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235)

거인

고요한 밤.

새들마저 침묵에 빠진 시간에 그림자 몇이 바쁘게 움직였다.

산등성이를 넘고 절벽에 가까운 경사를 오르며 산 끝자락에 당도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곳이지만 이들에게는 달랐다.

못 가는 곳이 없고 못 죽이는 자가 없도록 훈련받은 이들이니까.

발끝이 지면에 닿고 선두의 흑의인이 손짓했다.

스슥. 스슥.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는 흑의인들.

이미 지형을 익혀 둔 듯 망설임이 없었다.

순식간에 방위를 점하고 때를 기다렸다.

하늘에 뜬 달이 그림자에 가려지며, 사위가 완벽한 어둠에 물드는 시점.

바로 지금이었다.

푹. 푹. 푹.

흐르듯 파고든 흑의인들의 단검이 잠자리에 든 이들을 찔렀다.

한 번에 하나의 요혈.

흑의인의 공격은 아름다울 정도로 정교했다.

잠에 빠진 채 칼을 맞는다면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맞았을 때의 이야기.

"……!"

"!!"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차이.

흑의인들이 단검으로 찌른 천을 걷어내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잠들어 있어야 할 사람 대신, 솜으로 채운 인형이 그곳에 있었다.

일이 틀어졌다―라는 판단이 서는 것과 동시에 일제히 물러났다.

"쥐새끼들이 어딜 감히 남의 산문을 제집처럼 넘는 거냐?"

"잡아라!"

"놓치면 안 된다!"

이미 그것조차 준비되어 있었다.

사방에 순식간에 밝아지며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선두에 선 것은 화산파의 장문인 악무군.

화산파의 매화검을 화려하게 휘두르며 흑의인들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갔다.

잠입과 암습에 특화된 흑의인들은 감히 화산의 검을 막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전부 처리했습니다, 장문인."

"피해는 전혀 없습니다."

"흥. 어리석은 것들. 제깟 것들이 감히 화산을 노려? 혀 깨물고 죽지 못하게 단단히 막아 둬라. 심문은 내가 직접 한다."

"네!"

상황은 반각도 지나기 전에 정리됐다.

저항 끝에 죽은 흑의인을 제외한 나머지 전원이 생포됐다.

독을 물고 혀를 깨물려 했지만, 그것도 이미 예상했다.

입안 가득 쑤셔 넣은 천에 죽음 또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정말로 화산을 목표로 움직일 줄이야. 이놈들이 선을 넘었군."

"그래도 장문인의 선견지명 덕에 피해가 없지 않았소. 악 장문께서는 대체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은 것이오?"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화산 장로들이 은근히 의문을 드러냈다.

악무군의 명으로 습격을 대비하기는 했으나, 반신반의했던 것이 사실.

상황이 진실을 드러난 지금은 그 정보의 출처가 궁금했다.

"연을 맺어 둔 사람이 있습니다. 습격이 있을 거라고 대비하라고 하더군요."

"호오. 꽤 신뢰하는 사람인가 보오."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만…… 거부할 수 없는 선물을 준 터라."

"선물?"

악무군이 양피지 한 장을 장로들에게 건넸다.

두서없이 그려 넣은 선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이게 대체 무엇인지 눈알을 굴리던 장로들이 어느 순간, 선의 정체를 깨닫고는 경악했다.

"이, 이건 매화검의 정수 아닌가!?"

"세상에!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매화검의 정수가 어떻게?"

"오. 오오오. 놀랍구나, 놀라워! 이 한 장의 양피지에 화산이 전부 들어있네!"

화산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매화검의 요체였다.

지금껏 그들이 익힌 검은 애들 장난으로 치부할 정도로 고등의 경지가 녹아 있었다.

화산의 무학을 몇십 년은 족히 앞당겨줄 선물.

이걸 거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이걸 대체 어느 고인께서 장문께 보냈다는 거요?"

"설마 은거하신 화산파의 어르신이라도 만났소?"

쏟아지는 질문에 악무군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입맛이 쓰진 않을 텐데.

아쉽게도 이 선물은 ‘이용해 먹어도 좋을 상대.’라고 간을 보던 대상이었다.

"선물을 가지고 온 자들은 흑점의 인물이었습니다."

"흑점? 고작 정보상 나부랭이가 어떻게 말이오?"

"설마 흑점에 그런 역량이 있겠습니까. 명을 전한 자가 흑점을 부리고 있을 뿐이지요. 아마 장로들께서도 이름은 들어봤을 겁니다. 소백……이라고."

"소백? 그 신교의 소궁주였다가 쫓겨난 인물 말이오?"

"쫓겨났다라. 세간의 소문을 따르자면 그렇군요."

악무군이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 하나를 양피지 위로 던졌다.

정갈하게 꾸며진 주머니 겉으로 회(會) 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건 무엇이오?"

"그자가 일을 꾸밈에 있어서 사용하는 이름이라 합니다. 소명회(小明會)."

"소명회? 허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름인데, 대체 어찌……"

"아마 앞으로는 많이 듣게 될 거 같습니다."

낯선 이름에 얕잡아 보는 장로들과 다르게 악무군은 본질을 바라봤다.

기습을 예견하고 거부할 수 없는 선물로 목줄을 단 행동.

‘신교의 울타리를 벗어났다 이건가.’

소궁주로 만족할 사람의 행보가 아니었다.

"소명이라."

그 밝음의 방향이 어디일지 궁금할 뿐이었다.

#

같은 시간 귀문과 주검산장 사이의 어딘가.

급히 달리던 마차가 속도를 줄이고 숲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어둠에 모습이 가려지고 이내 그 흔적마저 보이지 않았다.

"다 왔습니다, 태사."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오는 건 명한.

이월의 안내를 따라서 숲을 가로질렀다.

안과 밖이 진법으로 갈라져 있어서 외부에서는 안을 볼 수 없었다.

흑점에서 공들여 마련한 은거촌이었다.

"돌아왔구나."

입구 부근에서 맞이한 건 화무천이었다.

예전과 다르게 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어깨에는 괭이를 짊어지고 있었다.

촌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농부의 모습이었다.

"신수가 훤하니 살만한가 보네."

"하하. 많은 걸 내려놓으니 이리 편한 것도 없더군."

"신선놀음은."

명한이 피식 웃으며 그 앞으로 다가갔다.

소선연을 다시 만나기 전, 죽은 눈의 남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을 살게 하는 건 결국 같은 사람이었다.

‘현대 개념으로는 불륜이었지만, 뭐……’

이래저래 그런 거 따질 시대는 아니었다.

"도련님 오셨군요."

"아. 금화 사태."

이어 아미파의 소선연도 나왔다.

그녀는 명한을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관계도 복잡하고 호칭도 난잡하니 그냥 간단하게 정리한 것이다.

껄끄러운 기색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그녀 역시 은거촌의 생활이 그간의 근심을 씻어준 것이다.

"구검선녀도 안에 계신가요?"

"수련을 위해서 깊이 들어갔어요. 불러올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급한 일은 아니니, 천천히 기다리죠."

아미파 제일 고수인 구검선녀.

방문 목적 중 하나가 그녀이지만, 급히 부를 생각은 없었다.

모난 성격에 괜히 채근했다가는 일만 그르칠 뿐이었다.

"와아! 소백이다, 소백!"

"어디? 어디?"

그때, 은거촌 한쪽이 시끄러워지며 일남일녀가 뛰어나왔다.

다름 아닌 폐위된 황제 도력제를 모시던 호랑과 호릉이었다.

둘은 원숭이처럼 펄쩍펄쩍 뛰어 다가오더니 명한을 앞뒤에서 껴안았다.

"와하하하! 전보다 머리카락이 자랐다!"

"진짜! 이젠 나보다 더 길어!!"

"그래, 나도 반갑다."

명한이 정신없이 돌기 바쁜 두 사람에게 웃음으로 대꾸했다.

은거촌으로 보내기 전에도 활발했던 성격이 지금은 못 말릴 지경이었다.

이 둘을 말리려면 배를 든든하게 채워서 재우거나, 아주 엄한 선생님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놈들! 손님이 오거늘 예의를 차리라고 했지!?"

"히익!"

"장군님이다, 장군님이야!"

만력제를 최측근에서 모시는 전 금의위 장군 군율휘였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던 호릉과 호랑도 군율휘 앞에서는 순한 양이었다.

꼬리를 말고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크흠. 되바라진 것들. 그리 가르쳤건만 아직도 저 모양이군."

"하하. 오랜만입니다, 군 장군."

"음? 아아. 그대였군. 저 원숭이 새끼 같은 것들이 왜 저리 날뛰나 했더니만, 자네가 돌아와서였어. 황상께 진상할 보물은 들고 왔겠지?"

"황상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뭐…… 비슷하다. 전보다 광증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쉬움이 섞인 목소리나 이것으로 명한을 타박하진 않았다.

그도 은거촌에서 치료를 받지 않았다면 도력제가 광증에 삼켜져 지금쯤은 폐인이 되었으리라는 걸 알고 있다.

천하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의, 귀의가 전담으로 치료하고 있었으니까.

"도련님! 아이고, 도련님 오셨군요!!"

양반은 못 되는 인간이다.

귀의가 버선발로 달려와서 명한 앞에 고개를 박았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하던지 군율휘조차 움찔하고 물러날 정도였다.

"언제 오시려나 이 귀의 눈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치료가 만만치 않았나 봐?"

"치료뿐입니까. 그 어린놈의 새끼들하며…… 뭐만 하면 황상을 건드렸다고 역정을 내시는 장군님까지. 여기서 살다가는 제가 제명에 못 죽습니다."

"귀의가 고생이 많네."

"그걸 아신다면 이번에는 절 좀 마을 밖으로……"

귀의가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신교 제일의 명의로 온갖 대접을 다 받고 살던 삶에 비해서 은거촌의 생활은 너무 팍팍했다.

정상적인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안 그래도 향후 일정에 관해서 얘기하려고 왔어."

달라붙은 귀의를 살짝 떼어내며 명한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은거촌을 만들고 화무천 등을 한곳에 몰아놓은 건 단순하게 그들을 핵심에서 떼어놓기 위함이 아니다.

상정 외의 전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긴 얘기가 될 거야."

그 어느 때보다.

명한의 눈이 반짝였다.

#

신교, 천마각.

중원의 패자이자, 천하제일인 천마가 기거하는 장소.

선택받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들어올 수 없는 이 공간에 이례적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그 면면은 세간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수준.

신교의 기둥이라 불리는 팔반의 인물부터, 핵심 무력대의 대장.

이름 높은 고수와 중책을 짊어진 요원까지.

그야말로 신교의 핵심이라 할만한 이들이 전부 이곳에 있었다.

"이렇게 되기를 바란 건 아니오, 교주."

정적 속에서 입을 뗀 건 팔반의 인물 중 하나인, 사교우.

탁발귀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신교에 몸을 담아온 중임 중 중임이었다.

그가 칼을 거꾸로 잡아 천마의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무엇이 변한 거지, 사교우?"

"때가 되었소. 시작의 봉화가 오르고 멈춰 있던 모래가 흐르기 시작했다오. 신교라는 이름으로 그대와 함께한 시간은 영광이었으나, 본래의 장소로 돌아갈 때가 됐소."

"그대들 모두가 그런 것인가?"

주변을 훑는 시선에 희미한 갈등이 번졌다.

하지만 자리를 옮기거나 선택을 바꾸는 이는 없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신교의 천마를 제거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

"탁발귀는 어디에 있는가?"

그런 분위기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천마는 태연하게 물었다.

"지금 그를 찾을 여유가 있소?"

"신교에 뿌리를 내린 이들 중 책임자는 탁발귀 아니었나? 이런 중요한 일에 그가 빠질 이유는 없고…… 무언가 변고가 생긴 모양이군."

"……"

"훔쳐간 열쇠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나?"

"!"

사교우가 깜짝 놀라 몸을 떨자, 천마가 희미하게 웃었다.

"실수인지 실패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호기라는 건 분명하겠군. 천기가 그 아이를 위해서 흐르는지도 모르겠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너희가 나를 보듯이 나도 너희를 보고 있었다. 이런 무리수를 둔다는 것은 행보에 균열이 생겼다는 의미. 그렇다면 이젠 움직일 때라는 거겠지."

순간.

주변 모든 것이 검게 물들며 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시간도 공간도 의지도.

무엇도 이 검은 침잠에 저항하지 못했다.

"천하삼분이라. 어울려 주지."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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