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6/235)

벽을 넘어서

봉효는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내며 잠에서 깼다.

반쯤 날아간 천장과 힘겹게 붙어 있는 기둥이 가장 먼저 반겼다.

저건 위태로운데, 묘한 생각이 우선.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는 벌떡 일어났다.

"크, 크으으윽!!"

하지만 이내 고통에 주저앉았다.

전신이 난도질당한 듯 지독하게 아팠다.

"누워 있어. 전신 경맥이 상했어. 술법의 영향으로 강제로 개통시킨 후유증이겠지."

"너, 너는……!"

"기억에 혼동이라도 생긴 거냐?"

곁에 앉아 손가락을 좌우로 움직이는 건 명한.

그제야 봉효가 앞뒤 상황을 모두 기억해 냈다.

자신은 복수를 위해서 고향을 찾았고……

형편없이 졌다.

"보, 봉효야! 깨어났느냐!?"

"아이고. 어디 아픈 곳은 없고?"

그리고 이들.

한때 부모라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봉효의 표정이 형언할 수 없는 형태로 일그러졌다.

"밀린 이야기는 들었다. 제사장의 요구로 마을의 젊고 혈기 있는 젊은이들이 차례대로 불려갔다고. 너도 그중 하나였고."

"……웃기지 마. 대체 이따위 마을이 뭐라고 우리가 희생당해야 하는 건데. 대체 그 일월교가 뭐라고 우리에게 그런 짓을 강요하는 건데!"

"보, 봉효야……"

"시끄러워! 당신들은 부모잖아! 부모라면 자식을 지켰어야지! 어떻게 부모라는 작자들이 자식을 제물로 바칠 수 있어!"

섬뜩할 정도로 소리치는 봉효에 촌장 부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들의 죄책감은 봉효의 분노를 감내할 수 없었다.

명한이 가볍게 혀를 차며 차오르는 분을 억눌렀다.

"그만해 둬.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부부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더라."

"큭! 무슨 사정? 자식을 제물로 바칠 만큼 큰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마을 사람 전부를 죽이겠다. 이거면 납득이 되냐?"

"……뭐? 거짓말하지 마!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어!"

"네가 잠들어 있을 때, 다른 주민들에게서도 확인했다. 제사장은 꽤나 집요하게 네놈을 원했던 모양이야. 널 내놓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이겠다고 협박했어."

"……"

봉효의 입술이 달싹이다가 그대로 멈췄다.

제물로 마을을 떠나는 그날.

부모는 무언가를 말할 듯 계속해서 망설였었다.

주변의 다른 마을 사람들 역시 안쓰러움과 두려움이 함께 섞인 눈으로 봤었다.

‘그게 전부 협박 때문이었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이유라면 있다. 네 체질이 금왕형체(禽王形體)더군. 짐승과의 교감에 능하고 영물이나 신수를 부릴 수 있는 타고난 신체였어. 마을을 걸고 협박한 건 널 노린 거였다."

"……날 노린 거였다고?"

"그래. 그리고 어쩌면 널 구해준 인물 역시."

"무슨 소리냐, 그건!"

"너무 공교롭지 않아? 제물로 바쳐진 네가 두 눈으로 끝나고, 딱 맞춰서 은인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거기다가 네 체질을 살린 술법의 전수까지. 너무 딱딱 맞아서 우연으로 보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봉효의 입이 다시 한번 달싹였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도 알고 있었으니까.

모든 것이 짜인 틀이고 그 안에서 자신은 손맛대로 움직이는 인형이라는 사실.

다만, 그걸 인정하면 복수라는 목표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스스로를 속였을 뿐이다.

"이제라도 알았다면 하릴없는 눈은 그만 삭혀."

"하지만 난……"

"잃은 건 시간뿐이야. 네게 더 이상은 어둠이 없어. 그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거냐?"

"아."

봉효는 자신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어색함조차 없었다.

몇 년간 자신을 괴롭히던 어둠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새롭고 기뻐 저도 모르게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아. 아아. 우리 아들. 이 어미가 전부 잘못했다. 잘못했어. 미안하다, 미안해."

"봉효야. 우리가 미안하다. 어떻게 해서든 널 지켰어야 하는데……"

"나는……"

눈물을 훔치며 부모를 바라보는 봉효.

그 눈에는 전과 같은 불길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색함과 거리감은 시간의 문제.

명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젠 당사자들의 시간이었다.

#

툭툭.

명한이 가볍게 손을 털었다.

봉효와의 싸움에서 얻은 감각은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었다.

무언가 하나의 선을 느낀 감각.

아직은 생소하지만,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 싸움에서 뭔가 있었지?"

어느새 다가온 청청이 슬며시 물었다.

"응. 무의 본질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가진 무공을 재정립할 기회였어."

"흐응. 어쩐지 느낌이 다르다 싶더니."

"다르다고? 어떻게 다른데?"

"이전의 너는 뭐라고 해야 하나…… 혼탁함? 분명 크고 강렬하기는 한데, 어딘가 정리되지 않은 혼잡함을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뭔가 정리가 된 느낌이야."

"뺘아."

그녀의 말을 금홍이 받았다.

정리가 되었다, 라는 의미는 단순히 무공의 질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청청이 보는 건 혼의 본질.

즉, 소백의 육체에 담긴 명한의 이질성이었다.

‘무아에 경지에 도달하면 모든 경계가 무의미해진다.’

외경의 여파로 괴리가 생기는 것도 막을 수 있다는 의미.

의외로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저기.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때, 촌장의 집에서 봉효가 다가왔다.

조금은 쑥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얘기는 잘된 거냐?"

"모르겠어. 아직 앙금이 다 풀렸다고는 말하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그래도 전처럼 생각 없이 날뛸 생각은 없어. 차분히 서로를 이해해 볼까 해."

"그래.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건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좋지."

"후우. 그래서 말인데…… 고맙다."

봉효가 허리를 숙여 깊이 인사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난 아무것도 모른 채 마을을 파괴했을 거야. 부모님의 말도 듣지 못했겠지. 그랬다면…… 뭐가 남았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해. 그걸 막아 준 네게는 어떤 말로도 부족한 빚을 졌다."

"의외로 예의가 바르네. 됐어, 허리나 펴. 나도 얻은 것이 있으니 비겼다고 해 두지."

"그럴 수는 없어. 오늘 받은 은혜는 어떻게든 갚을 거야."

"고집은. 뭐, 마음대로 해라."

"그럼, 일단…… 이 마을 너머에 있는 비밀에 대해서 알려줄게."

이런 은혜 갚기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명한이 즐거운 얼굴을 하고 봉효를 바라봤다.

"내가 마을에 온 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야. 하지만 날 보낸 교주는 다른 목적이 있었어. 하나는 배신자를 찾는 것."

"배신자?"

"막군천이라고 알아? 예전에 무당등룡으로 불렸던 기린아 말이야."

"하. 막군천이라니. 그럼 널 보낸 건 서복인가?"

"서복? 아니. 날 보낸 건 양생 교주님이야. 향간에서는 혈교라고 불리는."

"혈교. 그렇군."

확실히 생명을 가지고 노는 건 혈교가 더 잦았다.

악연은 돌고 돌아서 다시 만나게 되는 법.

명한은 그 흐름을 다시 한번 느꼈다.

"말했다시피 첫 번째 목적은 배신자 막군천을 찾아서 제거하는 거야. 그리고 두 번째는 망야산에 숨겨져 있는 영굴(靈窟)을 찾는 거지."

"영굴?"

"내가 알기로 천산, 무당산 같은 영기가 집약되는 장소라고 알아. 그중에서도 영굴은 그 정도가 막대하다고 했어."

"그걸 혈교의 교주가 왜 찾는 거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그 안의 어떤 존재가 천기를 움직일 수 있다고 했어."

"천기라고?"

영물이나 신수가 인외적인 힘을 내는 건 경험해서 안다.

하지만 천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흔히 말하는 전설의 일종이야. 성군이 탄생할 때면 북쪽 산에 불사조가 내려온다. 용왕이 보화를 내려준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간다. 다 비슷한 모습이지. 특정한 사건이 벌어질 때면 이런 신수가 변화를 보인다는 거지."

"신화가 단순히 신화가 아니다?"

"적어도 교주는 그렇게 믿고 있었어."

이런 맥락이라면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다.

용이나 불사조 같은 신수가 천기에 민감한 존재라면 작금의 흐름에 별도의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청청과 금홍을 나와 붙여서 보낸 건가?’

은휘의 행동도 이해가 됐다.

"위치는? 가는 방법도 알고 있어?"

"교주는 이걸 가져가라고 했어. 피가 길을 알려 줄 거라고."

봉효가 품에서 낡은 청동 조각 하나를 건넸다.

세월이 그대로 묻어나는 형태였다.

"……피 냄새."

저절로 코가 찌푸려질 정도의 피 냄새가 풍겨왔다.

"피 냄새?"

"이게 안 나? 피에 절은 지독한 냄새가 나는데."

"나는 전혀."

고개를 흔드는 봉효에게 거짓은 없다.

‘나만 느낄 수 있는 냄새인가?’

단순한 물건은 절대로 아니었다.

"어쨌든 그 물건까지 전부 네게 맡길게.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게 우습지만, 교주가 마을에 관심이 있다면 분명 횡액이 닥칠 거야. 네 목적과 부합한다면 전부 맡기고 싶어."

"아니더라도 어차피 할 일이었어. 넌 이곳에서 밀린 이야기나 나눠."

"……고마워. 이 은혜는 평생토록 잊지 않을게."

다시 고개를 숙이는 봉효.

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 정도면 여기는 충분히 봉합했다.

명한이 청동 조각을 손으로 움켜쥐며 마을 밖을 바라봤다.

‘저 너머인가.’

다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거대한 벽앞에 막군천이 섰다.

세상의 모든 ‘붉음’은 다 모아 놓은 듯 완벽하게 붉은색이었다.

산의 중턱부터 하늘에 닿을 듯 그 높이마저 대단했다.

이런 모습이 밖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대단하군. 이게 바로 그 영굴인가."

순수하게 감탄하며 막군천이 벽으로 손을 뻗었다.

파짓―!

순간, 손끝을 타고 흐르는 강한 기운.

뻗었던 손을 황급히 거두며 물러나야 했다.

"이게 바로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구벽(九壁)이로군. 확실히 내 실력으로는 어렵겠어."

손끝을 혀로 적시며 막군천이 나무로 된 영패를 꺼냈다.

하나하나가 다른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 숫자가 전부 아홉.

벽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하나씩 꽂았다.

"후후. 이 땅 너머에 세상의 운명을 좌우할 힘이 있다는 거지?"

그의 얼굴 위로 탐욕이 번졌다.

감출 수 없는 갈증이었다.

무당산을 떠나고 난 뒤 여러 곳에 고개를 숙이며 기회를 탐하지만, 지우지 못한 욕심.

남들 위에 서기 위한, 힘에 대한 갈망이었다.

[……안 돼]

그때였다.

벽의 붉은색이 짙어지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매우 흐리고 힘이 없었지만, 소리는 뚜렷했다.

"하하. 벽의 주인께서 행차하셨군. 하지만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벽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가?"

막군천은 그 존재에 놀라지 않았다.

웃음 섞인 말로 그 상대를 조롱했다.

[너는 자격이 없다. 물러나라]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는 아예 팔짱을 끼고 웃었다.

이 존재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자신은 입김만으로 재가 될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힘이 영글어 과실로 맺기 전.

가장 약한 시점을 노리고 찾은 것이었다.

"어차피 혼천의 개들이 찾아오면 그 망할 전쟁의 도구가 되고 만다. 차라리 내게 복종하여 새로운 군림의 씨앗이 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양팔을 쫙 벌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자격이 없다]

"……큭. 큭큭. 고작 벽 뒤에 숨은 여우 새끼 주제에 누구에게 자격 타령이냐? 내가 이 벽을 무너뜨리고 네놈의 꼬리를 전부 태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지켜보마."

자격이라는 말이 꽤나 막군천을 자극했다.

비릿한 웃음 속에 분노를 녹이며 챙겨온 영패를 전부 바닥에 깔았다.

아홉 벽에 맞춰서 구성된 아홉 개의 쐐기였다.

양손을 펼치며 준비해온 주문을 외웠다.

[안 돼!]

다급한 목소리가 그 너머를 울렸지만……

막을 방법은 없었다.

영패의 빛이 벽을 향해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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