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하지 못한 손님
사람이 모이면 그만큼 이야기도 늘어난다.
호사가는 직업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한 마디씩 거들고 입에서 입으로 퍼지면 그것이 소문.
사람 수만큼 많은 소문이 퍼지면 결국 호사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위씨 가문이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지?"
"암. 하북의 명문이라고. 그 은 소저가 신교에서 검을 익혔다고 해서 중원의 검사를 무시하면 안 되지."
"이번에 된통 당해봐야지. 신교가 아무리 커졌어도 여기는 중원이라고."
"말 한번 잘했다! 신교 놈들 코를 납작하게 해 줘야 해!"
명한과 은소소가 신교에서 왔다는 건 이미 널리 퍼졌다.
속일 생각도 없었고, 어느 정도는 홍보용으로 쓴 감도 있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발군이었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있었다.
중원에는 신교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 여전히 많다는 점.
정마대전은 끝난 지 꽤 됐지만, 쉬이 사라질 감정이 아니었다.
"오. 오오오. 저기 위 대협이 오는구만."
"크으. 저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라고. 명예욕이 없어서 그렇지 위 공자면 예전 검왕과 비교해도 그리 모자라지 않아."
"암. 딸뻘도 안 되는 소저에게 당할 사람은 아니야."
일방적인 환호를 받으며 위연이 가도를 가로질렀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행객들로 사방이 만원이었다.
부담과 흥분을 함께 느끼며 위연이 저택 앞에 섰다.
현판 없이 ‘소명회’라는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위씨 가문의 위연이오. 도전을 받아들이고자 이리 왔소."
끼이이익.
대뜸 던진 선언에 저택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때아닌 기사에 주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소리를 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위 대협."
"……으음."
"안으로 드시지요."
문을 열고 안내를 위해서 나온 사람은 흑점의 전창소.
허름한 복장에 고작 안내역을 맡은 사람에 불과한데, 은근하게 풍기는 기도가 만만치 않았다.
얼추 봐도 화경.
그것도 제법 기도가 안정된 것이 녹록지 않았다.
‘이런 인간이 문지기를 맡은 건가.’
위연은 조금 더 긴장됨을 느꼈다.
"객들도 들어오시지요. 좋은 볼거리에 구경꾼이 빠져서야 섭하지요."
"오. 오오오……! 이월이다!"
"세상에. 황하루의 이월이 적을 옮겼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나?"
"히야. 예전보다 더 아름다워진 거 같은데?"
싱긋 웃으며 객을 초대하는 건 이월이었다.
그녀의 웃음을 쓴소리로 퇴짜놓는 사람은 없었다.
좋은 구경이라며 우르르 쏟아지는 터에 위연도 망설이지 못했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전창소의 뒤를 따라갔다.
"제대로 온 건가."
이젠 쏘아버린 화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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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강해 보이는군."
방립으로 얼굴을 가린 구검신녀가 짧게 품평했다.
저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위연의 기도는 명성만큼 훌륭했다.
안정된 걸음걸이에 중심이 잡혀있는 몸.
내공 역시 충만한 것이 눈의 정광에서 엿보였다.
한 지역을 대표할 검사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평이 후하시네요."
"검으로 일가를 이룰 정도다. 나나 화무천에게는 미치지 못하나 당대의 고수들과는 충분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도 남겠지."
"그럼 소소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소소 저 아이는……"
맞은편에 선 은소소를 보며 구검신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표현이 쉽지 않았다.
"검성의 무학이라는 건 일반적인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기식으로만 보자면 소소 저 아이는 위연이라는 자에게 미치지 못한다. 내공의 깊이, 검에 대한 이해, 축적된 경험.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있지. 하지만 검성의 무학이 그 모자람을 상쇄하고도 남는구나."
"함축의 검 말이군요."
"그래. 검성의 검은 모든 검의의 함축. 그 안에는 수백의 변초도, 수천의 검식도 모두 들어 있다. 단순한 것이 최고다, 라는 허울뿐인 말을 현실로 끌어올린 것이 검성이야. 그야말로 신기의 영역이지."
"머리로는 이해가 어려운 영역이네요."
"이해로 될 영역이 아니다. 저 아이는 자신이 이해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개념이 아니야. 검성이 새겨 놓은 검의가 그대로 박혀 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이해가 아닌 체득의 검.
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완벽히 ‘검성’이라 부르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끝없는 싸움과 끝없는 단련만이 시간을 앞당길 뿐.
이 사실은 은소소 자신도 알고 있다.
"물러나지 않고 도전을 받아주신 것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연무장 위, 먼저 예의를 보이는 은소소.
평소와는 다르게 꽤 깍듯한 모습이었다.
"은 소저의 위명이 대단하여 이 위 모가 잠결에도 들을 지경이었소. 오늘 이렇게 기회가 생겼으니 그 대단한 검성의 검을 견식해 볼까 하오."
"후후. 위 대협께서는 검만이 아니라 농도 익힌 모양이군요."
"농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살벌한 곳에서 제정신으로 견디겠소? 이 나이에 손녀뻘인 은 소저와 검을 겨루는 것도 마뜩잖은데, 이런 구경꾼들이라니."
"지금이라도 사람을 물릴까요?"
"아니, 됐소. 이름을 알리기 위해 명인들을 이용하려는 수작. 알면서 응한 건 그대들의 그 선택이 얼마나 오만한지 알려주기 위함이오."
반대로 위연은 조금 화가 난 듯한 모습이었다.
검을 뽑아 바닥으로 늘이며 흉흉한 기세를 드러냈다.
"변명할 길이 없군요. 맞습니다. 소명회라는 곳은 아직 작고 약하여 명사들의 도움이 필요하거든요. 그 행동이 오만하고 같잖아도 부디 아량으로 봐주시기를."
"대체 뭐가 그리 급하여 이리 소란을 피우는지 모르겠군. 얼핏 봐도 허투루 검을 익힌 것은 아닐 터인데. 신교의 울타리를 벗어났다는 것이 그리 불안하였소?"
"후후. 불안이라기보다는 초조함이라 하는 편이 옳겠지요."
"역시 신교라는 큰 집단에서 벗어나면……"
"아뇨. 그런 초조함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검을 뽑아 바닥으로 늘이는 은소소.
기도가 한 자루의 검처럼 예리하게 섰다.
오싹함에 위연은 자기도 모르게 검을 치켜들어야 했다.
"검을 들고 중원 전역을 향해서 휘두르게 될 그날. 기다릴 수 없는 초조함에 일 처리가 급해질 수밖에 없더군요. 이제 곧 중원 사람들은 알게 될 겁니다. 저와 제 주인. 소명회가 단순히 신교에서 쫓겨난 소궁주 둘의 안식처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체 뭘 노리는 거요?"
"천하입니다."
한 점의 거짓도 없다.
또렷한 은소소의 눈동자에 위연이 검을 고쳐 쥐었다.
위씨 일가의 체면을 위해 옮긴 이 걸음이 어쩌면 생각보다 큰 무게를 지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럼, 겨뤄볼까요?"
검과 검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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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을 위해 은소소가 검을 휘두르고 있을 무렵.
녹지 않는 얼음의 대지 위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자네의 바람은 이해하나 허락할 수는 없네."
얼음 기둥으로 지붕을 떠받친 거대한 대전의 중앙.
치렁치렁 늘어지는 모피 차림의 노인이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불쑥 찾아온 한때의 인연에게 건넨 말이었다.
"허락을 요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 힘으로 뺏기라도 할 셈인가?"
"필요하다면."
그 인연이라는 건 흑색 가면 차림의 남자.
혼천의 일익을 맡고 있는 강유옥이었다.
"변했군. 한때는 무림의 안위를 논하던 자네가 어쩌다 이런 괴물로 전락했는가. 아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나?"
"아들은 아들의 길을 갈 뿐. 어차피 인생에서 손 내밀 시간은 한참 지났습니다."
"그 이야기를 딸아이가 듣는다면 참으로 기뻐하겠군, 그래."
"……벌을 내린다면 그때 가서 받도록 하죠. 그 전까지는 원하는 걸 얻어야겠습니다."
강유옥은 물러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북해빙궁의 궁주임도 알고 주변에 수백의 병력이 포진되어 있음도 알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물러날 수 없었다.
"자네의 그 허황된 바람은 이룰 수 없을 거네. 세상에는 천리라는 것이 있어. 죽음은 죽음으로 묻어 둬야 하네."
"그딴 것이 천리라면 그 하늘을 부수면 그만입니다. 제가 모시는 분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누리는."
"헛소리 그만하게. 그걸 진정으로 믿었다면 자네 눈이 그렇게 탁할 리 없지 않나."
"……"
처음으로 막힌 답.
강유옥이 입술을 잘근 씹으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폭발적인 기운이 그의 주먹을 중심으로 뭉쳤다.
"답이 막히니 주먹인가? 그 버릇은 딸아이를 닮았군."
"뭐라 한들 제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만년빙에 잠들어 있는 그녀를 데려가겠습니다."
"만년빙은 북해빙궁이 아니라면 오래도록 유지되지 않네. 얼음이 녹으면 딸아이의 모습이 어떻게 변하리라는 건 자네가 더 잘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죽음을 외면하기 위해 얼려둔 시간.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지금은 이것이 최선입니다. 전 반드시 그녀를 죽음에서 되돌릴 겁니다."
"……지독한 집착은 파멸만을 낳는 법이네."
"파멸 끝에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어리석은."
빙궁의 궁주, 하백이 손을 들어 올렸다.
포진 중이던 병력들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한때 사위였던 남자.
하지만 지금은 빙궁의 보물을 훔치려는 도둑에 불과하다.
궁주 된 자로서 이를 방관할 수는 없었다.
"저승에서 딸아이에게 사과해라."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군요."
그날 북해빙궁은 멸문했다.
#
"하아. 하아."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위연이 검을 움켜쥐었다.
주고받은 합은 고작 스무 번 정도.
절정의 검사들에게는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눈앞의 여자.
은소소는 자신보다 강했다.
"위씨 가문의 검. 명성만큼 훌륭하군요."
"후우. 그대야말로. 천마의 무공인가 싶지만, 어딘가 이질적이더군. 그게 바로 검성의 무학이라는 것이오?"
"나름의 뿌리라고만 해 두죠."
은소소가 검을 고쳐 쥐며 자세를 달리했다.
존경의 의미로 가지고 있는 가장 빼어난 검을 사용할 셈이었다.
검성에게서 이어받았지만, 아직은 그 말단밖에는 익히지 못한 검.
초식명도 없고 화려한 검식도 없었다.
그저 한 번 휘두름.
‘일섬(一閃)이라고 하면 어울릴까.’
함축의 절정에 이른 검이었다.
"최고의 검으로 마지막을."
"영광이오."
자세를 잡고 가진바 최고의 무기를 쏟아냈다.
정적이 둘 사이로 내리고, 한 호흡의 간격을 둔 채 검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소리도 형체도 일순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검세에 놓인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합이었다.
챙―!!
그 결과로 부러지는 것은 위연의 검.
절반은 손에서 벗어나 바닥에, 남은 절반은 그대로 날아가 기둥에 박혔다.
모든 역량을 쏟아냈지만, 은소소의 일격을 버티지 못했다.
"……대단하군. 과연 검성이라 할만하오."
"과찬입니다. 품은 뜻은 크지만 아직 갈 길은 멀지요."
"후후. 은 소저라면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요."
위연은 두말없이 패배를 시인하며 깊이 포권했다.
그리고 그제야 승패를 깨달은 관객들이 환호했다.
호북의 위연이 은소소에게 패했다는 건 시대의 변화이자 신성의 등장.
신성을 품은 소명회의 격이 올라가는 소리였다.
"재주가 늘었군."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싸늘하게 씻어 내리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기둥에 박힌 검 조각을 뽑아내 은소소 발 앞으로 던지는 한 사내.
그린듯한 외모에 군림의 기도를 풍기고 있는 인물이었다.
"……강유?"
"오랜만이다."
신교 제일 공자, 강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