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명한은 벼락처럼 몰아쳤다.
쌍수로 휘감은 극천일무기의 기운이 태산이라는 이름의 곰을 압박했다.
서로를 갉아먹는 기운이라면 파괴의 화신인 극천일무기가 단연 우위.
곰의 흉성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말도 안 돼!"
"세상에 말이 안 되는 건 없어."
주먹이 태산의 아랫배를 두드려 구석으로 처박혔다.
궤적에 걸린 기둥이 부서지며 건물 지붕은 그대로 붕괴.
왁, 소리와 함께 촌장 부부가 다급하게 도망쳤다.
삽시간에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청청, 부부를 잡아 둬. 끝나고 물어볼 게 많으니까."
"흥. 잔심부름만 시키기는."
툴툴거리며 청청이 잔해를 걷어냈다.
금홍이 두른 금색의 막은 외부의 물리적인 간섭도 배제했다.
둥둥 떠 있는 잔해에 촌장 부부는 입만 떡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시, 신선!?’ 횡설수설하는 모양새가 위협이 될 존재는 아니었다.
"크윽! 너, 보통 놈이 아니구나!"
잔해가 폭발하며 호랑이를 탄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머리 위로 덮어쓴 먼지를 제외하면 딱히 큰 피해는 없어 보였다.
성난 얼굴로 명한을 쏘아봤다.
"그걸 이제 안 거냐? 네놈도 꽤 눈치가 없는 모양이군."
"시끄러워! 왜 남 일에 끼어드는 거냐!? 이건 어디까지나 내 일이야!"
"저 부부와 일이 있는 건 나다. 끼어든 건 네놈이 아닌가?"
"닥쳐!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남자가 호랑이 위에서 뛰어내렸다.
멀찍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본 모습은 꽤 어렸다.
얼핏 명한 자신과 엇비슷한 나이.
"효, 효아!? 봉효니!?"
"봉효! 봉효라고!? 우리 아들이 살아 있었다고!?"
그 모습에 놀란 건 명한이 아닌 촌장 부부였다.
두 사람은 청청에게 제압되어 있으면서도 남자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부른 이름 ‘봉효’라는 단어에 명한이 시선의 의미를 바꿨다.
"네가 저 부부의 아들이었나 보군."
"아들? 그런 인연 따위는 옛적에 끊었다. 저들이 날 버린 날 나도 저들을 버렸어."
"저들이 널 버렸다고?"
"그래. 이 땅의 저주받은 귀신에게."
봉효는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본래라면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오래된 상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촌장 부부는 아연한 얼굴을 하고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죄책감’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묵은 사연이 있는 모양이네."
"안다면 비켜라. 나는 천륜을 버린 이들을 징죄하고 이 저주받은 마을을 정화해야 한다."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하겠어. 나도 이 마을에 용건이 있거든. 저 부부를 만나고 싶다면 나를 먼저 상대해."
"너……!"
봉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이내,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귀향의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이야. 그걸 위해 감내했던 시간이고."
"음?"
"네 만용은 죽음으로 갚아라."
손을 타고 있던 호랑이 쪽으로 뻗는 봉효.
이에 호랑이의 몸이 물처럼 가라앉더니 그의 손을 타고 하나로 합쳐졌다.
인간과 영물의 합체.
‘이건 또 뭐야. 뭔 변신물도 아니고.’
명한으로서도 당혹스러운 모습이었다.
"……혈법(血法), 혼괴(混怪). 이름은 알고 죽어라."
인간과 호랑이를 반반 섞은 모습으로.
봉효가 달려들었다.
#
인간의 무공은 기본적으로 약한 생물이 강한 생물을 상대하기 위해 존재한다.
육체적인 강함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언제나 자연 속에서 약자였으니까.
내공도, 기술도, 보법도.
모든 것이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게끔 구성됐다.
하지만 인간의 본래 육체가 훨씬 강하다면 어떻게 될까.
내공의 흐름, 기술의 방식, 전투의 흐름……
모든 것이 달라진다.
"……호권(虎拳)?"
봉효는 날렵한 걸음으로 간격으로 파고들어서 손을 내질렀다.
소림사의 기본 권인 호권의 일종이었다.
낮은 체간과 강맹한 권은 일절이지만, 그 자체로는 높은 수준의 무학이 아니다.
기준이 인간이라면.
퍼엉!!!
‘무거워?’
둔탁한 충격과 함께 명한이 크게 밀려났다.
가이신공으로 보호받는 몸이 욱신거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나는 신공을 익힐 재능도 신묘한 초식을 다룰 기본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범의 육체로 인간의 무공을 풀어낼 수 있지. 무공은 더 이상 약한 자의 것이 아니다."
"……하. 혼합 테크트리냐?"
"테크…… 뭐? 괴상한 소리 하지 마라!"
봉효의 공세가 이어졌다.
몸을 한계까지 낮추며 거리를 제압.
인간의 근력을 훌쩍 넘는 강권을 쉼 없이 쑤셔 넣었다.
내공 자체는 엄청나지 않았지만, 육체가 범의 그것이면 이야기가 달랐다.
‘이건 꽤 까다롭다.’
가이신공의 반탄력도 반야신공의 반격도 이질적인 공세에는 맥을 추지 못했다.
무공의 기본은 경험이나 안력을 통한 동작 예지와 반응에 있다.
인간이면 이렇게 움직인다, 라는 당연한 추측에서 시작되는 반응.
하지만 봉효의 동작은 인간의 형태를 완전히 탈피했다.
학을 흉내 내는 학권을 쓴다고 학이 되는 건 아니고, 범을 흉내 내 호권을 쓴다고 진짜 범이 되는 건 아니었다.
봉효를 만나기 전까지는.
"받아라! 이게 복수를 위해 모든 걸 바친 인간의 힘이다!"
쉼 없이 쏟아지는 공격에 명한이 밀려났다.
단순히 경지나 위력으로는 이전에 상대했던 이들과 비교도 되지 않았지만, 이 끝없는 육체의 충돌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런 공방은 익숙하지 않았다.
‘수가 너무 많아. 머리가 복잡하다.’
의문에 대한 답은 명한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단순하게 가자. 단순하게."
여러 기운과 여러 무공.
꼭 많은 것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싸움이라는 건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얼마나 빠르게 도달하는가의 싸움.
얄팍한 여럿보다 깊은 하나가 더 좋을 때가 많다.
‘사부님이 하신 말씀도 이런 거야.’
명한은 너무나 빠르게 많은 걸 익혔다.
묵혼공. 아니, 가이신공만 해도 족히 십 년은 익혀야 대성할 무공.
가이신공, 묵혼공, 극천일무기, 멸아, 반야신공……
쉼 없이 익힌 무공은 기운의 쓰임부터 몸의 반응까지 모든 걸 다양하게만 만들었다.
몸은 하나인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이제 끝을 보자!"
"……"
버리고 버리자.
모든 상식과 틀을 버리고 눈앞의 것에만 집중하자.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
작은 것을 알고 다시 작은 것을 알아가면 될 뿐.
"뭐!?"
벼락같이 치솟은 봉효의 손목을 명한이 낚아챘다.
몸은 충격에 들썩이지만, 넘어가지는 않았다.
단순한 탈력의 요령으로도 이건 충분히 대응이 가능했다.
‘그래. 눈앞의 한 수에만 집중하면 돼.’
이치와 흐름은 작은 걸음의 연결일 뿐.
수를 단순하게 하자 복잡하던 머리가 깨끗하게 씻겨졌다.
더 이상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 초대 천마도 같은 길을 걸었구나."
이것이 바로 무아의 시작.
다양한 무공을 빠르게 익히고……
또한, 그것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극히 제한된 소수에게만 허락된 경지였다.
과거에 존재했던 초대 천마가 그러했고.
지금 명한이 그러했다.
"무슨 수를 쓴 거냐!?"
"쓰지 않고 버렸다."
"크윽! 어디서 선문답을!!"
분노는 봉효의 권리였다.
그의 양손은 거대하게 부풀어서 명한을 좌우에서 압박했다.
그 속도와 기세는 지금까지의 공격 중 최고였다.
"가장 가까운 걸음." 하지만 명한이 한 걸음 다가왔을 때.
그렇게나 강대하던 기세가 한 번에 꺾였다.
위력을 내기 위해 최소한의 거리가 필요하다는 단순한 이치였다.
그리고.
빠악―!
"크, 크윽!!"
명한은 그 거리 안에서 그대로 박치기를 했다.
무인이 쓸만한 수법은 아니지만, 그 거리 안에서라면 최고의 선택이었다.
강한 짐승이라도 턱은 언제나 약점.
봉효가 휘청거리며 물러나자 벌어진 간격을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앞으로 내딛는 큰 걸음과 그대로 이어지는 허리의 회전.
단순하지만 그만큼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붕권(崩拳)이었다.
사용한 내공은 대수롭지 않았지만, 시기, 타점, 거리, 속도.
모든 면이 최선이었다.
위력은 몇 갑자의 강검에 뒤지지 않았다.
"쿨럭! 쿨럭!! 이건 불가능해! 어떻게 일개 인간이!?"
"기초로 돌아가 보자고."
"――!"
어느새 그림자 사이로 파고든 명한.
겨우 정신을 차린 붕효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고, 전신을 두드렸다.
인간과 짐승이 섞였기에 요혈은 알 수 없었지만, 앞선 움직임에서 봐 둔 것이 있다.
언제나 축이 가장 약한 법.
행동의 축이 된 부분을 모조리 때렸다.
이번에도 사용한 내공은 매우 미미했다.
"커어억……! 내, 내 몸이 왜 이러지!? 고작 이런 타격에!?"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야. 무공은 약한 인간이 강한 동물을 상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 이치를 따지자면 동물과 하나가 된 네놈은 결코 나를 이길 수 없어."
"웃기지 마!"
큰 동작.
명한이 가볍게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손을 흘리고 털을 잡아서 그대로 엎어 쳤다.
한 배 반은 더 큰 봉효였지만, 균형이 무너졌다면 이미 붕괴된 둑이었다.
그대로 머리부터 땅으로 처박혔다.
"커, 커어억! 우, 웃기지 마! 교주께서 주신 벌레가 있다면 이딴 상처 따위……"
"이런 하찮은 것에 의지하지 마."
그대로 봉효의 입으로 주먹을 쑤셔 넣었다.
놈은 깜짝 놀라서 버둥거렸지만, 다른 손과 무릎이 축을 누르고 있었다.
손으로만 땅을 치며 쿵쿵거리다, 속에서 무언가를 게워냈다.
황제의 피로 만들어진 벌레였다.
"으…… 으아아아아!!!"
동시에 봉효의 몸이 이리저리 뒤틀리며 피와 살점 따위를 쏟아냈다.
벌레의 힘으로 억지로 잡아둔 호랑이의 육신이었다.
술법이라는 건 매개체가 없으면 유지될 수가 없었다.
"쿨럭! 쿨럭! 어, 어떻게!? 한번 시전한 혈법은 강제로 해제할 수 없어!"
"완전히 융화되었다면 모르겠지만, 이 정도라면 떼어낼 수 있다. 고작 벌레 따위가 인간을 완전히 집어삼킬 수는 없지."
"……하. 하. 뭐야, 이게."
봉효가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고향을 떠나서 수년.
혈교 교주의 눈에 띄어서 온갖 고초 끝에 특별한 힘을 얻었다.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열망이 없었다면 견디지 못할 그런 고통이었다.
헌데……
이게 뭔가.
다시 찾은 고향에서 복수는커녕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당했다.
벌레의 힘도 사육한 영물도.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너무 한심하고 비참했다.
"보, 봉효야!! 봉효야!!"
"아이고, 어르신! 이 아이는 안 됩니다! 이 아이만큼은 안 됩니다!"
그때였다.
청청이 제압하고 있던 촌장 부부가 바닥을 기듯이 달려와서는 봉효의 앞을 막았다.
텅 빈 등을 그대로 내보이며.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어차피 이 늙은이들 목숨은 없는 거와 다름없습니다! 우리를 대신 죽이고 봉효는 살려주십시오. 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앞에서 무릎 꿇고 비는 촌장 부부.
봉효는 울컥하고 감정이 치솟는 걸 느꼈다.
자신이 왜 그런 고통을 감내하며 힘을 얻었는데.
대체 왜 자신들이 용서를 빈단 말인가.
‘차라리……’
저 등에 주먹을 쑤셔 넣을까.
힘이 바닥났어도 촌부 둘은 손쉬운 일이었다.
"……"
하지만 되지 않는다.
어째서? 일말의 양심 때문에?
한때 부모였다는 이유 때문에?
너무 화가 나서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대로 드러누워 뿌옇게 흐려진 하늘을 바라봤다.
……바라봤다?
"그대로 누워 있어라. 네가 그 손을 뻗었다면 여기서 죽이려 했지만, 일말의 양심은 있는 것 같아서 살려두마."
"아."
이마에 닿는 손길.
더 이상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