것이 영굴이다. 거부하지 말고 편하게 호흡해. 네 몸을 기운이 지나는 통로로 여겨라."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거 같은데요."

"무아의 연장선이다. 이걸 해내지 못하면 앞으로는 갈 수 없어."

"왜 저만 이러는 거죠?"

어마어마한 기운의 폭포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은 멀쩡했다.

압박감을 느끼는 건 그 혼자였다.

"나와 미요는 이를 이겨낸 것이고, 청청은 아직 자격이 없다. 선에 걸친 너만이 이것이 버겁고 힘든 것이지."

"이것도 다 생각하고 데려오신 거겠죠?"

"이겨내지 못할 거였다면 혼자 왔을 거다. 속세의 일은 속세의 존재가 마무리하는 것이 정답. 나는 네게 걸고 있다."

"후우. 기대를 저버리는 제자가 될 수는 없죠."

명한이 팔을 걷어붙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거칠어도 결국에는 자연에 존재하는 기운일 뿐이야.’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큭."

하지만 짓누르는 압박에 다시 물러났다.

온몸이 찢겨나갈 것 같은 압박이었다.

인간이 거대한 태풍 앞에 섰을 때의 나약함이 여과 없이 전해졌다.

이길 수 없는 자연의 웅장함이었다.

‘아니지. 이길 필요가 없어.’

은휘도 말했다.

힘을 거부하지 말라고.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자."

봉효와의 싸움에서 느낀 감각을 다시 떠올렸다.

비우고 비워내서 자신을 자연 속에 녹여내는 감각.

잔잔한 호수 위에 물방울 하나를 떨어뜨리는 느낌이었다.

스으으으.

다시 내디딘 걸음 위로 바람이 스쳐 갔다.

아니, 표현만 그럴 뿐 이건 영기의 폭풍이었다.

그 안에는 불도 물도 바람도 대지도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이 휘몰아치는 격이었다.

"……하."

그건 황홀한 감각이었다.

인간의 작고 나약함을 깨닫고 난 뒤, 거대한 자연에 편승하여 위대함을 느낀 격.

높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세상 만물을 내려다보는 기분이었다.

세상의 온갖 쾌감이 이것에 비할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가 모두 환희에 젖어서 몸부림쳤다.

영원히 이곳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거기까지."

"헉!"

순간, 무언가 거대한 손이 다가와 그를 황홀경에서 끄집어냈다.

그리고 두 눈을 깜빡임 사이로 보이는 건 은휘의 웃음기 섞인 얼굴이었다.

"더 깊이 흘러가면 그대로 자연의 일부가 되고 만다. 네놈이 도사였다면 축복할 일이지만, 아니지 않느냐. 정신 차리고 속세의 미련을 붙잡아라."

"방금 그게 그럼?"

"해탈이라고 하기는 모자라지만…… 육체를 벗어나는 건 같다."

"그런 황홀함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후후. 작은 것이 높이 올라가 보니 세상이 그리 아름답더라. 허나, 실제로 변한 것은 마음 하나뿐. 위나 아래나 다른 것이 무엇일까."

선문답 같은 말이었으나, 명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광경은 분명 아름답지만, 낮은 곳에서나 높은 곳에서나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내 즐거움은 경치가 아니라, 오르는 길이다.’

갑자기 서 있는 것이 편해졌다.

"그래야 귀문의 장문이지."

은휘의 흡족한 웃음이 답을 대신했다.

#

붉은색 글자들이 허공에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바닥부터 이어진 거대한 형태의 일부.

동굴 안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서 지나온 통로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양생이었다.

"후. 후후후후후. 이제 머지않았다. 조만간 이 위대함은 내 것이 된다."

그는 핏빛으로 물든 양피지를 손에 쥔 채 음습한 웃음을 흘렸다.

영굴의 깊은 곳으로 파고들수록 뼈에 새겨질 정도로 그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것만 손에 넣는다면 서복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지류가 본류를 꺾어, 세상의 정상에 서는 것이다.

"큭큭. 오만한 늙은이들은 내가 황제진경의 진실을 깨달았다는 사실을 죽어도 몰랐을 거다. 우민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라 단정했겠지. 하지만 그건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의 집요함을 너무 무시한 거다. 우리는 세대와 세대를 이어오며 피를 대가로 바쳐서 실험했다. 나약한 인간이 위대한 힘을 거두는 법을!"

그는 두 팔을 벌리고 소리쳤다.

들끓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 하나만의 일생이 아니었으니까.

몇 대에 걸친 과업의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안 그런가, 막군천?"

그 위대함의 목격자가 필요했다.

자신을 신이라 생각하는 늙은이의 제자라면 더할 나위 없는 선택.

동굴 구석, 핏빛 웅덩이 위.

창백한 표정의 막군천이 힘겹게 몸을 세우고 있다.

"보아라. 그리고 인정해라. 옛 선인의 시대는 저물고 인간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나, 양생이 천하의 정점에 서겠다!"

휘몰아치는 붉은빛.

힘의 중심에서 양생이 다시 한번 목청을 높였다.

그그그그긍.

영굴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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