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8/235)

용서할 수 없는 것

명한의 손이 연검의 면을 때렸다.

파르르 떨리는 진동과 함께 검이 뱀처럼 휘어서 감겨 들어왔다.

황급히 손을 빼 날을 밀어냈으나 이미 소매가 베였다.

피 대신 잘린 옷자락이 날렸다.

‘얕군.’ 희미하게 웃는 청이 연검을 연거푸 휘둘렀다.

낭창하게 휘는 검은 종잡을 수 없는 변화를 담고 있었다.

"감히 네깟 놈 혼자서 날 잡겠다고? 주제를 알아라."

"일전에 도망친 놈이 누구더라?"

"흥. 네놈 따위가 외경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리가 없다."

검은 앞섬을 베고 머리카락을 잘랐다.

연검의 변화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해서 규칙을 찾기 어려웠다.

망아(忘我)의 경지로 반야신공의 반격을 최고치로 끌어올려도 반응이 쉽지 않았다.

‘끝없이 변화하여 그 변화가 보이지 않는 경지.’

만변이 무변에 달한 공격이었다.

어떤 규칙도 형태도 없기에 반야의 눈으로도 대응이 되지 않았다.

"네놈이 태어나기 전부터 무림을 종횡했던 몸이다. 핏덩이 따위가 얄팍한 힘 하나를 얻었다고 기고만장하는 꼴이 우습군."

"그 잘난 분께서 어쩌다가 애 보기로 전락을 하셨는지?"

"큭큭. 얄팍한 도발이군. 어르신을 위한 내 일에 자부심이 있다. 세상 모르는 순백의 것들을 내 입맛대로 쥐락펴락하는 재미도 있고."

"……네놈은 정말로 악질이로군."

"세상에 정과 악 따위는 없다. 승자와 패자가 있을 뿐이지."

연검이 불가능한 방향으로 휘며 명한의 어깨를 스쳤다.

이번에는 옷자락이 아닌 몸이었다.

피부가 찢기고 피가 튀었다.

아릿한 고통과 함께 머리가 핑, 돌았다.

"독?"

"큭큭. 독이 아니다. 네놈 같은 고수를 상대하기 위한 물건이지."

청을 보조하던 무인들이 쓰던 약품.

성질은 조금 다르지만, 효과는 비슷했다.

감각을 살짝 어지럽혀서 내기와 외기의 동조를 어렵게 만들었다.

절정의 싸움에서는 이 미세한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법.

치명적인 수였다.

‘……같은 수에 두 번 당할 수는 없지.’

하지만 이미 한 번 겪었던 수법.

당한 걸 똑같이 또 당하면 그건 안일함이다.

화악―!

몸에서 강렬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칠채향이 즉각 반응하여 몸의 독기를 정화했다.

그 과정에서 어긋난 감각도 바로 잡혔다.

독이 아니기에 그 성분을 독으로 태우고 독은 칠채향으로 제거했다.

무식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큭!"

살짝 방심한 청의 거리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연검이 뱀처럼 휘어 몸을 휘감았지만, 절정의 싸움에서는 한 박자 차이가 크다.

땅을 밟고 힘을 뽑아서 그대로 쳤다.

주먹을 휘감은 연검을 뿌리치고 강기의 막도 찢었다.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청의 몸이 붕 떠서 오 장 너머로 처박혔다.

"건방진 놈."

징징 울리는 손.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먹힌다는 증거였다.

‘외경을 다루기 위해서는 뿌리가 깊어야 한다고 했어.’

그 뿌리라는 건 결국 가진 바 능력의 숙달.

더욱 깊이, 더욱 무겁게 체득하는 것이 답이었다.

"계속해보자고."

청은 반수 위의 상대.

목숨이 오가는 싸움에서는 아득한 차이지만, 그만큼 배움은 깊다.

단순한 단련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이 이 싸움 안에 있다.

‘최대한 뽑아낸다.’

청이 안다면 기가 막혀서 죽을 일이지만……

이 싸움 역시 명한에게는 기연일 뿐이었다.

#

명한이 청과 각축을 벌이고 있을 무렵.

강유 역시 강유옥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니, 의미나 치열함을 따지자면 이쪽이 더 사투에 가까웠다.

"……역시 쉽지 않은 건가."

이를 지켜보는 건 다름 아닌 구문자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굉장히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일은 그가 계획한 판이 아니었다.

명한에게 접촉한 것도 강유옥을 끌어들인 것도 전부 강유의 독단이었다.

"돕지 않는 건가?"

"누구냐!"

순간, 낯선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은형술을 펼치고 있던 터라 그 놀람이 배였다.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개구리처럼 놀라기는. 남의 집에 스며들어왔으면 와서 인사부터 하는 것이 예의 아니더냐?"

"으, 은휘?"

은은한 빛으로 몸을 두르고 있는 은휘였다.

귀문을 벗어나기를 꺼리는 그이지만, 이번엔 특별히 움직였다.

"쯧쯧. 이리 정신머리가 없어서야."

"큭. 당신이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아니, 그 전에 내 은형술은 어떻게 파훼한 거냐?"

"은형술? 아, 그 허술한 술법 말인가? 그런 거로 몸을 가리려고 하다니. 얄팍하기 짝이 없군. 그 환상루인가 뭔가 하는 곳에서는 그런 잡기만 가르치는 거냐?"

"허튼소리. 내 술법은 루에서도 상위……"

북.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구문자를 둘러싼 막이 사라졌다.

은휘의 가벼운 손짓 하나에.

구문자가 입만 벙긋거렸다.

"어, 어떻게?"

"이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 그런 잡술은 우습다. 어른 앞에서 건방 떨지 말고 와서 앉아라."

"……"

"네깟 놈을 죽일 거였다면 진즉 죽였다. 굳이 필요도 없거니와 그 정도의 의욕은 없어."

툭툭 치는 손길에 구문자가 포기하고 앉았다.

다시 은형술로 몸을 가리지만, 전처럼 개운하지는 않았다.

‘대체 무슨 수로 파훼한 거지?’

여전히 이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네놈은 저 어린놈을 따르는 것 아니었나? 왜 보고만 있지?"

"……어찌 됐든 도련님의 일. 수하가 마음대로 끼어들 상황은 아니다."

"그래? 그렇게 두고 보기만 하다가는 죽을 텐데?"

은휘의 눈에는 너무 뚜렷하게 보였다.

강유는 분명 또래보다 강하고 신기라는 특별한 힘도 있다.

하지만 상대인 강유옥은 그 선 너머에 존재했다.

객관적인 비교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아직 드러내지 않은 힘까지 고려하면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건 도련님의 선택이다. 내가 처음 도련님을 만났을 때부터 이미……"

"그래, 그거."

"뭐?"

"네가 저 어린놈을 만났던 순간부터."

은휘가 손가락으로 구문자 앞을 쿡 찔렀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물결 모양으로 번졌다.

"왜곡된 천기의 파편. 네 스승이라는 자는 이렇게 교활하구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별거 아니다. 여기서 한마디를 덧붙이면 이곳이 피바다가 될 것 같으니 숨은 골라야지. 어른이 아이 싸움에 함부로 끼어들고 그러는 게 아니다."

"대체……"

무슨, 이라고 말하려는 찰나.

강유가 큰 공격을 맞고 벽으로 처박혔다.

신기의 힘을 극성으로 뽑아내고 있지만, 강유옥의 상대는 아니었다.

"쯧쯧. 이러다가 네 주인이 죽겠구나."

"빌어먹을! 이런 곳에서 죽어도 좋을 사람이 아니야!"

"그야 네 선택에 달린 일이지. 아직도 네 주인의 선택이라면 목숨을 걸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느냐?"

"그야 당…… 응?"

구문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원칙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것이 존재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아비가 아들을 죽이고, 신하는 주인을 지켜만 본다라. 꽤 극적인 걸 좋아하는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비트는 거다. 세상의 인과를. 천기의 흐름을. 그렇게 해서 존재하지 않는 틈을 만드는 거지. 판을 만들고 말을 만들고 참으로 재미도 있겠군."

"넌 대체……"

"머리 굴릴 시간은 없을 텐데?"

은휘의 손이 강유 쪽을 가리켰다.

강유옥의 추가 공격이 그를 노리고 있었다.

"칫."

말 그대로, 시간은 없다.

구문자가 품에서 붓을 꺼내 ‘은(隱)’ 자를 새겼다.

순간의 반짝임 사이로 한 사람의 모습이 지워졌다.

"도련님. 도련님!"

정신을 잃고 쓰러진 강유였다.

#

명한이 달아오른 숨을 토해냈다.

손끝이 저리고 전신은 피로로 무거웠다.

못해도 삼일 낮 밤은 싸운 기분.

그만큼 청과의 싸움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는 의미다.

"……건방진 애송이가."

하지만 시작과 지금을 비교하면 차이는 좁혔다.

청의 연검은 분명 위력적이지만,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을 익숙해지고 따라잡지 못할 간격을 따라잡았다.

청의 놀란 얼굴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무슨 수를 쓴 거냐. 평생에 걸쳐서 연마한 검이다. 네놈이 따라잡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야!"

"멀리서 보면 다른 풍경이 보인다고 하더군."

"뭐?"

"외경의 힘을 다룬다는 건 세상을 밖에서 관조한다는 의미. 무변은 규칙과 형태를 지니지 않지만, 멀리서 보면 결국 획의 연속."

혼돈 속에 규칙이 있는 셈이다.

명한은 희미하게나마 이것을 잡아내고 있었다.

"……역시 네놈은 어떻게 해서든 죽여야겠다. 살려 두기에는 너무 위험해."

"그런 말을 하기에는 상황이 여유롭지 않은 거 같은데?"

"아니. 내가 서불을 관리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

답과 함께 청의 오른쪽 팔이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몸의 몇 배로 변하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어르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다."

"……이게 무슨 개짓거리냐."

끓어오르는 살점들은 이내 어린아이의 형태를 갖췄다.

그 하나하나가 전부 서불과 닮아 있었다.

상상 이상의 기괴함은 둘째 치더라도 그 수법의 잔인함이 지나쳤다.

서불과 닮은 눈앞의 아이들은 말 그대로 예비용이었다.

"어르신은 하늘에 도전하여 천기를 무너뜨렸다. 불로불사의 위업이 이제 코앞에 당도해 있단 말이다. 고작 너 같은 애송이 따위에게 방해를 받을 수는 없어."

"미친 새끼. 그까짓 불로불사가 뭐라고 생명을 이렇게 다루는 거냐!"

"어차피 널리고 널린 게 생명이야. 위대함을 위해서 몇 놈 죽는다고 대수로울 건 없다고. 어르신의 피를 이어 위대함의 초석이 된다면 이 아이들도 영광으로 여기겠지."

"제정신이 아니야."

불로불사에 대한 탐욕은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가 있으니까.

하지만 모든 수단이 그 목적을 위해서 정당화된다면 그 삶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일까.

마침표 없는 글에 의미란 없다.

"하하하하. 어차피 인간의 탈을 벗어나려면 그깟 도덕 양심 따위는 버려야 옳다! 어르신께서 추구하는 영생의 삶에 하찮은 인간의 굴레 따위는 없어! 우리는 우리를 옭아매는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겠다!"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 한다는 짓이 아이들의 목숨을 도구처럼 쓰는 거냐? 얼마나 하찮은 삶이기에 티끌만큼의 마음조차 버리는 거지? 그딴 삶에 영광 따위는 없어! 다 버리고 영생을 산다고 대체 무엇이 남는다는 거냐!?"

"너 같은 필부는 알 수 없다. 천기마저 밟고 서는 위대함을. 가장 원대한 포부를."

바닥에서 일어난 아이들이 초점 없는 눈으로 명한을 바라봤다.

소리 없는 비명이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혼의 형태로 빚은 껍데기들.

존재를 유지해야 할 백은 사라지고 이미 그 자체가 도구로 전락했다.

이 아이들에게 있어서 되돌아갈 곳은 없었다.

"네놈은 도무지 용서가 안 된다."

남은 안식이라면 완전한 소멸뿐.

이 서글픈 존재들을 위해서 명한이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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