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
은휘는 생과 죽음의 경계에서 모든 걸 지켜봤다.
그는 어디까지나 관조자.
세상에 남은 미련 때문에 명한을 돕고는 있지만, 그 이상으로 개입할 생각은 없는 존재였다.
이미 세상을 두고 떠난 입장에서 산 자들의 싸움에 개입하는 건 과한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자의 위기에는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청은 어떻게 되지만 강유옥은 어렵다.
연전으로 인한 체력은 둘째 치고 그는 아직도 힘을 숨기고 있었다.
제자를 위해 세상사에 끼어들어야 하는 걸까.
고민은 찰나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됐다.
그리고 그때.
"그만."
기대하지 않던 조력자가 개입했다.
"누구냐, 넌?"
청색 두건에 반듯한 외모.
정보에 없던 인물에 강유옥이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눈앞의 인물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갈 곳 없어서 신세 지고 있는 늙은이라고 해두지."
"신세 지는 늙은이 따위가 내 감각권 내를 이렇게 파고들 수는 없어. 대체 누군데, 이 일에 끼어드는 거냐?"
"……굳이 자네에게 내 사정까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네. 서로가 할 만큼 다 한 것 같으니 이즈음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떻겠나?"
"답을 안 하겠다면 억지로 알아내는 수밖에!"
강유옥은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명한이 지쳤다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적진.
언제 다른 조력자가 개입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루의 인물은 둘째 치더라도 이곳에는 고수가 충분히 많다.
속전속결만이 그의 선택이었다.
"마음에 안개가 끼었군. 과거의 나와 닮았어."
"주제도 모르고 떠들지 마라!"
어마어마한 진각과 함께 쏘아져 나가는 강유옥.
그의 독문무공이자 강남 대협이라는 별호를 만들어준 ‘천강권(天姜拳)’이었다.
빠르기가 벼락같고 굳세기는 산과 같았다.
‘좋은 수.’ 상대하는 남자는 짧게 감탄하며 손을 교차했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힘이 태극을 이루고 강대한 천강권의 돌진을 휘감았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의 극치였다.
"크으윽! 태극권이라고!?"
담긴 이치는 극한의 것이나 수법은 저잣거리의 태극권이었다.
강유옥이 이를 악물며 다시 전진하는 진각을 밟았다.
점에서 다시 점을 더하는 이중쇄(二重碎)였다.
강권을 휘감던 태극의 부드러움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힘."
하지만 남자 또한 만만치 않았다.
몸의 중심을 낮추고 태극의 흐름을 전신으로 연결시켰다.
몸을 축으로 하늘을 양으로 땅을 음으로 받아서 거대한 흐름을 만든 것이다.
제아무리 천강권이 강해도 하늘과 땅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노도와 같던 힘은 순식간에 산들바람이 되었다.
신기와 같은 수법이었다.
"무당의 조사라도 살아서 돌아온 건가!?"
"하하. 내 하찮은 실력으로는 감히 비견할 수 없네."
"흥.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능히 천하제일에 도전할 역량이 있군. 그럼 나도 더 이상 경시하지 않도록 하겠다."
강유옥의 기세가 일변했다.
속전속결을 위해 몰아치던 기세를 거두고 무겁고 음습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밤의 그림자이며 산의 그늘이며 태양 뒤의 달이었다.
재단되지 않은 음유지기가 태극을 파고들어서 그 균형을 무너뜨렸다.
상대 남자는 황급히 힘을 풀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대체……"
"신기라 불리는 것들의 이면이다."
강유옥의 전신이 검게 물들었다.
산 자가 내뿜을 수 없는 사기(死氣)가 뱀처럼 그를 칭칭 감고 있었다.
남자의 눈이 처음으로 크게 뜨이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수없이 많은 무공을 섭렵하고 경험한 그이지만, 눈앞의 것은 처음이었다.
상리를 벗어난 이치에 맞지 않는 힘이었다.
"자네는 대체 어디까지 떨어질 셈인가."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걸 위해서라면 지옥도 두렵지 않아. 세상 모두가 날 등지고 떠나도 오직 그 하나만 얻을 수 있다면 족하다."
"……지독한 집착이군. 광기야. 허나,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네."
남자가 짧게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려놓았다.
눈앞의 강유옥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수법으로는 무리였다.
목숨을 내어놓는 한이 있어도 결코, 드러내지 않던 진신절기만이 유일한 답이었다.
"손자를 죽게 할 수는 없지."
순간.
웅크렸던 기운이 미칠 듯이 폭증하며 주변을 휘감았다.
그것은 순수한 폭력.
오로지 파괴하고 죽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순수한 폭력의 기운이었다.
강유옥이 잠시 놀란 듯 바라보다 그제야 납득한 듯 중얼거렸다.
"천하제일악, 화무천."
한때, 천마라 불리던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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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의 수장은 대대로 천마라는 이름을 물려받는다.
그들은 선대로부터 이어지는 천마신공을 자신에게 맞게 개량하여 발전.
이를 후대로 전하는 소임도 맡고 있다.
하지만 화무천의 세대에서 이 소임의 맥은 끊긴다.
그는 자신의 무공 ‘극천일무기’가 지나치게 파괴적이라는 판단하에 이를 천마신공에 포함하는 걸 거부했다.
마지막 사용자가 되어 사멸시키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이 생각은 명한을 만나며 바뀌기는 했으나 한 가지는 여전했다.
"내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열 합뿐이다. 그 안에 승부를 내지 못하면 도망쳐라."
진정한 의미로의 극천일무기는 화무천 자신만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
명한의 것은 결국 통제와 제어 속에서 다듬어진 극천일무기였다.
완전한 폭력.
극악의 무공은 여전히 화무천만이 지니고 있었다.
"기대되는군. 당대의 신교에서도 금지한 극악의 무공 극천일무기와 자웅을 겨루게 되다니."
"그렇게 영광처럼 말할 무공도 아니네. 어찌 됐든 피로 점철된 무공이니까."
"어차피 신공이라는 것은 그만큼의 대가를 바쳐야 탄생하는 법. 일월교의 신기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피와 죽음 속에서 실낱같은 가능성을 뽑아 올린 결과였지. 이면에서 태어난 내 팔명경(八命境)도 같다."
"팔명경이라."
극도로 비틀린 기운이었다.
다른 일월교의 신기들이 자연지기의 독특한 발현을 기반으로 둔다면 팔명경은 반대였다.
자연지기를 부정하는 이질적인 기운의 총합이었다.
‘팔명이라는 건 일곱 신기 너머의 것을 지칭하겠군.’
쉬이 볼 대상은 아니었다.
"그럼 어느 쪽의 어둠이 더 깊은지 지켜보자……고!"
선공은 강유옥의 것이었다.
공간을 뛰어넘는 듯 모습이 사라지더니 화무천 앞에 나타났다.
양손에 감긴 기운은 공간을 찢고 주변 기운을 집어삼켰다.
어둠에서 암약하는 거대한 포식자와 같은 모습.
끼기기긱.
이에 화무천은 한 걸음으로 대응했다.
그의 걸음을 따라서 표현이 불가능한 기운의 범람이 일어났다.
이건 정형화된 기운을 모두 갈가리 찢어버리고 자신의 색으로 더럽혔다.
화기도 수기도 음과 양의 균형도 마찬가지였다.
찢고 부수고 파괴하는 힘의 정수만이 그곳에 있었다.
"하―!"
강유옥은 이 힘을 접하는 것과 동시에 알아차렸다.
천마신공의 발전에 근간이 된 건 모순되게도 가장 큰 적인 일월교의 무공이었다.
초대 천마의 반란부터 신교는 일월교를 모두 부정했지만, 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극천일무기는 이치적으로 팔명경과 같았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근간을 초월하기 위한 발버둥.
먹고 부수고 찢고 파괴하는……
인간의 처절함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싸워볼 만한 힘이군!"
주먹과 주먹이 맞닿았다.
극단적인 감정과 기운이 접점에서 불똥처럼 튀었다.
잘 짜인 그물 너머로 바늘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광경이었다.
부분적이나 이 둘은 ‘외경’에 닿아 있었다.
충돌이 그 힘을 증폭하여 세상의 벽 너머로 이어졌다.
주변 공간이 무너지고 시각, 청각, 촉각, 후각 같은 기본적인 법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밝은 것을 밝게 보지 못하고 흙을 손으로 만지지 못하고 피부 위의 옷감에서 무엇도 느끼지 못했다.
어긋남이 그 안의 모든 것을 부정했다.
"굉장하군! 이게 밖의 힘인가! 인간을 초월한 경지란 말인가!"
강유옥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와 화무천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세계의 광경은 그야말로 초월적이었다.
모든 법칙에서 자유롭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부활’도 가능한 세계.
"그게 바람인가? 그렇다면 부정한다."
"……!? 화무천!"
순간, 화무천의 힘이 줄어들고 ‘밖’의 경치 역시 빠르게 흩어졌다.
모든 것 위에 선 듯한 감각도 마찬가지.
힘의 충돌이 없으면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세계의 그물이 다시금 촘촘하게 조여왔다.
"뭐 하는 거냐, 화무천!! 전력을 다해라!"
강유옥은 발악했다.
잠깐이나마 꿈꾸던 경지의 일면을 봤다.
그 안이라면 모든 걸 이룰 수 있었다.
아내의 부활도 망가진 가족의 수복도.
"그것이 내 전력이다. 열 합. 거둘 수 있는 것이 내 능력이지."
"……뭐?"
"눈을 떠라."
화무천이 손을 크게 휘둘렀다.
바람이 불어와 주변의 먼지를 걷어내고 이질적인 광경을 드러냈다.
그건 수십 장 반경의 규모로 뭉개진 땅과 끝도 없이 이어지는 파괴의 흔적.
당황으로 얼룩진 수십의 사람들.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저택의 단면이었다.
"한 합만 더 이어졌어도 모두가 죽었다. 네 아들도 마찬가지다, 강유옥."
"……!"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네 바람이 그런 거라면 나는 결코 어울려 줄 수 없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잃고 싶지 않다."
투둑. 툭.
파편이 부서져 땅으로 떨어졌다.
그 작은 울림에 강유옥이 흠칫 놀라며 물러났다.
그는 이런 파괴의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것이 가능한 ‘밖’에 취했을 뿐이다.
화무천의 말대로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갔더라면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하나뿐인 아들조차 죽일뻔했다.
"나도 과거에는 너와 같았다, 강유옥. 내가 잃은 것에만 목매어 주변을 볼 수 없었지. 하지만 고개를 들어 주변을 봐라. 네게는 아직 잃을 것이 남아 있다."
"……"
복잡한 시선으로 물들어 있는 강유를 발견했다.
다 버리고 포기했다 생각했는데, 그를 죽일뻔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등줄기가 서늘했다.
아직 잃을 게 남아 있다는 말이 피부로 다가왔다.
― 아. 아아아. 아……옥아(玉兒).
"!!"
흠칫, 놀라며 돌아보는 강유옥.
눈으로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바로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벽을 넘은 여파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 무언가가 자신의 아내임은 한 번에 알아봤다.
― 아. 아흐흐흑. 흐흑. 옥아. 옥아. 흐흐흑. 흑.
옥(玉). 강유의 아명인 강옥이었다.
아주 어린 나이, 겨우 젖이나 뗐을까 싶었을 때 아내는 아들을 두고 떠났다.
자신이 아내를 떠나보내고 느낀 슬픔 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큰 슬픔을 아내는 느꼈을 것이다.
핏덩이를 두고 떠난 슬픔, 안타까움, 괴로움.
그 당연함을 왜 모르고 있었을까?
― 아. 아아아. 아……
"가,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아니, 모르고 있던 게 아니다.
외면했을 뿐이다.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슬픔과 괴로움에 빠져서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 고개를 돌렸다.
이 얼마나 비겁하고 한심한 모습이란 말인가.
"흐느껴 우는 건 이제 충분하지 않더냐."
"으아아아아!!!"
흐릿함마저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아내.
강유옥이 주저앉아 절규했다.
어쩌면 일찍이 해야 했을 그런 절규였다.
"무상(無想)이로고."
은휘의 혼잣말이 그 위로 씁쓸하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