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235)

적과의 동침

승리에 대한 환호를 만끽할 시간도 없이 자리를 옮겼다.

방 안, 찻잔을 나눠 받은 채 강유와 일행이 마주 앉았다.

경계와 불신으로 묶인 정적이 분위기를 딱딱하게 만들었다.

그 어색함을 깬 건 강유였다.

"신교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서 뭘 하나 싶더니. 주제보다 포부가 훨씬 크군."

"아쉽게도 신교라는 울타리는 내게는 너무 좁아서."

"우습군. 하지만 그 배포만큼은 인정한다."

강유의 말에는 진심이 녹아 있었다.

천마의 핏줄로 태어나 신교 밖에서 자신의 것을 만든다는 건 꿈꾼 적이 없다.

천마와 신교의 울타리가 너무 크고 높았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박차고 나간 명한이 놀라울 뿐이었다.

"저마다 바라는 건 다른 법이니까. 그래서…… 뭔데? 대전 이후로 자취를 감췄던 네가 이곳까지 인사나 하려고 온 건 아닐 텐데?"

찻잔을 내려놓으며 명한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상황을 눈으로 확인하고 쓸만하다 싶으면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했다."

"끝까지 오만하네. 눈에 안 차면 그냥 무시하고 가려 했다는 거냐?"

"능력도 없는 놈들에게 기댈 생각은 없다. 내 제안을 받으려면 적어도 그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어야지."

"그래서? 우린 그 조건을 만족했나?"

"……생각보다 그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를 이뤘더군. 제안을 건네도 부족함은 없겠어."

마지못해서 하는 말 같지만, 은근한 인정도 섞여 있다.

천마 대전 당시만 해도 명한을 포함 그 주변의 모든 이들을 무시했던 것이 강유다.

결코 닿지 못하고, 닿을 수도 없는 미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명한부터 은소소.

하물며 주변의 다른 일행까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높은 곳에 도달해 있었다.

"돌려서 말하기는. 그럼, 얘기나 해 봐. 그 잘난 제안이 무엇인지."

"흠. 너는 서복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서복?"

훅 들어온 질문에 명한이 가볍게 움찔했다.

"반응을 보니 모르는 이름은 아닌가 보군."

"그러는 넌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은사님께 직접 들은 이름이다."

"은사?"

강유가 차를 홀짝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넌 내 태생에 대해서 알고 있나?"

"갑자기 또 무슨 소리야?"

"흔히 말하는 천마의 핏줄이라는 거 말이다. 아무리 천마의 혈통이 뛰어나도 그의 자식만으로 순수한 재능을 이렇게 끌어모으는 건 불가능해."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내 아버지는 천마가 아닌 강유옥. 한때 강남대협이라 불리던 사람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북해빙궁의 소궁주. 빙백지라고 한다."

"……천마의 핏줄이 아니라고?"

"아니. 멀기는 하지만 핏줄은 맞아. 내 아버지는 천마와는 먼 친척뻘이니까. 말하자면 방계의 개념이지."

담담하게 토로하지만 이건 엄청난 사실이었다.

신교의 제일 공자로 추앙받던 강유가 천마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야기.

명한의 입술이 쉽사리 열리지 못했다.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볼 건 없다. 출신 가지고 바락바락 외치던 놈이 적통이 아니라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꽤 자조적이군. 그때의 강유와 같은 사람이냐?"

"이래 봬도 인정할 건 인정하는 성격이다. 너희가 그만큼의 자격을 얻었으니, 대우해줄 뿐이지. 신교에 어울리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잘난 척은. 그래서 그 혈통이 뭐가 어쨌다는 건데?"

강유의 손끝이 찻잔을 타고 돌았다.

조금의 망설임.

하지만 이내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 빙백지는 병을 앓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품고 있던 절맥의 일환이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결국 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 아버지 강유옥은 이를 인정하지 못했지."

"인정하지 못하면? 죽은 사람을 어떻게 하려고?"

"그게 문제다. 그는 죽음을 부정하고 어머니를 되살리려고 했어."

"……불가능한 일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강유옥은 달랐어. 날 천마에게 입적시키고 세상에서 모습을 지웠다. 어머니, 빙백지를 되살리기 위해서."

말끝에서 가벼운 떨림이 느껴졌다.

최대한 담담하게 제삼자의 느낌으로 풀어내지만, 강유도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잠적은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 이야기. 천마가 직접 네게 전해줬을 리는 없을 텐데?"

"맞아. 천마는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날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대했어. 거기 있는 은소소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알고 있었냐?"

"너와 나만이 아니야. 천마의 자식 중에는 비슷한 방식으로 섞여든 재능이 여럿이야."

"쯧. 마음에 안 드는 방식이군.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알려준 사람은 누구지?"

"말했잖아. 은사라고."

숨을 가볍게 고르고 강유가 말을 이었다.

"천기자. 나를 따르는 구문자의 스승이자 속세를 떠난 신선들의 모임인 환상루의 주인이다."

"……천기자? 그 천기자라고? 일월교를 만든 천기자?"

"맞다. 그분께서 내게 진실을 알려 주셨다."

명한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기자는 과거 황제의 명령으로 일월교를 만든 당사자이자, 우화등선하여 사라졌다는 기인이다.

습작에 몇 가지 추가 설정이 더 있기는 하지만, 존재할 수 없는 사람임은 같다.

"못 믿는 건 이해한다. 나도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으니까."

"천기자는 이미 천 년도 전의 사람이야. 그가 살아 있다는 거냐?"

"그가 직접 만든 환상루라는 곳은 시간의 흐름이 빗겨나는 선계. 언젠지도 모를 아주 오래전부터 그 안에서 살고 있다."

"허. 세상에 천기자라니. 잠깐. 천기자는 일월교의 창시자야. 그런 사람을 은사로 모시는 사람이 신교에 몸담고 있어도 되는 거냐?"

역사적으로 일월교는 초대 천마의 난으로 신교가 되었다.

즉, 신교는 일월교를 부수고 새로 태어난 집단.

이래저래 꼬인 족보였다.

"여기서 서복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서복이라고?"

"일월교가 신교로 바뀌게 된 계기."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

그건 인간의 탐욕의 발로였다.

#

"응?"

호랑이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마을 어귀, 길게 늘어진 수풀 속에서 무언가 움직인 것 같았다.

토끼일까?

손을 곰살맞게 움직이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살금살금 움직였다.

"어디 가, 바보야."

"앗."

그 목덜미를 호릉이 잡아챘다.

몸이 덜컥 멈추고 발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수풀 속 기척이 크게 흔들리고 이내 멀어졌다.

토끼를 놓쳤다는 생각이 호랑이 왕, 하고 크게 울었다.

"뭐야? 뭔데?"

"너 때문에 놓쳤잖아! 바보 호릉!"

"누구보고 바보래! 멍청아!"

"이 씨!"

팔까지 걷고 한바탕 드잡이질할 기세를 보였다.

일상처럼 투덕거리던 둘이기에 이건 대수롭지도 않았다.

"어?"

"어?"

하지만 그 순간.

둘은 동시에 같은 감각을 느꼈다.

손가락부터 머리끝까지 쭈뼛하게 전기가 통하는 느낌.

몸을 부르르 떨고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호랑이 토끼를 찾던 그 수풀 너머였다.

"……"

"……"

두 사람의 눈이 맞고 대화 없이 합의가 이뤄졌다.

싸움 대신 호기심으로.

수풀 너머로 두 사람이 사라졌다.

#

"그러니까 서복이 천기자의 제자였다고?"

명한의 반문에 강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기자가 일월교를 만들어서 옛 황제의 과업을 이어 받아갈 무렵. 당시의 황제도 불로불사에 대한 탐욕을 보였어. 이를 위해 서복을 중원으로 내려보냈지."

"천기자의 술법을 알아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당시에는 천기자에 대한 정보가 확실하지는 않았거든. 민간의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가 전부였어. 이를 확인하는 것도 서복의 역할이었지. 그리고 그렇게 천하를 주유하기를 10년 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서복은 천기자를 만났어."

"그래서 제자가 되었다는 거군."

천기자와 서복의 시대적 간극은 수백 년.

불가능에 가깝지만, 천기자의 능력을 생각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럼, 황제진경도 천기자의 작품인가?"

"굳이 말하자면 합작품 정도라고 해야겠지. 서복은 황제에게 진상할 불사에 대한 연구 실적이 필요했고, 이를 천기자가 도왔어. 그렇게 탄생한 것이 황제진경이야."

"그놈의 불사. 대체 왜들 그렇게 불사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군."

"절대의 위치에 오르면 영생에 집착하는 건 고래부터 전해지는 법칙이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탐욕이 불행을 불러오는 법이야."

"불행이라.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는 이야기인가?"

사람이 모이면 의견이 나뉘는 법.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도 정확하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 다만, 과거의 한 시점에 천기자와 서복은 의견 충돌로 크게 싸웠어."

"의견 충돌?"

"천기자는 불로불사를 위한 실험을 멈추고자 했고, 서복은 반대했지. 이것으로 환상루도 반으로 갈라져서 큰 싸움을 벌였어. 그 결과 서복은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를 이끌고 세상으로 뛰쳐나갔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혼천이라는 건가?"

"맞아. 그리고 그와 맞물려서 일월교 역시 무너지고 신교로 재편되었어."

"그럼 당시의 가문들은……?"

"갈라졌지. 천기자를 따르는 자, 서복을 추종하는 자, 새롭게 신교로 태어나려는 자. 혹은 여러 곳에 발을 걸치고 형국을 보려는 자.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어."

신교가 과거를 지우면서도 당시의 가문을 남겨둔 이유였다.

서로 엉키고 설켜서 잘라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참 다사다난한 동네네. 그래서 그 서복이 어쨌다는 거야?"

"다시 내 아버지 강유옥으로 돌아오자. 그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날 천마에게 맡기고 떠났다고 했지?"

"……아. 서복과 네 부친이 만난 모양이군."

"바로 맞췄어. 만났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혼천의 흑면으로 일익을 담당하고 있지."

"흑면. 백면과 적면이라면 만난 경험이 있다. 색깔 놀이를 좋아하는 집단인가 보네."

"가면은 언제나 진실을 가리는 역할을 하지. 그들 모두는 현실을 외면하고 불노불사에 모든 걸 바친 존재들이야. 내 아버지 강유옥도 마찬가지지."

죽은 아내를 되살리기 위해 혼천에 몸을 담은 강유옥.

아들까지 내버리고 갈 정도의 집착이면 정상은 아니었다.

"……후.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다."

"덕분에 조각은 잘 맞춘 기분이야. 하지만 여전히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어. 하지 않아도 좋을 정보 공유까지 하면서 뭘 제안하고자 하는 거지?"

"강유옥이 북해빙궁에 보관 중이던 어머니의 시체를 가지고 갔다."

"뭐?"

"명왕도의 일 이후로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닐까 싶어. 은사께서는 천기를 읽고 알려주신 내용이니 정확하겠지."

"잠깐. 시체를 가져갔다고? 부활시키기 위해서?"

강유가 마른 입술을 씹으며 끄덕였다.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존재는 그나마 그릴 수 있는 혈육의 정이었다.

이것마저 파괴된다면 더이상 무엇도 남지 않는다.

"해서 네게 제안하고자 한다. 나와 함께 강유옥을 치자."

"네 아버지를 공격하자는 거냐?"

"그는 내 아버지도 뭐도 아니야. 어린 나를 버리고 헛된 꿈을 좇는 미치광이에 불과하지. 그를 죽이고 어머니의 몸을 되찾는 것이 내 목적이다."

"……내가 널 도와야 하는 이유는?"

이야기는 납득했지만, 득이 없는 일이다.

명한은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며 현실적인 요구를 던졌다.

"날 도와 일을 성공시킨다면 두 가지를 주겠다. 하나는 그동안 혼천에 대해 조사해 온 내 정보. 그리고…… 진짜 황제진경이 숨겨져 있는 장소다."

"진짜 황제진경이라고?"

"원전이다. 네가 혼천과 맞서겠다면 반드시 필요한 책이지."

천기자와 서복이 황제를 위해 저술한 불로불사의 비법.

가장 오래된, 심오한 진실이 이 안에 모두 담겨 있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방법도.

"위치는 알고 있나?"

뿌리치기 힘든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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