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235)

무릉도원

부스스한 머리를 털고 명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로가 제대로 풀리지 않은 듯 전신이 무거웠다.

찬 바람이라도 얼굴에 쐴 겸, 2층 난간으로 나왔다.

"호오. 이 새벽에 일어난 게냐?"

그곳에는 선객이 있었다.

"이 시간에 잠도 안 자고 뭐 하는 거지?"

"늙으면 잠이 줄어드는 법이니까."

긴 곰방대를 물고 있는 화무천이었다.

명한이 잠시 바라보다 그 옆에 주저앉았다.

곰방대를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연초라도 태우는 건가?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후후. 귀의가 준 약초다. 통증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지."

"통증?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거냐?"

의아하다는 듯 묻는 명한에 화무천이 가볍게 웃었다.

"나이를 먹다 보니 안 쑤시는 곳이 없더군. 왕년에 그 난리를 치고 다녔으니 몸이 멀쩡하면 더 이상한 것 아니냐?"

"새살림 차린 사람이 그런 소리 하면 곤란하지 않나?"

"하하. 뜻을 이루면 그 시간이 찰나라 해도 만족할 수 있는 법이지. 그녀를 바란 마음을 이번 생에 이루었으니, 후회는 없다."

"쓸데없는 허영이야. 그 고생 끝에 사랑하는 사람 만났으면 벽에 똥칠하기 전까지 아득바득 행복하게 살기나 해."

"네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하구나."

"뭐, 이제 와서 누굴 탓하겠어."

탓하고 원망해봐야 지나간 일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화무천 정도면 충분히 벌을 받았다.

"그래…… 네 말마따나 비우는 건 추후의 일로 미뤄야겠다."

"갑자기 우화등선이라도 할 것 같아?"

"하하. 나 같은 악당이 등선하면 배 잡고 나뒹굴 신선이 수십일 거다. 하지만 속세의 육체가 한계에 달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봐야겠지."

"뭐? 이봐. 정말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명한이 몸을 돌려서 화무천을 마주 보게 앉았다.

"너도 외경의 힘을 써봤으니 어느 정도 감이 올 텐데?"

"무슨 소리야?"

"밖에서 관조한 속세는 너무나 작고 덧없는 것이다. 그 경치를 보고 온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을 두기가 어렵지."

"그걸 봤어?"

"최근에. 다 버리고 손에 쥔 행복에 만족하니, 그제야 극천일무기의 진정한 모습이 느껴지더군.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무공은 한계와 틀마저 이기려 들었지. 강유옥과의 싸움에서 열 합의 제한을 건 건 주변 사람을 지키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화무천이 가볍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 모습에 명한은 자신의 눈을 소매로 비벼야 했다.

바로 앞에 존재하는 화무천의 모습이 지워질 듯 흐릿했기 때문이다.

"……방금 그게 외경의 대가라는 거냐?"

"대가라. 그 말에는 어폐가 있다. 외경의 힘은 말 그대로 세상의 구속 밖에 존재하는 미지의 것. 속세의 육체로 그것을 감당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지."

"외경의 힘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등선을 한다는 건가?"

"어쩌면 과거의 신선들은 이 경지를 엿보고 탈각에 든 건지도 모르지."

"하. 기껏 힘을 얻어놓고 떠나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후후. 그만한 것을 얻었으면 세상에 미련을 두기 어려운 법이지. 네 가까운 이도 이를 알고 있지 않더냐."

"은휘 사부님."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은휘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본질을 보던 천재.

그 아득한 천재성으로 이른 나이에 육체를 버리고 영의 세계로 떠났다.

"하지만 사부님은 완전히 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었어."

"그건 그가……"

"이 몸이 어마어마한 천재이기 때문이다."

화무천의 말을 어느새 나타난 은휘가 받았다.

"사부님. 사부님이 본 것도 역시 외경의 그것이었습니까?"

"우리 모두가 뭉뚱그려서 외경이라 칭할 뿐, 그 본질을 아는 이는 없다. 신선의 고향인 선계일 수도 명왕도에서 보았던 삶과 죽음의 교차로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 선을 넘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인 현상이지."

"미련이 없어지는 현상 말인가요?"

"그래. 높은 산에 오른 자는 산 아래의 인간을 작은 개미처럼 보게 되지. 외경에 발을 디딘 자는 한결같이 의식의 확장을 겪는다. 만사가 무의미해지고 미련은 연기처럼 희미해지지. 나 역시 귀문에 혼을 묶지 않았더라면 세상 너머로 사라졌을 것이다."

명한은 귀문의 묵혼공을 미끼로 은휘를 이 땅으로 불러냈었다.

은휘를 이 세상에 묶어둔 닻과 같은 역할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해결하지 못한 미련이 깊지 않았다면 나 역시 세상을 등지고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 공허함은…… 인간의 의지로는 견디기 어렵지."

화무천이 은휘의 말을 뒷받침했다.

이룰 것을 다 이루고 난 뒤에 찾아온 깨달음.

명한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면 그대로 우화등선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것을 이 세상의 억제력이라고 본다."

"……억제력이요?"

"외경의 힘은 화경 현경으로 이어지는 무림의 구분과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의 강함을 다루지. 그렇기에 이 세상은 그런 경지에 든 자를 세상에서 격리시키는지도 모른다."

"미련을 지우는 것으로 말인가요?"

"옛말처럼 선경에 드는 걸지도 모르지. 중요한 건 속세에 매인 채 그 힘을 자유롭게 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악―!"

옆구리를 쿡 찌른 은휘의 손에 명한이 비명을 토했다.

꾹 참고 말 그런 통증이 아니었다.

"화가 아이와 강가 아이의 싸움에서 크게 노출됐어. 네 안의 힘이 자연스럽게 반응하여 널 흔들어 놓으니 육체가 뒤틀릴 수밖에."

"끄응. 제 육체가 왜요?"

"네가 지닌 힘은 네가 얻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재주가 가능하다는 것도 의문이지만, 이 탓에 혼과 육체의 괴리가 심해졌어."

"혼과 육체의 괴리……"

"알지 않더냐. 애초에 넌 혼과 육체의 동화가 완벽하지 않아. 괴리가 심해지면 아예 잘려나갈 수도 있다."

명한의 혼과 소백의 육체.

은휘의 눈은 그 사이의 균열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부님."

"그걸 위해 존재하는 것이 묵혼공이다. 혼기를 쌓아서 육체라는 땅에 깊고 깊은 뿌리를 내리는 것이지. 하지만 네놈은 너무 많은 걸 익히고 너무 빠르게 달려왔어. 계속 이런 식이면 견디지 못할 거다."

"……하지만 지금 멈춰 설 수는 없어요."

"쯧쯧. 그걸 아니 내가 걱정하는 것 아니냐."

은휘가 혀를 차며 명한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희미하게 가 있던 혼과 육체의 균열이 천천히 사라졌다.

"……어?"

"임시방책일 뿐이다. 본질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어."

위아래로 명한을 훑으며 은휘가 말을 이었다.

"루에 황제진경을 찾으러 가기 전에 나와 함께 어디를 잠깐 가자."

"사부님과요? 어디를……?"

"소싯적 세상을 주유하며 알게 된 인연이다. 청청 그 아이와 금홍도 준비하라 전해."

"청청과 금홍까지요? 대체 어디를 가시기에 그러시는 건가요?"

어색한 조합에 명한이 다시 물었다.

"무릉도원이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

오래된 사당 앞에서 한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그린 듯한 이목구비에 훤칠한 자태를 지닌 막군천이었다.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망야산(忘夜山)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산의 중턱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 혼자가 아니었다.

"막 형. 정말로 여기가 전설 속의 선경이라 이거요?"

"그냥 오래된 사당 같은데. 여기가 맞는 건지 모르겠네요."

"흥. 그럴 줄 알았다고. 무당에서도 쫓겨난 인간이 무슨 수로 그런 정보를 얻어?"

한때, 칠룡팔봉으로 엮이던 무림의 기린아들이다.

어느 날 불쑥 도착한 막군천의 서신을 받고 이렇게 모였다.

그들의 무거운 엉덩이를 떼게 할 만큼 중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후후. 나, 막군천이 장담하네. 우리 아우님들에게 굳이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나."

"맞아요. 막 오라버니가 우리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죠."

"흥. 끈 떨어진 신세에 손이라도 벌리려는 거 아니야? 장문이 바뀌면서 무당에서 완전히 내쳐졌다는 소문이 있던데."

"황 오라버니!"

"뭐?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나? 예전에는 무림등룡이라고 으스대던 놈이 끈 떨어지니 별거 없는데?"

한때의 의리로 걸음을 한 이들도 있지만, 반대도 있었다.

특히 황가 산장의 소주인 황윤은 평소에도 막군천을 고깝게 봤었다.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황보소혜가 막군천을 짝사랑한 탓이다.

다른 놈이라면 힘으로 꺾어 버리겠지만, 막군천은 그럴 대상이 아니었다.

무당에서 끈 떨어진 막군천을 고소하게 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황 형제는 내가 실없이 이곳으로 불렀다고 생각하는 건가?"

"형제는 무슨. 막 형. 아니, 막군천. 전에야 네가 무당의 후계자로 칠용의 수좌인 척 으스댔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이런 편지 한 장 따위로 우리를 오가게 할 만큼 네놈은 가치가 없어."

"호오. 그럼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지?"

"그야 네놈 낯짝이나 한번 볼까 해서 왔지. 무당에서 쫓겨난 이후로 중원을 전전한다는 이야기가 돌던데. 그 꼴이 어떤지는 꼭 한 번 봐야 했어."

황윤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막군천을 도발했다.

칠룡의 순서가 매겨진 것은 벌써 일 년 전.

그사이에 무당에서 쫓겨난 막군천과 다르게 자신은 황가의 무공을 모두 익혔다.

지금이라면 잘난 무당등룡을 누르고 황보소혜의 마음을 뺏어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황 형제가 평소에 날 곱게 보지 않았나 보군."

"형제라는 말 집어치우라고 했지? 내가 너 따위와 형제를 맺을 위치 같아? 주제를 알아라, 막군천. 넌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무당에서 쫓겨난 낭인에 불과하다고."

"이거 새로운 기분이군. 그래도 편지 한 장에 이곳까지 와 준 터라 조금은 미안했는데."

"흥! 고마…… 응? 미안하다니?"

찾아왔는데 왜 미안한가.

황윤의 눈동자에 의문이 새겨졌다.

그리고 그때.

서걱―!!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무언가 황윤의 오른팔을 스쳐 갔다.

잠시의 정적을 끝으로 고통과 피가 이어졌다.

"아, 아아아악!!!"

비명은 그보다도 한참이나 늦었다.

피가 솟구치는 오른팔.

아니, 오른팔이 있던 자리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는 조금 전의 비릿한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들 내 서신에 화답해 줘서 고마워."

"마, 막 오라버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막군천! 미친 거냐!? 네가 감히 어떻게 황 형을 공격할 수 있어!"

"네가 정신을 놨구나, 막군천!"

저마다의 무기를 속속들이 뽑아 들었다.

이 상황을 믿지 못하는 몇몇을 제외하면 뚜렷한 적의를 드러냈다.

육안에도 잡히지 않을 속도였지만, 막군천이 오른손에 쥔 검의 흔적은 분명했다.

새빨간 피.

황윤을 벤 건 막군천이었다.

"내가 서신에 적지 않은 내용이 있어. 여기가 전설 속의 선경인 건 맞지만, 보통은 출입이 불가능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젊고 신선한 제물이 필요하거든."

"제…… 물이라니? 무슨 소리예요, 막 오라버니!"

"후후. 걱정할 것 없어, 소혜야."

"그, 그렇죠? 뭔가 오해였죠? 네?"

"아니. 고통은 없을 거라는 얘기야."

"……어?"

순간.

선들이 복잡하게 공간을 가로질렀다.

놀람, 당혹, 배신감, 당혹……

여러 표정을 한 머리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흘러나온 피는 지독하게 붉었다.

그르르르릉.

그리고 이어지는 마찰음.

"후후. 고맙군. 너희 목숨은 날 위해서 잘 쓰도록 하지."

이내, 막군천의 모습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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