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235)

명성을 위해

중원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신교의 제왕 천마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마대전 이후로 두문불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신교의 편재를 재편하고 산개해 있던 무력대를 호출했다.

중원 전역이 그 행보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거인의 걸음은 언제나 피바람을 불러오는 법.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래, 천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건가."

이 소식은 은거촌의 명한에게도 닿았다.

"예상하고 있었던 거야?"

"천마각에서 나눈 얘기도 있고, 그라면 반응하리라 생각했지."

"천하삼분이라고 했지?"

"둘은 변수가 없고 셋이 가장 균형적으로 옳아. 덕분에 천마도 신교 내부의 적을 솎아 낼 수 있었겠지."

적은 은밀하고 그림자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다.

천하의 천마라도 그런 자들을 품 안에 둔 채 움직이기는 어려운 법.

명한이 던진 돌이 적을 자극하여 밖으로 나오게 하지 않았으면 침묵은 이어졌을 것이다.

"화산파, 아미파, 곤륜, 점창…… 전부를 노렸던 건가."

"막군천의 행선지가 예의 문파들로 향했다는 건 다음 수순이 정해졌다는 의미지. 조건은 아마도 황제의 심장. 전부는 아니지만, 그것으로 조건을 만족했다고 생각했을 거야."

"봉기라는 건가. 무엇을 위해서?"

"삼분이라는 말은 중원을 셋으로 나눈다는 것. 서쪽에 신교. 남쪽에 우리. 그리고 동쪽에 무림맹이 존재한다."

명한은 지도를 펼쳐서 나무 말을 그 위로 올려 두었다.

가장 강대한 세력은 서쪽의 신교.

남쪽은 회(會)라는 표기로 명한과 그 주변 집단을 의미.

남은 건 동쪽에 존재하는 구세대의 집합인 무림맹밖에는 없다.

"무림맹을? 그들이 혼천의 휘하에 있다는 거야?"

"우리가 돕지 못한 이들은 아마도 대부분. 신강지역에서 중원으로 이어지는 중도 문파들 중 일부가 쓸려나갔다는 소문이 있어. 화산이나 다른 문파에서도 비슷하게 하려 했겠지."

"신교의 소행으로 몰고 간다?"

"가장 쉬운 구심점이니까. 정마대전은 끝났지만, 그 감정은 여전해. 신교라면 이를 가는 이들이 한가득이지. 적당한 발화점만 있으면 쉽게 타오를 거야."

그나마 명한이 화산 등을 구하지 않았으면 이보다 훨씬 규모가 컸을 거다.

"하지만 이건 좀 이상하지 않아? 지금까지의 행보와 비교하자면 너무 급해."

"예리하네. 맞아. 이건 혼천의 지난 행보와 비교하면 지나치게 급해. 나라면 신교를 속박해 둔 채, 남은 이들을 회유하거나 제거했겠지."

"……막군천의 행동이 혼천과는 별개의 것이다?"

"그는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어. 결정적인 순간에 누일 곳을 정한 거지."

명한이 지도 위에 ‘?’가 적힌 말을 올려 두었다.

신교, 혼천, 명한으로 이어지는 삼파전 배후에서 은밀하게 상황을 조율하는 이들이었다.

"제4의 세력."

"언제나 미묘함은 있었어. 혼천의 행보 사이사이에서 드러나는 어긋남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을 방해하는 누군가, 혹은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세력이 있었어."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지. 아마 너도 알 거야."

언제나 방관자를 자처하나 그 행동에는 이유가 존재했던 사람이 있다.

그 인물 하나. 혹은 그를 위시로 하는 어떤 집단의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신기자."

‘?’가 적힌 말 옆에 신기자의 이름이 적힌 말을 놓았다.

파운의 말도 손에 쥐었으나 이건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일의 중심에는 그가 있었어. 교묘하게 상황을 쥐고 흔들었지. 그의 독단인지 지시를 받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숨겨진 세력의 핵심은 그가 분명해."

"파운도 같은 편인가?"

"확실하진 않아. 나를 속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경험해본 그는 정말로 신교의 정점을 노리고 있었어. 다름 셈이 있기에는 지나치게 순수했지."

"그럼 조언자로 속이고 신교에 잠입한 건가. 비슷한 경우가 또 있지 않아?"

"응. 강유의 최측근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조언자가 하나 더 있지."

생각해보면 강유부터가 뭔가 의심스럽긴 하다.

습작 전체를 관통하는 시스템에 간섭한 그때의 감각도 그렇고.

강유, 파운.

그리고 그 둘의 조언자는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후우. 그럼 이젠 어떻게 하지? 신교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무림맹의 발족은 피할 수 없잖아."

"말했잖아. 첫 구상은 어디까지나 천하삼분. 신교와 무림맹과 비교해서 우리의 모임에 가장 부족한 부분이 뭐라고 생각해?"

"세력? 아니…… 명성."

"그래. 실제 세력은 어떻든 간에 우리는 둘에 비해서 현격하게 명성이 모자라. 이래서야 균형을 맞춘다고 할 수 없지."

천하삼분의 핵심은 균형.

팽팽하게 균형을 맞춰서 섣불리 파국으로 치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은 둘과의 격차를 메워야 한다.

"무림대회를 열자."

빠질 수 없는 이벤트.

명성을 위한 지름길이었다.

#

"……소명회?"

어느 성, 어느 무관.

근래에 퍼지는 소문이 무관의 관장 귀까지 들어왔다.

심드렁한 반응과 달리 소문을 물고 온 무인은 꽤 흥분한 얼굴이었다.

"신교에서 쫓겨난 소궁주가 세운 집단이에요. 면면이 대단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고요. 이번에 대대적으로 무림대회를 열어서 위세를 자랑하려나 봐요."

"흥. 그래 봐야 제집에서 쫓겨난 놈 아니냐. 사람 몇 명 모았다고 위세를 떨칠 거였으면, 지역마다 군벌이 가득했겠지. 괜히 그런 끼어들지 말고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무시할 일이 아니에요. 무림대회 상품에 대해서는 들어 보셨어요?"

"상품?"

솔깃한 말에 관장이 반응을 보였다.

"황금 세 관과 주검산장에서 제작한 무기가 부상으로 지급된대요. 거기다가 재능이 있는 이는 아무런 조건 없이 무공도 전수해 준대요."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손해만 보는 일을 한다고?"

"그동안 무림 역사에서 소실됐던 무공서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네요. 본래의 주인을 만나기를 바란다면서."

"흥. 못 믿겠다. 그럴싸한 말로 사람을 꾄 뒤에 모른 척하려는 수작이겠지."

"진짜라니까요. 이미 몇 개를 뽑아서 시범을 보였는데, 진품이라고 사람들이 난리였어요."

"……사실이냐?"

크게 끄덕이는 관원에 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한때는 이름 꽤나 있던 문파의 제자.

전쟁에 휘말리며 무공을 잃고 이런 변방 지역 관장직이나 맡는 신세가 됐다.

잃어버린 무공만 되찾을 수 있다면 문파의 부활도 꿈은 아닐 터.

혹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뭐. 어디에서 한다고?"

넓은 중원 땅.

어디 이런 사연이 그만의 것이겠는가.

무림대회 소문은 신교의 약동과 맞물려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

하북지방에는 검으로 명성을 날린 문파가 여럿이다.

그중 세간에는 덜 알려졌지만, 가문으로 위세가 대단한 위씨 가문이 있다.

그 안에서도 첫째 위연의 검기는 그야말로 불세출의 경지.

항간에서는 무당의 장문보다 한 수 위가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검성이라잖아, 검성. 듣기로는 아직 스물도 안 된 여자라고 하던데."

"세상에. 그 정도면 왕년의 검왕이나 검제보다도 훨씬 윗줄인 거 아니야?"

"어마어마한 거지. 난다 긴다 하는 검수들도 죄다 도전했다가 박살이 났다니까."

그런 위연의 귀에 근래 들어 끊이지 않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소명회의 검사 ‘은소소’에 대한 소문이었다.

천마의 자식이나, 절연하고 무림으로 뛰쳐나와 소명회의 일원이 된 여걸.

그 검은 이미 종사의 반열에 올라서 검으로는 상대가 없다고 한다.

"은소소라."

찻잔을 넘기는 위연의 목소리가 껄끄러웠다.

무림 배분으로 치자면 은소소는 몇 항렬이나 아래뻘.

나이로 셈해도 딸보다 손녀에 가깝다.

무림의 명숙으로 후배의 선전에 그냥 응원하면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주변 상황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형님. 성내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형님께서 그 어린 계집의 검이 무서워서 숨어 계시다고요. 이런 치욕을 계속 감내해야 하는 겁니까?"

"……"

"형님!"

명성 높은 무인이라면 응당 따라붙은 평가였다.

무당이나 화산 같은 문파라면 그 위세가 두려워 말을 아끼겠지만, 위씨 가문은 그만치는 안 된다.

호사가들이 물고 씹기 좋은 대상.

저잣거리 아이부터 행상까지 저마다 서열을 매겨서 누가 나으니 마니 품평하는 통에 위씨 가문 이름이 바람 잘 날 없었다.

"아우야. 이 형님이 손녀뻘의 아이와 검을 겨뤄야겠느냐."

"형님. 돌아가는 꼴을 보세요. 검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동네 꼬마들도 형님이 그 어린 계집 보다 모자란다고 험담입니다. 이래서야 우리 위 씨 가문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소문은 그냥 흘려들으면 그만이야."

"형님이야 그게 가능하겠죠. 동생들이 우리 아이들은 어찌합니까. 다들 위씨 가문 검을 최고라고 믿었는데……!"

위연이 앓는 소리를 내며 식은 차를 넘겼다.

떫은맛이 혀끝을 할퀴었다.

‘어찌한단 말인가.’

차라리 은소소의 나이가 많고 명성이 높으면 문제없는 일.

그녀가 지나치게 어리고 쌓은 업적이 적다 보니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막상 가서 검으로 꺾고 나면 그것도 그것대로 좋은 꼴은 아니다.

무림 선배가 후배를 윽박지른 격이니까.

"숙부님! 숙부님!!"

그때였다.

요란한 발걸음과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성아야. 단정치 못하게 이게 무슨 망동이냐."

"지,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에요. 도착했지 뭡니까."

"도착하다니? 뭐가?"

"도전장 말입니다! 도전장!!"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다급하게 붉은색 서신을 내밀었다.

겉면에 박힌 회(會) 자는 소명회의 서명.

"……호오. 그래도 길은 열어주는가."

후배가 선배를 초대하는 모양새.

위연이 서신을 손끝으로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

"다 보낸 거야?"

위 씨 가문의 위연이 무거운 엉덩이를 뗄 무렵.

은소소도 일을 끝내고 길게 늘어졌다.

평소와 다르게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평소 안 하던 걸 하려니까 죽겠어."

"그러니까 책과 좀 친해지라니까."

"흥. 책은 무공서면 충분해. 도전장에 무슨 미사여구가 그렇게 많이 필요한지. 그냥 붙자고 한마디 하면 끝 아닌가."

"체면은 챙겨 줘야지. 사방을 다 적으로 만들 건 아니잖아."

볼멘소리에 명한이 가볍게 웃었다.

각지로 보낸 도전장의 형식은 명한이 직접 만들어 주었다.

은소소의 방식이었다면 아마 원수만 다량으로 발생시켰을 것이다.

"이젠 그럼 오는 족족 검으로 눕히면 된다 이거지?"

"식전 행사 같은 거야. 이 중원 땅에는 검가들이 많으니까. 네가 그들 모두를 쓰러뜨린다면 명성을 높이는 데는 더없이 도움이 되겠지."

"잘됐어. 나도 내 검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궁금했거든."

검을 뽑아 움켜쥐며 투기를 끌어 올리는 은소소.

"쉽지는 않을 거야. 네가 검성의 진전을 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걸 다 온전히 체득한 건 아니잖아. 내공의 문제도 있고."

"그런 건 실전이 해결해 줄 거야. 베고 또 베고 나면 그때가 돼서야 온전히 내 검이 되는 거지. 그 바보 같은 인간에게 받은 검이니까…… 약한 소리는 할 수 없어."

이름도 모르는 그저 한 명의 검사였다.

빚진 목숨 때문이라도 그에게서 받은 검을 최고로 만들어야 한다.

"내가 검성이야."

검성이라는 건 그런 위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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