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235)

영굴로

명한 일행이 산 중턱에 올라왔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렬한 파동이 산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다.

오감이 예민한 청청은 아예 주저앉을 정도였다.

"방금 그건 대체 뭐야?"

"괜찮냐?"

"무시무시한 힘이 스쳐 갔어. 세상을 찢어버릴 것 같은 강렬함이야. 마치…… 어마어마한 숫자의 죽음이 비명을 토하는 것 같은."

청청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은휘에게는 미치지 못하나 그녀는 혼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 편.

방금 스쳐 간 파동이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수천, 수만의 귀곡성이었다.

"이 위인가 보군."

기다렸다는 듯 봉효가 건넨 물건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닥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진한 피 냄새를 동반했다.

엄청난 숫자의 죽음이 이 파동 이면에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젠장. 대체 이 위에 뭐가 있는 거야?"

"사부님은 일단 미요라는 인물을 찾으라고 했어. 하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니까 그 사람을 찾는 게 쉬워 보이지만은 않네."

"역시 막군천이 무턱대고 찾아온 건 아니겠지?"

"그가 무당등룡이라는 기린아라고는 하지만 이런 힘이 있을 리는 없어. 뒤에서 그를 봐주는 사람이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인물이 무시무시하게 강하다는 것도 당연한 이치.

산보를 나가자는 듯 가벼웠던 은휘의 말과는 다르게 이번 일도 쉽지는 않다.

명한이 이를 꽉 깨물었다.

"가자."

"응."

산의 정상이 곧이었다.

#

짙어지는 피 냄새에 명한은 어지러울 정도였다.

지금껏 수많은 싸움을 겪고 그만큼의 피를 흘려 봤다.

하지만 이건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농도였다.

시산혈해가 있다면 바로 이럴까.

수천, 수만. 아니, 수십만 이상의 피가 이곳을 흐르고 있었다.

"뺘아……"

"금홍아, 괜찮아?"

청청과 금홍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산을 오를수록 둘은 기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마치 심해에 들어온 잠수부와 같이.

기형적일 정도로 높은 영기의 농도에 질식당하는 상태였다.

"둘 다 조금만 참아. 멀지 않았어. 장식의 반응이 강해지고 있으니…… 아."

그렇게 언덕 하나를 더 넘어, 트인 공간에 발을 들인 순간.

명한은 짙은 피 냄새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독할 정도로 많은 죽음이 뭉쳐있는 공간이었다.

주변이 전부 붉은색으로 점철되어 죽음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건 명왕도에서 맞닥뜨렸던 명계와의 경계보다 더했다.

"……누군가 싸우고 있어."

피 냄새로 약해진 감각 너머로 희미한 충돌음이 전해졌다.

시야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분명 들렸다.

‘싸운다고?’ 청청 쪽을 돌아보니 그녀는 느끼지 못한 듯싶었다.

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투쟁의 기운을 착각으로 넘길 수는 없었다.

명한이 깊이 호흡을 들이마시고 감각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막군천?"

주변 경관이 일순간에 뒤바뀌고, 익숙한 인물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막군천은 생소한 인물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붉은색 도포 차림의 남자.

흐름으로 본다면 그 남자의 정체는 하나뿐이었다.

"혈교 교주."

봉효를 이 땅으로 보낸 인물이었다.

"이런, 이런.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왔군."

그는 명한을 발견하자 막군천을 밀어내며 뒤로 크게 물러났다.

막군천 역시 명한의 존재를 눈치채고 뒤를 쫓지 않았다.

삼각형의 각 꼭짓점처럼 셋이 서로를 견제하며 섰다.

"여기서 무슨 수작들이지?"

"쯧.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여기는 왜 온 거냐!? 아니, 이곳의 존재는 어떻게 알았지?"

"내 질문에나 답을 해라, 막군천. 아니면 그 잘난 머리통을 날려서 물어보는 수가 있어."

"흥. 네놈의 같잖은 협박이 통할 것 같아?"

역시 막군천 먼저 처리해야 할까.

명한의 발끝이 살짝 무게를 싣고 동작을 대비했다.

"경거망동은 삼가는 편이 좋을 거다, 소백."

하지만 그 움직임을 혈교 교주, 양생이 제지했다.

"이 땅은 우리의 이치가 닿지 않는 영역. 제아무리 고수라 해도 힘을 잘못 쓰다가는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수가 있어."

"……친절한 마음으로 충고해 주는 건 아니겠지?"

"후후. 그렇게 각 세우지 말고 여유롭게 한번 보자고. 이런 기회는 흔히 오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역사의 큰 전환점 위에 서 있다."

양생은 두 팔을 벌리며 크게 웃었다.

그 모습은 미치광이.

하지만 명한은 쉽사리 말을 뗄 수 없었다.

‘기운이 뭔가 이상해.’

양생의 말마따나 이 땅의 기운은 어딘가 이상했다.

"무당등룡 막군천. 너는 아마 루의 명령을 받아서 이곳까지 왔겠지? 잘도 어르신의 눈을 속이며 첩자질을 했어."

"흥. 애초에 서복이라는 늙은이는 날 담기에 그릇이 작다. 배신이라고 하기에도 우습지. 다 늙어 죽어가는 노인의 말벗이나 했을 뿐이다."

"큭큭큭. 무당산의 벌레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설치기는."

"감히 네놈이!"

막군천은 발끈했으나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래, 그래. 얌전히 있어야지. 아무리 둔한 네놈이라도 이제는 슬슬 알 때가 되지 않았나? 루의 늙은이는 네놈이 예뻐서 이곳으로 보낸 것이 아니야."

"뭐?"

"이곳까지 이어진 지독한 피 냄새는 맡지 못한 거냐? 이 땅을 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됐다고 생각하지? 단순히 문을 막은 문지기를 밀쳤다고 네가 이 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양생은 품에서 낡은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황제진경과 비슷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황궁에서 찾은 고문이다. 본래 도력제를 수중에 넣으려 한 것도 이 문서를 찾기 위함이었지만…… 이젠 됐어. 필요한 말은 모두 들어왔으니까."

"무슨 속셈이냐, 양생."

"영굴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함이다. 옛 황제의 죽음 이후로 천기는 뒤틀려서 자연히 등장해야 할 신수의 축복을 받지 못했지. 용과 봉황은 침묵하고 기린은 떠났다. 하지만 황실의 인간들은 이를 억지로 바로잡으려 했지."

"피를 대가로."

"그래. 그것이다, 소백!"

명한의 답에 양생이 박수를 쳤다.

입구부터 느껴졌던 지독한 피 냄새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전쟁. 기아. 이민족 탄압.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수많은 생명을 제물로 바쳤지. 그리고 억지로 영굴의 기운을 받아서 황실의 권위를 세웠어. 인간의 탐욕이 빚은 걸작이지. 세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신수조차 인간을 이기지 못한 거야. 대단하지 않나?"

"황실 대대로 이어지는 광증도 그 때문인가?"

"후후. 사람마다 영향은 다르지만, 맞다. 도력제는 특히 심성이 유약하여 그 여파가 컸지. 영겁의 세월 동안 이 땅에 쌓인 피와 죽음을 그는 견디지 못했어."

"지독하군."

"그래, 지독하지. 하지만 그만큼 위대하다."

양생이 펼쳐놓은 양피지가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루의 늙은이나 서복의 힘은 옛 황제가 어그러뜨린 천기의 대가야. 본래 이 땅이 가져야 할 기운을 그 둘이 앗아가 버린 격이지. 나는 그걸 인정하지 못한다. 영굴의 길을 열어서 놈들을 제거할 힘을 얻겠다."

"……네놈은 서복의 부하가 아니었나?"

"큭큭. 자기 살길만 찾는 늙은이를 왜? 멍청한 추종자 놈들은 늙은이가 영생을 얻으면 자신들도 불로불사가 되리라 믿지만, 그건 불가능해. 애초에 이치를 거스르는 걸 이 세상이 마냥 두고볼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네가 그걸 바로잡겠다?"

"인간이 낳은 과업은 인간이 치워야 하는 법이지."

양피지로 모이는 기운이 점차 많아졌다.

명한은 이것이 일종의 술법임을 감지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땅의 이질감은 그의 움직임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루의 늙은이도 서복도 이것만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땅은 그들의 눈으로도 닿지 않는 영역이니까."

"건방 떨지 마라, 양생! 네놈의 얄팍한 수법 따위 어르신의 눈을 벗어날 수 없어!"

"그럴까? 그럼 어디 지켜보자고."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양피지.

막대한 기운이 태풍처럼 그 중앙으로 모이더니 일순간에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이는 영기로 만들어진 폭풍이었다.

모든 개념적 현상이 무너지고 정신마저 아득하게 밀려났다.

― 움직여라.

― 이쪽이야!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두 개의 목소리가 겹쳤다.

하나는 은휘가 명한 자신에게로 향한 것.

다른 하나는 알 수 없는 존재가 청청에게 향한 것.

이내, 폭풍의 너머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

묘한 시선에 명한이 정신을 차렸다.

커다란 두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묘령의 여성이 바로 앞에 있었다.

놀라서 반응하려는 몸을 그녀가 손으로 꾹 눌러서 제지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엄청난 힘이었다.

"쉬고 있어. 경맥이 다쳐서 요양이 필요해."

"……누구시죠?"

"미요."

은휘가 말하던 그 인물이었다.

"그 안에 은휘, 그 사람이 있는 거지?"

그녀는 명한의 짐을 가리키고 있었다.

은휘를 담은 조사패가 있는 곳이었다.

"사부님과 아는 사이인가요?"

"사부? 네가 은휘, 그 사람의 제자야?"

"네. 부족하지만 귀문의 현 장문직을 맡고 있습니다."

"하하. 그렇게 걱정하더니, 결국 뒤를 맡기긴 했네."

반듯하게 이를 내보이며 웃는 미요의 모습은 어딘가 순수했다.

때 묻지 않은 아이의 느낌이었다.

"사부님과 생전에 알고 지내셨다면…… 평범한 인간은 아니겠지요?"

"응? 아, 응. 맞아. 난 인간이 아니야. 봐봐."

순간, 미요의 엉덩이 부근에서 북슬북슬한 꼬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겹쳐 있지만, 그 숫자가 몇인지는 한눈에 파악이 됐다.

전부 아홉 개의 꼬리.

‘구미호.’

전설 속의 존재였다.

"이걸 보고도 크게 안 놀라네. 역시 주변에 신수를 두고 있어서인가?"

"아. 청청. 그 아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쉬고 있어. 너보다 충격이 큰 터라 깨어나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야."

"괜찮은 거죠?"

"곁에 불사조가 있잖아. 안 죽어."

명한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 이런 거로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다.

좌정을 하고 앉아 몸 상태를 점검했다.

‘경맥이 찢어졌어.’

보통이라면 무공이 전폐될 정도의 부상.

하지만 명한의 경맥은 매우 자연스럽게 그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이곳은 영기가 충만하니까. 숨만 붙어 있다면 어떤 상처라도 치유할 수 있어."

그 기색을 읽은 듯 미호가 말을 덧붙였다.

영기가 충만하다는 말 그대로, 숨만 쉬어도 내공이 불어났다.

무림인이라면 꿈에서라도 그릴 법한 그런 장소였다.

"여긴 대체 어디입니까?"

"영굴. 중원에 흐르는 영기의 맥 중 가장 강력한 장소야. 숱한 영물의 고향이며 우리 같은 신수의 집과 같은 장소지. 뭐, 적어도 과거에는 그랬어."

"과거에는? 지금은 아니라는 겁니까?"

"황제. 너도 대충은 알고 있지?"

"네. 황제가 영생을 꿈꿨고, 그것을 위해 무언가 시도했다. 그 결과로 천기가 뒤틀렸다. 대충 이렇게는 알고 있습니다."

"응. 그 정도면 충분해."

미요가 풍성하게 자리한 꼬리를 다시 감추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선은 명한을 떠나 조사패가 있는 짐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음은 네가 설명하는 것이 어때? 게으름뱅이."

"……언제 적 별명이냐."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는 은휘.

조금은 지친 듯, 그러나 어딘가 즐거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이야, 미요."

처음 들어보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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