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235)

새로운 가면

그건 우연이 겹쳐서 낳은 기적에 가까웠다.

강유옥의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서 백은 흩어지고 없었다.

세상에 남은 건 그저 생전의 메아리뿐.

그것이 화무천과의 경합에서 세상으로 흘러들어왔던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떠났다는 건가."

하지만 그래도 그건 마지막 답으로 삼기에는 충분했다.

강유옥은 부서진 인형처럼 한참을 흐느끼다, 강유의 기척에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명한은 잡을 수 있었지만, 잡지 않았다.

자신의 굴레가 부서진 사람은 그걸 수습할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다. 그때가 되면 너도 그에 맞는 답을 내놓으면 되겠지."

"그가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날 버린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네게 용서를 권하는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그건 너와 그의 일이니까."

"젠장."

강유는 떠나고 남은 흔적에 혀를 찼지만, 전보다는 가벼운 얼굴이었다.

적어도 강유옥이 그의 죽음을 두려워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들이 바라는 건 어쩌면 단순한 부정.

묶은 고리를 푸는 건 단순한 접근이 시작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받아라."

강유가 불쑥 양피지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진짜 황제진경이 숨겨진 지도다. 네가 거느린 흑점이라면 해독이 어렵진 않겠지."

"이걸 이렇게 건네주는 건가?"

"그 미련한 인간이 어머니 시체로 쓸데없는 짓은 더 이상 안 하겠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빡빡하게 약속 내용으로 따져 물을 생각은 없어."

"그렇게 말한다면 고맙게 받지."

"다만."

양피지를 강유가 잡고 한마디 덧붙였다.

"황제진경을 지키고 있는 건 은사님의 제자들. 저기 저 구문자와는 사형제 되는 인간들이다. 속세로 떠난 그와는 다르게 철저하게 환상루를 위해서 움직인다. 널 죽이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지."

"갑자기 경고해 주는 건가?"

"……어쩌면 모든 것이 선의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응?"

강유의 입술이 달싹였다.

남에게는 들리지 않는 전음이었다.

명한의 눈이 살짝 뜨였다 가라앉았다.

"전할 말은 전부 전했다."

"형제의 조언 정도로 받아들이지."

"흥. 형제를 논하는 건 오늘까지다. 다음에 본다면 중원의 패자를 논하는 경쟁자의 위치겠지. 한번 손을 잡았다고 계속 같은 편이라 여기지 마라."

"그래, 그 편이 더 어울린다."

가볍게 손을 내미는 명한.

강유는 그 모습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다 마지못해 잡았다.

[……어색해하고 있다]

그의 상념이 손을 통해서 전해졌다.

‘그러고 보니 전에는 이게 먹히지 않았는데.’

무언가 변하기라도 한 건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 강유의 머리 위로 빠져나가는 희뿌연 형체가 보였다.

"죽지나 마라."

하지만 알아보기도 전에 그 형체는 사라졌다.

툴툴대는 강유의 목소리 너머.

명한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상황에 대한 수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당시 대회를 위해 준비 중이던 모든 이들이 당시 강유옥이 보여준 압도적인 파괴력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그중 몇이 강유옥이 오래전에 사라진 강남 대협임을 알아차렸다.

이를 흑점이 교묘하게 섞어서 소문으로 만들었다.

비밀리에 대회에 참여한 강남 대협 강유옥이 패배를 시인하고 떠났다는 식이었다.

세월이 지났어도 강남 대협 강유옥이라면 명가의 장문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물.

게다가 그 당시의 파괴는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소명회에는 무극경의 고수가 있다? 무극경은 뭐야."

"세간에 퍼지는 소문이에요. 현경을 초월한 경지라나 뭐라나."

"하여튼 이름 붙이기는 좋아하네."

절반 넘게 허풍이 섞였지만, 효과는 발군이었다.

그럭저럭 소명회가 신교나 무림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력으로 인지되기 시작했다.

실질적인 효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목적을 이뤘다.

소명회라는 가능성이 있는 이상 신교와 무림맹으로 양분이 되는 건 막았다.

"무림맹 쪽 반응은 어때?"

"술렁이고 있어요. 이탈자가 많은 데다가 무림대회 건으로 이목이 꽤 쏠렸어요. 예전만큼의 결집은 안 되는 모양이에요."

"일단은 충분한가."

"당분간은 움직이기 힘들 거에요. 신교에서도 그렇고 연달아 혼천의 중요 인력을 잃었어요. 그들이 아무리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도 주춤할 수밖에 없죠."

명한이 일월의 정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신교에 숨겨 두었던 세력, 무림맹을 중심으로 모으려던 세력, 따로 움직인 세력.

이래저래 손실이 많은 건 혼천뿐이었다.

"하지만 이건 확실히 의도가 보이는군."

"네. 전에 말씀하신 것이 아무래도 사실 같습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보이는 사실이었다.

이번 무림대회의 준동은 막군천의 행동에 대한 반응.

각 문파의 핵심 일원을 신교의 책임으로 살해하려는 음모가 있었다.

사전에 눈치챈 명한이 급히 이를 막기는 했으나, 이런 급급한 행동은 혼천의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강유가 우리를 찾은 건 어머니의 시체가 사라졌기 때문. 하지만 이 또한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 사실이야. 중간에 다른 자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보는 편이 옳지."

"그게 막군천이라 이거군요."

"그이거나, 그를 움직이는 인간이겠지. 강유옥을 자극하면 강유가 반응해서 우리를 찾을 거라고 판단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인간. 결과적으로 강유옥은 혼천에서 이탈. 청마저 서불을 노리고 왔다가 죽었지. 서불. 그래 서불 건도 이상하네."

"청 정도 되는 고수가 가둬둔 건데, 불시에 탈출한 것도 뭔가 수상쩍기는 하네요."

"뭔가 뒤에서 구린 움직임이 있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도 확실한 흐름이 있었다.

"짚이는 곳이 있나요?"

"……있어. 하지만 섣불리 말하기는 아직 어려워."

떠나기 전 강유가 남긴 전음을 떠올리는 명한.

많은 것을 긍정하게 하는 말이었지만, 아직은 입 밖으로 뱉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은 이 건부터 처리해 보자고."

툭툭, 두드리는 건 강유에게서 받은 양피지.

진짜 황제진경에 숨겨져 있는 장소였다.

#

우드득.

방의 한쪽 면이 통째로 주저앉았다.

벽과 벽에 장식되어 있던 거울 등이 흔적도 없이 파괴됐다.

먼지조차 피어나지 않는 그 잔해 앞에서 한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혼천의 주인인 서복이었다.

"……경거망동을 삼가라 말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어르신."

무릎 꿇고 주저앉은 수십의 사람들.

그중 가장 앞선에 서던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청과 흑의 가면이었다.

"어째서 대업이 코앞인데 사리사욕에 휘둘린단 말이냐. 하찮은 인간의 마음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건가?"

"……청은 죽었으나 흑은 아직 살아있다고 합니다. 사람을 움직여서 그를 데려오겠습니다."

"그 녀석이 모습을 감추고자 하면 누가 찾을 수 있을까. 북해빙궁으로 움직였을 때, 막았어야 했어. 루의 늙은이가 이렇게 치사한 방법을 쓸 줄이야."

"루의? 그럼 역시 그분께서……?"

"그분이라니!"

버럭 외치는 소리에 다시금 머리를 크게 조아렸다.

서복에게 있어서는 역린과 같은 단어였다.

"왜지? 지금껏 수수방관만 하던 늙은이가 왜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 거지? 갑자기 영생에 욕심이라도 생긴 건가?"

"심장을 가져가니 다급해진 것이 아닐까요?"

"아니. 그게 그렇게 걱정됐다면 명왕도에 내버려 둘 이유가 없어. 멍청하게 죽은 백을 제외하더라도 너무 방해가 적기도 했고.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속셈이 있다 해도 어르신께서 영생을 얻으면 모두 끝날 일입니다."

마지막 말은 다른 방향에서 들려왔다.

서복의 초대를 받은 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네놈은…… 혈교의 아이구나."

"이번 대 교주를 맡고 있는 양생이라 하옵니다."

"그래. 이름이라면 건너 건너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아이들과 힘을 합쳐서 몇 가지 일을 처리했다고."

"대수로울 것도 없습니다, 어르신."

붉은색 도포 차림의 혈교 교주, 양생이었다.

큰 동작으로 서복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오체투지했다.

이마가 땅끝에 닿는 지극한 자세였다.

"예는 아는 놈이로구나. 허나, 난 너를 초대한 기억이 없다만."

"혼천의 기둥이 하나둘 무너지니, 저 같은 소인배도 이리 들어올 틈이 생겼나 봅니다."

"감히 네가 내 심기를 거스를 생각이더냐?"

"아닙니다. 제가 어찌 혼천의 주인이신 어르신의 심기를 거스르겠습니다. 다만, 혼천의 형국이 썩 좋지 않은 건 사실. 이럴 때야말로 저 같은 하찮은 인간의 쓰임이 빛을 볼 때지요."

"……계속 얘기해보라."

오체투지한 모습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또박또박했다.

서복이 호기심을 내보이며 다음을 종용했다.

"조악하나마 황제진경의 일부를 탐독하였습니다. 불사종법의 핵심은 끊이지 않는 생명력으로 천기마저 끊어내고 밖과의 영속을 맺는 것에 있지요. 그 결과 새로운 천기가 탄생하고 어르신께서 그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호오. 네가 그 조잡한 책으로 제법 많은 걸 배웠구나."

"어르신께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많은 연구를 해 봤습니다. 옛 황제의 심장이 불완전하나마 모인 이상, 다음 수순은 영속을 위한 거대한 힘. 예전 정마대전 이상의 격돌이지요."

"호오. 그렇게 생각했나?"

"아마 어르신께서는 예전 정마대전을 관조하며 세상이 크게 들썩이는 걸 느끼셨을 겁니다. 천기를 비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정마대전이 끝나고 신교가 자리를 잡고 난 뒤다.

양생은 음지에 숨어 그 흐름을 관조했기에 누구보다 이를 잘 알았다.

"네놈은 곁가지에서 태어난 것치고는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구나."

"하찮은 욕심으로 혈교를 세웠으나, 그대로 멸문당한 선조들과는 다릅니다. 저는 제 주제를 분명하게 알고 있지요.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과거의 정마대전을 뛰어넘는 참극을 재현해 보겠습니다."

"호오. 어떻게 말이냐? 숨겨 두었던 그림자들은 훼방꾼에 의해서 대부분 드러난 상태인데."

"후후. 어르신을 적대하는 자들은 어르신만큼이나 강하고 위대한 존재이지요. 허나, 그런 만큼 저같이 하찮은 자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양생이 품에서 목함을 꺼냈다.

은은하게 풍기는 향에 서복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혈고(血蠱). 네놈이 꽤 재주가 좋구나."

"어르신께 도움이 될까 하고 오랜 시간 연구한 물건입니다. 신교의 천마도 루의 인물들도 이 하찮은 벌레는 경계하지 않고 있을 테지요."

"효과는?"

"향 하나가 탈 시간 정도. 경지를 넘은 고수라면 그 시간은 더욱 짧겠지요. 허나, 그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인간을 불신하는 법. 참극을 위한 도화선으로 향 하나의 시간이면 넉넉하지요."

"향 하나가 탈 시간이라."

서복이 함을 받아 들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좋다. 네게 죽은 백의 가면을 내리겠다. 앞으로 너는 백면이 되어 혼천을 위해 움직이도록 해라."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허나, 명심해라. 새로운 세계가 열렸을 때, 그 뒤를 쫓는 영광은 실패자의 것이 아니다. 날 실망시킨 자의 결말을 잊지 마라."

"뼈와 심장에 새기겠습니다."

이마를 땅에 박는 양생 앞으로 백면이 떨어졌다.

지나치게 밝은색의 가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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