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3/235)

청색

무림대회에 엄청난 사람이 모였다.

신교가 움직이고 무림맹이 다시 결집하려는 시대.

저마다 한 곳쯤은 기대고 싶은 장소가 필요했다.

위연과 은소소의 대결로 홍보는 충분히 한 셈.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본 회에서 개최한 무림대회에 참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득 모인 청중들 앞으로 명한이 나섰다.

지역 무인이 태반이었지만, 셈을 가지고 참가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신교에서 온 사람, 무림맹에 쪽에서 보낸 사람.

그리고 혼천에서 나온 사람까지 다양했다.

"현재, 무림의 정세가 매우 불안하여 하루하루가 낭떠러지 위를 거니는 것 같습니다. 정마대전이 또 벌어지는 것일까. 우리까지 휩쓸리는 건 아닐까.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까.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기에 명한은 직접 단상에 오른 것이다.

수많은 눈이 집중된 만큼 핵심을 전하기에 좋았다.

"본 소명회는 그런 사람들의 뜻을 모아 탄생했습니다. 어째서 우리가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겁니까. 거인들의 행보에 숨기만 해야 하는 겁니까. 이미 수많은 문파들이 이런 뜻에 호응하여 함께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무당파, 아미파, 화산파, 주검산장, 귀문, 백약문 등.

흑점을 통해 긴밀하게 접선한 이들로부터 약속을 받아냈다.

완전한 협력은 아니더라도 지지 선언이면 충분했다.

나열한 면면에 청중들이 술렁였다.

"오늘 이 자리는 그 시작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소명회가 당대의 거인들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지를 보여드리기 위한 시연이기도 하죠. 어떤 도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단상에 오를 소명회의 일원들과 자유롭게 대련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명한의 손짓에 은소소 등이 앞으로.

구검선녀와 군율휘 등은 뒤로 섰다.

면면을 다 알아보지는 못해도 기도를 읽을 수 있는 고수는 충분히 있다.

반응이 뜨겁게 나왔다.

"다만, 이런 대회를 아무런 상품도 없이 진행하는 건 시시한 일이겠죠."

명한이 다시 한번 손짓했다.

수레 한가득 채워진 황금과 중원 전역에서 수집한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신병이기부터 내공을 증가시키는 영약까지.

하나하나가 피바람을 만들기에 충분한 보물이었다.

청중의 반응은 타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황제의 심장이라고?"

그리고 그 안.

대부분은 모르는 목록에 반응하는 한 사람.

목함째 부상으로 나온 ‘황제의 심장’에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마어마한 황금이나 신병이기보다 그에게는 황제의 심장이 가진 가치가 컸다.

혼천에 모자란 한 조각을 채워줄 보물이었으니까.

"탐한다면 도전하고 가져가십시오. 문은 열려있습니다."

대놓고 던지는 도전장.

미끼로 이보다 큰 것은 없었다.

#

이게 먹힐까.

그런 의문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명한은 생각 없이 계획을 내지른 것이 아니었다.

혼천이 대놓고 습격을 자행하지 못하는 건 견제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

대놓고 심장을 상품으로 걸어도 도시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까딱 잘못하면 전면전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으니까.

"이런 상황에 움직일 수 있는 건 절박한 인간."

"강유옥이라 이거군."

조건은 강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

정말로 강유옥이 아들마저 버리고 아내를 구하려 하는 집착 강한 남자라면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아무리 강해도 안방에서는 승산이 있다.

"이 안에만 현경의 고수가 여럿이야. 강유옥이 날고 기어도 혼자서는 어렵지."

"혼자일 때 말이지."

"신교도 여길 주시하고 있고, 강유가 말한 환상루의 인물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을 거야. 대규모로 움직이는 건 쉽지 않지. 우리는 기다리면 돼."

"기다림이라. 가장 어려운 부분인데?"

"뭐, 일단은 무림대회를 진행하면서……"

차분하게.

그다음 단어를 머금으려는 순간이었다.

"소백!! 소백, 안에 있는가!?"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군율휘였다.

"군 장군? 무슨 일입니까?"

"호릉, 호랑 남매가 보이지 않네!"

"호릉과 호랑이요? 주변에서 놀고 있는 거 아닌가요?"

"아니네. 아니야. 내가 단단히 일러두어서 멀리 벗어나지 않네. 게다가 이미 식사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

"……일이 생긴 거군요."

밥때가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는 호릉, 호랑이다.

두 사람이 밥때가 지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뭔가 변고가 생겼다는 증거.

명한도 심각함을 느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둘을 목격한 곳이 어디입니까?"

"저택 인근 숲으로 향한 길이네."

황제의 심장을 내기의 대가로 걸었기 때문일까.

명한은 순간 의문을 품었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반응이 나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사라진 시간을 셈해보면 무림대전과 거의 엇비슷하다.

"소소 넌 일월과 이월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은밀하게 주변을 탐문하라고 전해줘."

"응. 알았어."

그렇다면 이건 공교로운 사건일까?

명한이 황급히 달려나갔다.

#

호랑이 눈을 깜빡이며 눈앞의 형체를 바라봤다.

전신이 풀과 넝쿨 따위로 덮여 있어서 모습 확인이 어려웠다.

묘한 기척에 이끌려서 숲을 가로지른 끝에 발견한 존재.

다가서면 물러서고, 물러나면 다가오고.

지지부진한 대치가 계속 이어졌다.

"호릉, 호릉. 확 달려가서 잡아 버리자."

"바보 호랑. 그러다가 되레 당하면 나중에 장군님께 혼나."

"으으으. 하지만 지겨운걸.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호랑이 발을 쿵쿵 구르며 화를 냈다.

마음 같아서는 확 달려가고 싶은데 쉽지 않았다.

감이 눈앞의 상대가 결코 만만치 않다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으. 으으."

"어? 말한다!"

"흐이익!"

갑자기 트인 입에 호랑이 불쑥 접근하자 낯선 존재는 뒤로 물러났다.

바닥을 기는 듯한 움직임인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바보야, 좀 천천히 가."

"에잇! 대체 뭐 하자는 건데? 너 누구야!?"

"으우우우……"

"바보! 바보! 말도 못 하는 바보!"

"바…… 보 아니다."

화난 호랑이 몰아붙이자 처음으로 말 같은 말이 나왔다.

호랑이 눈을 반짝이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말을 할 줄 아네. 이름은 있어? 누구야? 어디서 왔어?"

"으으으……"

"하나씩 물어봐, 바보 호랑."

"칫. 그럼…… 일단 이름. 너, 이름이 뭐야?"

"서…… 불. 서불."

이름까지 나왔다.

서불, 서불. 호랑이 이름을 주억거리며 반걸음 다가갔다.

서불은 움찔하며 몸을 떨면서도 전처럼 도망가지는 않았다.

"좋아, 서불. 나는 호랑. 저기는 호릉이야."

"호랑. 호릉……"

"맞아, 맞아. 생각보다 똑똑하구나, 너."

"헤…… 헤헤헤."

서불은 목덜미를 긁으며 웃었다.

그 모습은 바보 같기도 하고, 순수하기도 했다.

"근데 서불아.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여기까지는 왜 온 거야?"

"어…… 나. 서불은 도망쳤다. 계속 도망쳤다."

"도망쳐? 누구한테서? 어디서?"

"그건…… 으. 으으으으. 머리 아프다. 아프다."

계속되는 질문에 서불이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으악! 미안, 미안! 더는 안 물어볼게. 아파?"

"아프다…… 서불은 아프다. 더는 아프고 싶지 않다."

"응. 응! 맞다! 집에 귀의라는 아저씨 있는데 아픈 거 엄청나게 잘 고쳐! 서불이 아픈 것도 아저씨가 고쳐줄 수 있을걸?"

"아프지 않다……?"

"응. 귀의 아저씨 손에 걸려서 안 고쳐지는 병은 본 적이 없거든."

확신에 찬 말을 하며 호랑이 크게 접근했다.

서불은 몸을 떨었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쪼그려 앉은 채 고개만 들고 올려다봤을 뿐이다.

넝쿨과 풀 사이로 연녹색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같이 가자. 내가 귀의 아저씨에게 말해줄게."

"으…… 응. 서불은……"

망설이는 서불.

호랑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선뜻 무언가를 택하기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눈앞의 둘은 괜찮다.

본능의 속삭임에 손을 뻗었다.

"여기까지 도망쳤구나, 짐승."

낯선 목소리만 끼어들지 않았어도.

"아. 아아아……"

청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한 남자.

서불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두려움에 무너졌다.

의지로 이겨낼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이래서 짐승은 잘 대해주면 안 된다니까."

서불을 감싼 넝쿨을 잡아당겼다.

#

― 아아아악!!

어디선가 들려온 비명소리에 명한의 걸음이 더울 빨라졌다.

숲 너머의 기척은 그리 멀지 않았다.

"여기는 지나갈 수 없다."

하지만 앞을 막아선 한 무리의 개입으로 그 걸음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복장을 한, 어디서나 볼법한 이들이었다.

통일된 복장도 통일된 기색도 없었다.

한곳에 모여있다는 걸 제외하면 제각각이었다.

"비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너희에게 볼일은 없다."

"우리 주인께서 일을 처리하고 계신다. 지나가게 둘 수는 없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나?"

"소백. 안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정체를 알면서도 자리를 비키지 않는다는 건 확실한 의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막는다면 부수고 지나가면 그만.

명한이 멈춰있던 발을 떼며 앞으로 돌진했다.

거리가 삽시간에 좁혀지고 기습에 노출된 옆구리가 시야에 잡혔다.

퍼엉―!

이어지는 둔탁한 충돌음.

앞을 막아선 남자가 포탄에 맞은 듯 뒤로 밀려났다.

"……뭐?"

넝마가 된 상의를 찢어버리며 일어나는 남자.

시뻘겋게 달아오른 옆구리는 분명한 타격의 흔적이었지만,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세를 취했다.

힘을 조절했어도 방금의 공격은 바위도 부수고 남을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

명한이 놀란 건 당연했다.

"우리의 힘이 네게 미치지 못함은 안다. 하지만 주인께서 일을 끝마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 정도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다가 전부 죽는 수가 있어."

"우리의 목숨은 주인을 위해 존재한다. 죽는다면 그것 역시 명예로운 일."

"미친 새끼들이."

척 봐도 정상적인 놈들은 아니다.

명한은 적당함을 지워버리고 전력을 끌어 올렸다.

그의 의지에 공명한 주변 기운들이 거칠게 반응했다.

"쉽게는 안 된다."

그러자 이번엔 작은 향을 꺼내 주변으로 퍼뜨렸다.

은은하게 깔리는 녹색 운무는 전형적인 독의 모습이었다.

‘내게 독을?’ 명한이 우습게 여기며 칠채향으로 독에 대항했다.

세상의 그 어떤 독이라도 칠채향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독이 아니라고?"

하지만 놈들이 분사한 건 독이 아니었다.

되레 기운을 들뜨게 하는 보양의 성분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었다.

"주인님의 특제품이다. 주변 기운을 고양시켜서 평소와 다른 감각을 자아내지."

"……현경급 고수를 목표로 한 물건이군."

"이래도 네가 더 강하다는 건 변하지 않겠지만, 시간벌기는 충분하다."

명한의 방위를 완전히 틀어막는 남자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 매우 능수능란했다.

"―네놈들이 우리 애들을 납치했겠다!!"

그때였다.

천하대장군의 노호성과 함께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땅이 움푹 파였다가 사방으로 파도처럼 밀리고 적들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탄화된 연기를 걷어내며 성큼성큼 다가서는 건 군율휘.

명한과 다른 방향으로 수색하다, 소란에 날아온 차였다.

척 보면 척.

노련한 그의 눈에는 상황이 한 번에 들어왔다.

"가라, 소백. 이런 잡졸 따위는 내가 처리하지."

"지나가게 둘 수 없다."

"감히―!!"

다시금 움직이는 군율휘의 언월도.

무지막지한 속도와 힘으로 운무를 가르고 막아서던 괴한 중 하나를 으깨버렸다.

명한의 주먹도 막아내던 그들이지만 중량병기의 위력은 아니었다.

군율휘는 내공의 깊이와 무공의 경지로 장군이 된 사람이 아니다.

타고나기를 장사.

"가라, 소백."

인간 자체가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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