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235)

흐느낌 위에서

강유옥이 주먹을 늘어뜨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핏물이 경사를 흐르다 한 곳에서 멈췄다.

점점이 이어진 흔적은 마치 걸어온 발자국 같았다.

숨으로 고통이 전해졌다.

"그래, 자식놈을 초주검 만들어 놓으니 좋더냐?"

불쑥 다가와서 말을 거는 한 사람.

기억 속에 남은 건 은휘라는 이름이었다.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관여하지 마라."

"쯧쯧. 그리 문드러진 마음으로 뭘 찾겠다고. 네 죽은 처가 돌아온다고 이 모습에 기뻐할까?"

"닥쳐!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음대로 지껄이지 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손으로 튀어나갔다.

벽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다.

하지만 안개 같은 은휘는 그저 옆에 서 있었을 뿐이다.

"네 마음의 지극함은 대체 무엇을 위함이더냐. 잃은 자의 공허함인가, 아니면 못다 한 자의 후회인가. 그리 문드러진 마음으로는 무엇을 바라도 남기지 못한다."

"……시끄러워. 남기지 못했으면 다시 찾아오면 된다. 죽었으면 되살리면 된다. 이 세상에 만회하지 못할 건 없어.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고."

"그리하여 망가진 네 아들은 어찌 되돌릴 셈이지?"

"닥치라고! 그녀만 돌아온다면 저 못난 놈도 이해할 거다. 되살리기만 하면 돼. 그리하면 모든 일이 해결될 거야."

"나약하구나."

은휘는 혀를 차며 강유옥의 옆을 스쳐 갔다.

"죽은 자는 그저 죽은 자일 뿐이다. 생과 사의 교차는 만물의 순환. 이를 거슬러 천기를 어지럽히는 건 용기도 도전도 아니다. 그저 알량한 네 마음에 대한 변명일 뿐. 스스로도 그걸 알면서 끝내 놓지 못하는 건 네 나약함의 발로구나."

"죽지 못한 망령 주제에 대체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알다마다."

훌쩍 뛰어 연기처럼 사라지는 은휘.

"네 아내의 흐느낌이 하루도 멈출 날이 없으니."

그의 마지막 말이 파편처럼 강유옥의 가슴에 박혔다.

#

만약을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서불의 예비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예전 혈염마녀나 천년호보다 더욱 강하게 비틀려 있었다.

황제의 피를 통한 연구로 만든 가짜 불로불사.

단순한 ‘생명’ 자체에 집착하여 만든 괴물이었다.

"하하하하! 할 수 있다면 해 보라고!"

"……"

수 명의 가짜 서불들이 명한에게 달려들었다.

양팔의 사마귀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갈려서 땅을 찍고 뒷다리는 말의 그것처럼 강했다.

굉음과 함께 거리를 좁혀서는 입을 벌렸다.

빼곡하게 차 있는 송곳니들은 식인어보다 흉물스러웠다.

펑―!

근접한 가짜 서불의 몸통을 후려치는 명한.

놈은 바닥을 쭉 미끄러져 벽에 닿자, 몸을 거꾸로 뒤집어서는 역관절로 달려왔다.

이미 인간이 아니기에 상식적인 움직임은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근처의 다른 놈을 발로 걷어내자, 방해된다는 듯 그 몸을 앞발로 찢었다.

쏟아지는 핏물 사이로 이어지는 최단거리의 공격.

망설임도 없고 잔인함의 척도도 없었다.

그저 뇌리에 박힌 명령만을 따르는 인형이었다.

"불쌍한가!? 안쓰러운가!? 어차피 이것들은 어르신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소백! 네 알량한 머리로는 이해를 할 수 없겠지! 안 그런가!?"

"역겨운 새끼. 고작 그걸 위해 이렇게 많은 이들을 희생시켰다는 거냐?"

"고작? 그러니 네가 안 되는 거다. 아니, 너만이 아니지. 루의 머저리들. 신교의 광신도들. 모두가 부족해! 모두가 이해를 못 한다고! 이 세상 자체는 모자란 규격에 구속된 망가진 곳이야! 이걸 바로잡기 위해서는 불로불사의 선각자가 필요하다! 바로 어르신이!"

"살기 위해 어린아이조차 이용하는 늙은이 따위가 선각자가 될 것 같나?"

"큭큭.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일 뿐이다."

"그 작은 희생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도 있다."

전력으로 튀어나가는 명한.

앞을 가짜 서불이 막아섰지만, 그대로 힘으로 뚫었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비처럼 내렸지만, 그조차 감내했다.

이건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남겨진 영혼을 짜깁기하여 기워둔 가죽일 뿐이다.

각오는 불처럼 뜨거웠고 얄팍한 수법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명한의 주먹이 청의 앞에서 충돌했다.

끼기기긱.

강한 충돌에 주변 공간이 비틀렸다.

각자의 내공에서 시작된 간섭력이 자연지기를 뒤튼 것이다.

현경과 현경의 충돌이 빚어내는 순수한 힘의 격돌.

얼마나 큰 힘인가, 얼마나 강하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 얼마나 정밀하게 다루는가.

한 점에서 시작한 충격이 주변을 휩쓸었다.

"큭. 크으으윽!"

"도망칠 곳은 없다, 청!"

"빌어먹을! 같이 죽자는 거냐!"

"각오란 그런 거다!"

절대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은 내공 싸움을 하지 않는다.

한번 시작하면 어느 한쪽이 파멸할 때까지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크으으으! 웃기지 마! 내가 너 따위와 함께 죽을 것 같나!?"

순간, 충격에 밀려나 있던 가짜 서불들이 다시 움직였다.

현경과 현경 싸움에 끼어들 어리석은 무인은 없겠지만, 이들은 그런 판단이 없다.

강한 자연지기의 폭풍에 몸이 조각조각 나면서도 명한에게 다가갔다.

아주 작은 틈.

균형을 비틀 수 있는 힘이면 충분했다.

"큭큭큭. 어리석은 도전에 대한 최후다, 소백!"

청은 웃었다.

가짜 서불은 황제의 피와 술법으로 배양한 짐승과 같은 존재.

싸우라면 싸우고 죽으라면 죽는 그런 존재일 뿐이다.

명한을 잡고 늘어지면 이 균형의 승리자는 자신이었다.

그 생각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 마! 착한 소백 괴롭히지 마!"

"……어?"

하지만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한 사람의 방해를 받았다.

언제나 겁에 질린 얼굴로 웅크려 있기만 하던 서불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깔끔한 옷으로 더없이 제대로 된 발음으로 외치고 있다.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괴롭히지 마!"

문제는 이게 먹힌다는 것.

진짜 서불의 등장에 가짜 서불들이 동작을 멈췄다.

분명 이성도 없고 영혼마저 뭉개진 가짜들인데 반응했다.

있을 수 없는 일.

청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일말의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나쁜 건 저 사람이야!"

그래, 이런 일.

서불의 손짓에 가짜 서불들이 일제히 청을 바라봤다.

텅 빈 눈동자에 당황 섞인 청 자신의 모습이 박혀 있었다.

이건 불가능하다.

제대로 된 혼백을 갖추지 못한 존재가 무언가를 판단할 수는 없었다.

이미 영혼은 갈가리 찢겨 구색마저 갖추지 못했으니까.

헌데 왜.

"으……"

"으으으."

"으으……"

소백이 아니라 이쪽으로 오는 걸까.

청의 얼굴이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섞여서 일그러졌다.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꺼져! 너희가 노릴 건 저기 저 소백이라고!"

"으으으! 아니야! 아니야!! 나쁜 건 너야! 네가 나빠! 날 괴롭히고, 우리를 괴롭히고! 매일같이 나쁜 짓 하는 네가 나쁜 거야!"

"이이! 감히 하찮은 도구 따위가!"

"나는 도구가 아니야!"

토하듯 쏟아낸 외침에 가짜 서불들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이들은 이미 하나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오래전에 깨지고 부서져 파편조차 안 남은 영혼의 단말이라도 그 본질은 이해했다.

고통이 무엇인지.

고통을 주는 자가 누구인지.

"네놈들이 감히……!!!"

바닥을 기고 벽을 탄 채 청에게 달라붙었다.

내공의 충돌로 만들어진 기의 폭풍이 그들의 몸을 갈가리 찢고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송곳니를 목덜미에 박고 손톱으로 옆구리를 찌르고, 어금니로 귀를 물었다.

달라붙고 달라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감히 네놈들 따위가!!! 그아아아!!"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내공의 폭풍이 그를 휩쓰는 순간까지.

그들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를 다했다.

#

힘이 풀린 명한이 주저앉았다.

그의 손아귀에는 뿌연 가루가 한가득이었다.

조금 전까지 손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던 청의 잔해였다.

가짜 서불들의 공격으로 힘을 잃은 그는 내공의 폭풍에 휩쓸려서 죽었다.

아무리 강해도 이건 견딜 재간이 없다.

그 잔해를 명한이 물끄러미 봤다.

"……"

까딱 잘못했으면 자신이 되었을지도 모를 흔적.

"소백. 소백. 괜찮은 거냐?"

이건 과한 모험이었다.

청과의 싸움에 확률을 논한 계획은 준비하지 않았다.

그를 홀로 꾀어낸 것도 직접 맞상대를 한 것도 기본은 분노를 기반으로 한다.

어수룩할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뛰어든 건 본질적인 불쾌감 때문이다.

"괜찮아. 많이 놀랐지?"

"으응. 난 괜찮아. 소백 도왔어. 나쁜 사람…… 겁먹지 않았어."

"그래. 용기 내줘서 고마워."

옛 황제.

그러니까 신이 어떤 마음으로 불로불사를 탐했는지는 모른다.

평범한 황제처럼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남은 건 그 흔적을 쫓는 탐욕과 광기일 뿐이다.

사람은 그렇게 도구처럼 이용되어도 좋을 존재가 아니다.

약한 인간, 못난 인간, 부족한 인간.

수많은 인간이 있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존재 가치를 증명한다.

그걸 위대한 인간의 불로불사라는 이유로 쓰고 버릴 도구처럼 대하는 건 도무지 용서되지 않는다.

만약 이들의 이치가 합당하다면 과거의 명한조차 마찬가지가 되니까.

"내 글이 재미없다고 나라는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어."

"소백, 아파?"

"아니. 그냥 옛날이야기. 다시 위로 올라가자. 이 소란이면 대회는 중단됐을 것 같긴 하지만……"

"아니, 소란은 전해지지 않았다."

"!!"

스며드는 목소리.

명한이 깜짝 놀라 몸을 움직이려다 통증에 주저앉았다.

청과의 싸움은 적지 않은 피해를 남겼다.

"너는 몇 번이고 나를 놀라게 하는군. 설마, 청을 이길 정도로 실력이 늘었을 줄이야."

"강유옥. 강유는 어쩌고 여기를 온 거지?"

"부자지간의 대화는 충분했다. 네 얄팍한 속임수에 당한 대가라고 해 두지."

"부자간의 정 같은 건 남지 않은 거 같군."

"정에 휘둘리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 내게 남은 건 이제 하나뿐이야. 그러니 답해라, 소백. 심장은 어디에 있지?"

눈앞에 서불이 있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심장.

나머지는 아니었다.

"심장 타령을 하기 전에 주변을 봐라. 이걸 보고도 깨닫는 바가 없는 거냐?"

부서진 가짜 서불들.

피와 육편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완전한 불로불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렇게 태어나는 건 결국 인간도 되지 못하는 괴물일 뿐이야. 너는 네가 사랑했던 여자를 그런 괴물로 만들고 싶은 거냐?"

"……헛소리. 옛 황제는 불완전하나 불로불사를 이룩했다. 술법을 재정비한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불로불사를 완성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 아내를 되살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렇게 되살아난 아내가 정말로 네가 아는 존재일까?"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인간을 구성하는 건 육체만이 아니다. 혼과 백이 존재하지. 잘난 수법으로 죽은 아내의 육체를 되살려도 혼과 백이 없는 이상 그건 그냥 인형에 불과해."

"그걸 위해 귀혼령이 존재한다. 당장은 필요가 없어 네게 맡겨 두었을 뿐. 때가 되면 그것도 회수하면 그만이다."

"어리석은 인간. 기물로 혼을 불러와도 백이 없으면 결국 그건 덩어리에 불과해. 조금 전에 만났던 가짜들과 마찬가지라고."

혼이 에너지라면 백은 일종의 정보다.

이 둘이 합쳐서 혼백이 되며, 인간의 존재를 정의한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리고 한 번 죽은 인간의 백은 빠르게 소모된다.

설사 이 땅에 그 혼이 남아있다고 해도, 희미한 잔류사념 이상은 건지지 못한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다.

"헛소리하지 마!!"

강유옥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스치듯 만난 은휘의 한마디가 아직도 심장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여전히 흐느껴 울고 있다는 이야기.

"헛소리하지 말라고…… 이제 와서 물러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

이젠 이것밖에는 남지 않았다.

주먹에 내공을 집중하며 명한을 향해 윽박질렀다.

"황제의 심장을 내놔. 아니라면 너도 이곳에서 죽이겠다."

이게 남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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