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165/235)

누구를 위해서

주변의 웅성거림에 명한이 깨어났다.

익숙한 방이었다.

몸에 힘을 주어 일어나려 했다.

"큭……!"

하지만 이어지는 극심한 통증에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전신이 잘게 쪼개져서 못 따위에 찍힌 듯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어지간한 건 다 겪어봤다 싶은 명한에게도 새로운 수준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신음을 듣고 귀의가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고 눈 밑은 붉었다.

제대로 못 자고 간호한 흔적이었다.

"소백이 깨어났다고?"

"도련님!!"

"야야! 무슨 일이야, 대체!?"

이내 다른 이들도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웠다.

‘걱정시켰구나.’

머쓱함에 명한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직 기혈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반나절은 쉬어야 합니다."

"끄응. 그렇게 심한 거야?"

"심하다뿐입니까. 제가 처음 진료했을 때는 당장이라도 몸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요. 대체 무슨 힘을 사용하신 겁니까?"

외경의 힘.

설명조차 쉽지 않은 힘이었다.

‘그때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왜 이러는 거지?’

단순한 힘의 여파였다면 당시에도 나타났어야 옳다.

갑작스러운 부작용에 당황스러운 건 명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치에 맞지 않는 힘을 사용하니 대가가 따르는 게다."

"사부님?"

귀문터를 벗어나지 않는 은휘였다.

눈인사하는 은영영의 옆에서 명한의 전신을 훑어보고 있었다.

"균열이 생겼어. 이치에 맞는 않는 힘에 몸이 괴리를 느끼는 거다. 네가 느끼는 고통과 열은 이에 대한 반응이니 시간이 지나면 차츰 사라지겠지."

"하지만 사부님. 이 힘을 처음 사용한 것도 아닙니다. 그때는 이렇지 않았어요."

"당연한 것 아니냐. 그때보다 지금이 더 익숙하니, 가용하는 힘의 크기도 달라진 거다. 분명 초대 천마의 무공으로 무아지경에 빠져들었을 터. 보다 강하고 보다 선명하게 힘을 사역했음이 분명하다."

"익숙해진 게 원인이라는 건가요?"

은휘가 혀를 차며 손끝으로 명한의 이마를 두드렸다.

무언가 희미한 파동이 전신을 훑자 고통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지금 네 상태는 버들잎이 바람을 느낀답시고 태풍에 휘둘리는 격이다. 묵혼과 지닌 무공의 깊이가 밖의 힘을 따라가지 못하는 거지. 단련만 충분하다면 익숙하다고 이럴 일은 없다."

"수련 부족이라 이거군요."

"넌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힘을 얻었다. 묵혼의 경지도 천마의 무공도 마찬가지야. 높은 경지는 분명 이치를 휘두르는 힘을 주지만, 기반은 시간과 노력의 산물이다. 자칫 모래알처럼 부서질 수도 있어."

외경이라는 것은 경계선 밖의 거대한 바람.

이를 다루기 위해서는 뿌리를 깊게 박을 필요가 있었다.

높은 경지와 강대한 무학에 비해 명한은 이 뿌리가 얕았다.

"저기…… 은휘 조사님. 소백이 그 힘을 남용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슬며시 손을 들고 질문하는 건 은소소였다.

"태풍에 휘말린 버들잎이 어떻게 될까? 그대로 휩쓸려 날아갈 뿐이다."

"날아가면…… 죽는 건가요?"

"죽음뿐일까. 밖의 이치에 휩쓸려서 죽음의 안식마저 얻지 못한다. 어쩌면 영원히 밖을 떠돌게 될지도 모르지."

"그, 그런. 그렇게 위험한 힘을 어째서……"

"쯧쯧. 그 답은 내가 할 것이 아니다. 네 잘난 낭군이 주워온 것이 아니더냐."

"나, 낭군이요!?"

"에잉. 철없는 것들."

은휘는 혀를 차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낭군이라니……"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일단은 부차적인 것으로 미뤄 두었다.

지금은 호릉과 호랑.

그리고 둘이 만나서 데리고 온 서불이라는 아이가 중요했다.

"씻기고 나니까 볼만하네."

흙과 먼지를 닦아내고 덕지덕지 붙어있던 넝쿨 등도 떼어냈다.

오수가 한가득 쏟아지고 온갖 향유로 몸을 밀기를 한참.

겨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호릉, 호랑과 또래.

귀엽게 생긴 소년이었다.

"으…… 아아아. 으으."

서불은 자신의 모습이 어색한지 고개를 구석에 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작은 동물이 포식자들을 피해서 숨는 모습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소백은 착한걸. 나쁘지 않아."

호릉과 호랑이 한참을 다독이고 난 뒤에야 겨우 나왔다.

눈은 마주치지 못하고 쭈뼛거렸지만 그래도 도망가진 않았다.

명한이 그제야 겨우 눈높이를 맞추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름이 서불이라고 했지?"

"으, 응. 서불. 서불이다."

"그래, 서불. 좋은 이름이네."

"……응."

귀가 쫑긋거렸다.

"널 쫓아왔던 그 푸른 가면의 남자와는 아는 사이야?"

"으…… 으우우우."

"두려워할 것 없어. 그 남자는 내가 쫓아 버렸잖아. 기억하지?"

겨우 끄덕이는 서불.

청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한 모습이었다.

"여기는 안전해. 널 해칠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청. 나빠. 무서워. 서불을 괴롭혔어."

"그래. 나쁜 놈이었구나. 다음에 보면 더 혼내줄게."

"응. 응."

주먹을 꼭 쥐고 끄덕이는 서불.

귀여운 모습이라 명한이 무심코 머리를 다독였다.

불쑥 다가온 접촉에 서불은 잠시 움찔했으나, 손길이 썩 나쁘지는 않은지 가만히 있었다.

슥슥, 손길이 가는 방향대로 고개가 흔들렸다.

"착하네, 서불. 이런 착한 아이를 그 나쁜 놈은 왜 쫓아왔던 걸까?"

"청. 나빠. 서불 괴롭혔어. 매일매일 피를 가져갔어."

"피를 가져갔다고?"

"응. 여기."

앞으로 내미는 서불의 손목에는 흉터가 여럿이었다.

오래된 것도 제법 섞여 있었다.

하루 이틀 서불을 괴롭힌 것이 아니었다.

명한의 미간이 깊이 파였다.

"왜 서불의 피를 뺏어갔는지는 알고 있어?"

"……할아버지. 할아버지한테 필요하다고 했어."

"할아버지? 서불의 할아버지?"

"아니, 아니. 난 몰라. 그냥 수염이 긴 할아버지. 내 피를 가져가서 계속 줬어."

"네 피를 할아버지에게? 수혈이라도 한 건가?"

단순하게 보자면 그렇다.

하지만 서불을 잡으러 온 것은 다름 아닌 혼천의 가면 중 하나.

주요 인물이 직접 움직일 만큼 중요한 일이었다는 의미다.

‘그 할아버지라는 인물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건데.’

당장 짚이는 건 없다.

"흥. 고약한 놈들 같으니."

그때였다.

군율휘가 막 정비를 끝내고 들어왔다.

그는 청과 함께 움직인 병력을 상대하고 몇 놈을 생포해온 참이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정보를 캐내려 했지만, 어찌나 지독한지 쉽지 않았다.

"후우. 이쪽은 잘 풀리고 있나?"

"지금 막 서불을 씻기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서불? 아, 이 아이 이름인가? 고놈 참 씻고 나니 잘생겼군. 잘생겼…… 음?"

서불의 면면을 보면 군율휘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가왔다.

"허어. 이거 참 별일이군."

"군 장군. 뭐가 이상합니까?"

"이 아이 말이네. 내가 예전에 봤던 호릉, 호랑의 부친과 매우 닮았어. 어릴 때 종종 봤거든. "

"둘의 부친과 말입니까? 하지만……"

"그래. 그렇지. 저 둘의 부친은 도망치던 와중에 잡혀서 죽었어. 내 눈으로 봤으니 확실하네. 하지만 닮은 건 닮은 거야. 눈이며 코며 아주 빼닮았어."

군율휘가 서불의 이목구비를 뜯어보며 크게 끄덕였다.

따지고 볼수록 더 닮았다.

"……잠깐. 호릉과 호랑은 분명 서복 가문의 후예라고 했죠?"

"그렇지. 몇 대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문 대대로 황실을 지키고 있네."

"그럼 실제로 서복의 혈통을 잇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네요."

"그 서복 말인가? 그건 그냥 전설 아니었나? 이름만 따서 가문을 지었다고 아는데."

전설이 아니다.

이미 천기자의 제자가 서복이며 그 서복이 갈라져 나가서 만든 것이 혼천이라는 것도 안다.

황실을 수호하는 서복이라는 집단이 실제로 서복의 혈통을 잇고 있는 거라면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있다.

"서불이 서복의 후예라면 닮은 것도 가능한 이야기에요."

"진짜 서복? 전설에 등장하는 그 서복 말인가?"

"전설이 아니에요. 서복은 실존하고 있고, 지금도 살아 있어요."

"지금도?"

"그 이야기는 제가 따로 해드릴게요."

놀란 군율휘는 뒤로한 채, 명한이 서불을 바라보며 물었다.

"서불아. 네가 피를 줬다는 할아버지 말이야. 다른 사람들이 그 할아버지를 보고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하고 있어?"

"으, 응. 대부분 그냥 어르신이라고 불렀어."

"전부? 이름을 거론한 적은 없고?"

"아. 한 번. 누군가 그랬어."

서불이 입을 오물거리며 다음 말을 맺었다.

"서복 어르신이라고."

많은 것이 맞아떨어지는 답이었다.

#

커다란 거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다.

검은 머리에 반들반들한 피부를 지닌 미남자였다.

손가락마저 길고 반듯해서 흔히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아직 멀었느냐?"

하지만 표정은 그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했다.

살짝 갈라진 목소리에서 불만과 분노가 묻어나왔다.

"소백과 그 무리에게 잡힌 것 같습니다. 청이 갔으나 패퇴하여 물러난 상황인지라……"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어르신."

휙 돌아보는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반들반들한 피부 한 곳이 유리 조각처럼 깨져 있었다.

손을 대면 그대로 떨어져 나갈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심장을 회수하고 술법의 완성까지 오랜 시간이 남지 않았다. 이 몸만 멀쩡하게 유지하면 되는 일이거늘. 어째서 사소한 것 하나를 챙기지 못해서 사달을 내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어르신. 설마 그 아이가 우리를 빠져나갈 줄은 몰랐습니다."

"……후우. 청의 상태는 어떻지?"

겨우 화를 다스리며 물었다.

"소백과의 일전에서 패퇴하기는 했으나 상처는 깊지 않습니다."

"그 어린아이가 외경의 힘을 썼다고?"

"네. 아무래도 명왕도의 비고에서 황제의 파편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어째서지? 수많은 이들이 찾았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공간이 왜 그 아이에게만 모습을 보였던 걸까.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익힌 무공의 특수성 때문 아닐까요?"

"귀문의 은휘. 그가 창안한 묵혼공 말인가. 흐음. 확실히 그 무공이라면 변수가 있을 가능성은 있어."

혼을 보고 반응하는 건 귀문의 특기.

그중에서도 묵혼공은 한 차원 높은 수준에 존재하는 무공이다.

"일단은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전해라. 루의 인간들이 기회만 보고 있을 테니, 굳이 빌미를 제공할 이유는 없겠지."

"네, 어르신."

"그리고……"

다음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투툭, 하는 소리와 함께 피부의 껍질이 부서졌다.

반들반들한 겉가죽 안의 것은 완전히 썩어 문드러진 피부.

남자는 황급히 소매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물러나라!"

"어, 어르신!"

"당장 물러나! 당장 이곳에서 나가!"

다급하게 쏟아내는 축객령.

부하는 당황하면서도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몸을 숙이고 시선을 피하며 뒷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이내,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더 이상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그만의 공간이었다.

"……불로불사만 손에 넣으면 이것도 끝이야. 나는 완전해질 수 있어."

흘러나오는 혼잣말.

가장 깊은 곳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위대하지도 원대하지도 않지만……

가장 절실한 그런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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