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 (166/235)

누가 낚시꾼인가

와드득.

청의 손아귀에서 가면이 부서졌다.

바닥으로 집어 던지자 형편없는 소리와 함께 그 형태마저 완전히 잃었다.

성난 청의 얼굴을 가릴 가면은 더 이상 없었다.

"……빌어먹을."

악다문 잇새로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청은 혼천 내에서도 제법 특수한 위치.

적이 외부 활동을 주요 업무로 맡는다면 그는 안의 임무를 전담했다.

우리에 갇힌 서불 등을 제어하는 것도 하나.

이번의 실패는 그의 자존심을 금 가게 하기에 충분했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

"……흑."

달갑지 않은 손님.

흑색 가면의 강유옥의 방문에 청의 눈가가 더욱 일그러졌다.

혼천의 모든 가면은 동료라기보다는 경쟁상대에 가까운 관계였다.

실패 후에 찾아온 강유옥은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인상 쓸 필요는 없어. 널 조롱하기 위해서 온 건 아니니까."

"위대한 황제의 심장을 회수해온 흑께서 아량을 베푸는 건가?"

"비꼰다고 자존심이 회복되는 건 아닐 텐데, 청?"

"……쯧."

냉정한 반응에 청이 혀를 찼다.

"네게 한 가지 제안이 있어서 왔다."

"제안? 혼천의 제일가는 기둥이 내게 바라는 거라도 있나?"

"들어보면 네게도 나쁜 일은 아닐 거다."

강유옥은 구겨진 종이 하나를 건넸다.

저잣거리에 붙여놓는 방의 일종이었다.

그 위로 휘갈겨 적은 건 ‘무림대회’라는 글자 넉 자.

청의 시선이 종이를 떠나 강유옥으로 이어졌다.

"어르신께서 관여하지 말라고 명하셨을 텐데?"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반드시 개입해야 할 이유가 있어."

"미친 건가? 어르신께 반항하면 어떤 결과가 찾아오는지 알 텐데?"

"어르신께서 걱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루의 개입. 이를 피해서 일을 강행하면 결과로써 행동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무슨 수로?"

강유옥이 다시금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기름을 잔뜩 먹인 일종의 가죽이었다.

"인피면구(人皮面具)?"

"흑뇌의 물건이다. 오래 쓸 수는 없지만, 루의 인간들이라도 잠깐은 피할 수 있겠지."

"전설적인 장인까지 찾아서 물건을 만들어 올 정도라면 보통 각오는 아닌가 본데. 뭘 어쩌자는 거지?"

"간단해. 무림대회에 참가해서 소명회 놈들을 꺾고 상품을 가져온다."

"뭐? 무슨 헛소리야."

"상품에 황제의 심장 파편이 걸려 있다. 분명 우리를 꾀어내기 위한 수단이겠지. 원한다면 걸려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그래서 무대 위에 올라가서 놈들과 싸우자고? 제정신인가?"

서복의 명령은 개입하지 말라는 것.

대전에 참여하여 공개적으로 싸우는 건 대놓고 명령을 어기는 경우였다.

"나 혼자라면 무리겠지만, 우리 둘이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전력을 감추고 올라갈 수 있다. 마지막 순간이라면 본신의 힘을 써도 개입할 수 없겠지. 어찌 됐든 이목을 신경 쓰는 놈들이니까."

"하. 설사 그렇게 일이 풀린다고 해도 그 뒤는 어쩔 거냐? 상품을 넙죽 타서 조용히 돌아오겠다고? 그걸 놈들이 그냥 둘까?"

"퇴로는 내가 마련하지. 그사이에 너는 서불을 데려와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난 목숨과 바꿔서라도 이뤄야 할 일이 있다. 네가 없더라도 이번 일은 강행하겠지. 하지만 네가 있다면 승산은 몇 배가 될 터. 손아귀에서 빼앗긴 보물이 대수롭지 않다면 무시해도 좋다."

"너……"

슬쩍 긁는 자존심에 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명을 어긴 죄는 황제의 심장과 서불로 용서받을 수 있다. 이대로 가면이나 부수며 패배자로 만족할 건가, 청?"

"……젠장."

이를 갈며 강유옥을 노려봤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부서진 가면을 한 번 흘겨본 뒤, 억눌린 목소리로 답했다.

"실패하면 네놈을 내가 죽이겠다."

"원하는 대로 해주지."

선택지는 하나였다.

#

상황이 어떻든 정해진 일은 진행해야 했다.

지금 명한 쪽에서는 무림대전이 그랬다.

이걸 깔끔하게 진행하지 못하면 결국 허울뿐인 집단으로 낙인찍히고 만다.

신교나 무림맹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실패할 수 없었다.

"팽가에서 온 팽만호라고 하오."

"하북 팽가의 호랑이가 오셨군요. 누구와 싸워보겠소?"

"힘에는 자신 있소이다. 그쪽 뒤의 큰 언월도를 쥔 분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한번 겨뤄보고 싶소."

"본 회의 호법이십니다."

"군 모요."

명한의 말을 자르고 군율휘가 튀어나왔다.

바닥에 언월도를 찍는데 그 소리가 가히 천둥과 같았다.

"이름을 알고 싶소."

"군 모면 충분하오."

"지금 이 팽만호가 그대의 이름을 듣기에 부족하다는 말이오?"

"내 이름은 한 분만을 위해 존재하니, 이곳에서는 군 모면 충분하오. 만약 이를 꺾고 싶다면 어디 실력으로 증명해 보시오."

"하! 이 팽가의 만호가 그대의 이름을 꼭 알아내겠소."

신호도 필요 없이 범처럼 달려오는 팽만호.

그의 도가 폭풍처럼 바람을 가르더니 군율휘를 휩쓸었다.

그 유명한 팽가의 오호단문도였다.

"좋군―!"

하지만 상대는 한때 금의위를 전부 총괄하던 장군.

황가에서는 맞설 자가 없다고 알려진 강자 중의 강자였다.

폭풍 같은 오호단문도를 일격에 갈라버렸다.

바닥이 깊게 파이고 경력이 팽만호 앞에서 흩어졌다.

"……졌소."

"흠. 그대의 도는 충분히 훌륭했소. 너무 힘에 의존하는 버릇만 고친다면 보다 나은 도가 되겠지."

"힘에 의존하는 버릇…… 충고 감사하외다."

따져 묻기에는 지나친 실력 차이였다.

툭 던진 조언을 곱씹으며 팽만호가 물러났다.

"세상에. 하북 팽가의 팽만호가 일격에 패배했어."

"대체 저 고수는 누구지? 언월도를 사용하는 고수라면 흔하지 않은데."

"흐음. 도법이 굉장히 특이한데. 중원의 것 같지가 않아. 세외의 고수인가?"

그리고 이는 큰 파장을 낳았다.

하북의 팽가라면 나름대로 명문세가.

예전처럼 오대세가에 끼지는 못해도 용력만큼은 여전했다.

그런 팽가의 도를 일격에 꺾었다는 건 일정 수준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의미.

"끄응. 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겠군."

"젠장. 이번 기회에 한몫 잡을 수 있나 싶었는데."

"저런 고수를 상대로 누가 도전을 하겠어?"

어중이떠중이는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간다는 뜻이었다.

"또 도전할 자가 있소?"

"내가 한번 군 대협의 도를 받아보겠소."

그렇다면 남는 건 알짜배기들.

"해남의 위운이라 하오."

"해남제일검!"

"강남 제일 쾌검 위운이다!"

이름 있는 이거나.

"그럼 난 광검과 한번 상대해 보고 싶구려."

"나는 이곳의 주인의 무공이 궁금하군."

혹은 다른 셈이 있는 이들.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

강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자다."

평범하게 생긴 장발의 무인이었다.

동쪽에서 무사수행을 왔다고 말하며 은소소와 검을 겨루었다.

동수를 이룰 정도의 실력으로 모두의 인정을 받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이름 없는 무사 중에도 저런 실력자가 있구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때 강유는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확실하냐?"

"확실해. 얼굴을 속이고 기운을 감춰도 특유의 걸음을 지우지 못하지."

"걸음 하나로 확신할 수 있는 건가?"

"나는 평생에 걸쳐서 저 인간을 쫓았다. 흑의 가면을 쓰고 그가 행했던 모든 일을 추적했다. 어느 날 우연히 지나는 길에 마주치더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그래."

이런 집요함이라면 확신하다.

명한이 참가 명부 이름 옆에 ‘흑’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남은 이들은 어때?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나?"

"흥. 내가 목구멍까지 밥을 떠먹여 줘야 하는 건가? 나는 내가 할 일을 다 하고 있다. 나머지는 네가 해."

"쯧.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결론은 모른다는 의미.

현재, 첫 번째 대결을 통과한 사람의 숫자가 열 명이니 누가 섞여도 이상하지 않다.

알려진 무인이라도 정보를 속이는 건 쉽다.

남은 열 명 모두를 의심해야 한다.

"향아야, 가서 일월과 이월을 불러와."

"네, 도련님."

흑점을 통해서 뒤를 캐는 것은 기본.

그간의 행적을 짚어서 신분에 대해서 몇 겹으로 검증을 해야 한다.

황제의 심장을 부상으로 건 이상, 강유옥은 확정.

그 이상으로 몇이 개입할지는 확신이 어렵다.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움직이면 안 된다. 특히, 강유. 경거망동하다가 일을 그르치지 마."

"알고 있다. 강유옥을 잡지 못하면 어머니의 시신도 구하지 못해. 허투루 움직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아."

"알면 다행이고."

이 상황에서는 먼저 움직이는 쪽이 손해를 보기 십상이다.

상대의 패를 모두 까발리기 전까지는 신경전.

직접 겨루는 것보다 더 짜증 나는 장기전이었다.

#

청은 배정된 숙소에 앉아 주변 분위기를 읽었다.

달아오른 밖과는 다르게 안은 조금 차가웠다.

몇몇 승부에 목맨 무인들의 열정은 있었지만, 정작 상대해야 할 명한 일행 쪽은 냉정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청은 분명하게 알았다.

"……강유라 이건가."

밖에서 움직이는 목소리들이 물어온 소식이었다.

갑자기 황제의 심장을 부상으로 걸고 소란을 피운 이유도 한 번에 이해되었다.

그리고 강유옥이 다급하게 도움을 청한 이유도.

‘강유옥 이 새끼. 감히 날 이용하려 들어?’

상황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었다.

"어이, 거기. 그쪽도 이번 무림대회 통과자인가?"

청이 숙소 밖의 한 남자를 불러세웠다.

검 하나로 천하를 주유한다고 알려진 낭인검객이었다.

"남과 대화를 섞을 생각은 없다."

"그러지 말고 잠깐 이야기나 나누자고. 혹시 또 알아? 내게 좋은 정보가 있을지."

"……백타문에서 온 백윤이라고 했던가?"

"음? 아. 그래, 백윤이라고 한다."

어색한 이름에 청이 웃음으로 무마했다.

"백타문에 너 정도의 고수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뭐 하는 놈이냐?"

"가끔 나같이 재능 좋은 놈도 생기는 법이지. 그쪽도 낭인 주제에 검 좀 쓰던데. 남 말 할 때는 아니지 않나?"

"흥.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용건이나 말해."

"뭐, 간단한 거야. 혹시 북해빙궁의 소궁주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어?"

"북해빙궁 소궁주? 예전에 병으로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걸 왜 묻지?"

"그 여자의 시체가 주변에서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뭐?"

황당한 이야기에 검객의 눈이 가늘어졌다.

북해빙궁 소궁주의 이야기는 이미 수십 년 전.

지금에 와서 시체 운운한 사건이 아니었다.

"뭘 모르네. 북해빙궁에는 만년빙이라는 천고의 보물이 있다고. 천년만년 그 모습 그대로 유지시켜 줘. 당시의 소궁주는 이 만년빙으로 모습을 유지했지."

"그게 정말이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오래전에 북해빙궁에 머문 적이 있거든. 하여튼 이 여자 시체만 찾을 수 있다면 만년빙이라는 천고의 보물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지."

"……헛소리."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알아보면 될 거 아니냐.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 중에 북해빙궁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있거든."

낭인은 미심쩍은 듯 바라보지만, 전처럼 헛소리라 치부하지도 않았다.

북해빙궁이라면 마냥 허황된 이야기도 아니었다.

"돌아가면서 슬쩍 떠보자고. 그래. 시체가 저택 남쪽의 숲에 있다는 이야기로. 어때?"

"……"

"손해 볼 건 없잖아? 아니면 그냥 헛소리한 거로 끝이고. 반응 오면 정말로 있다는 얘기니까."

"생각해보지."

답은 미지근했지만, 청은 미소 지었다.

무림인들의 특성상 보물이라면 절대로 무시하지 못한다.

그게 북해빙궁의 만년빙이라면 더더욱.

‘누가 먼저 움직이는지 한번 지켜보자고.’

머금은 웃음이 조금씩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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