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화 (158/235)

다음 단계

적막이 내린 숲속을 막군천이 느린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주변에 수행하는 사람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었다.

"이 부근일 텐데."

무언가를 찾는 듯 근처를 계속해서 배회했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인적 없는 장소에서.

무언가 이상한 모습이었다.

"아! 여기로군."

그러기를 향 하나 태울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흙으로 덮여 있는 비밀통로를 발견했다.

정성 들여서 찾지 않으면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은밀한 장소였다.

발로 흙을 걷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비 꼬인 통로의 끝에 사람 두엇이 겨우 들어갈 만한 방이 존재했다.

"늦었군."

"아, 어르신!"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막군천이 머리를 땅에 박았다.

자존심 강한 그로서는 꽤 격한 반응이었다.

"뒤를 쫓는 자는?"

"맹세코 없었습니다. 명왕도에서의 일로 그들은 절 완전히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긴 열쇠를 활성화하기 위한 피를 누구보다 열심히 모았으니, 굳이 그들이 자네를 의심할 이유는 없겠지."

"전부 어르신의 복안 덕분입니다."

막군천은 남궁환을 유도해서 명한 일행과 충돌시킨 이후, 섬을 벗어났다.

싸움을 격화시키고 열쇠를 위한 피만 충분히 제공하면 할 일은 끝이었다.

누구도 그의 존재 여부를 의심하지 않았다.

"후후. 자네의 그 말솜씨는 뱀의 혀임을 알면서도 달콤하단 말이지. 재주가 좋아."

"제가 어찌 어르신께 허언을 하겠습니까. 막천우 그 인간이 아버님을 죽이고 무당파를 탈취한 그 순간에 삶의 목표를 주신 분이 어르신 아닙니까."

"서복에게도 같은 말을 했겠지?"

"어디까지나 속이기 위해서입니다. 제 충정은 오로지 어르신만을 향해 있습니다."

"뭐, 자네의 마음이 어떻든 일을 잘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자, 와서 받아가게."

어둠 속에서 옥잔이 하나 밀려 나왔다.

검붉은 액체가 잔의 끝까지 차 있었다.

냄새는 역한 것이 쉬이 손이 가지 않는 물건이었으나, 막군천은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잔을 받아서 넘겼다.

꿀꺽꿀꺽, 소리조차 컸다.

"크, 크으으……!!"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열기.

막군천이 몸을 웅크려 고통에 몸을 떨었다.

얼핏 독인가 싶을 정도.

하지만 시간이 차츰 지나자 고통은 환희로 바뀌어 갔다.

내공이 끝없이 늘어나고 전신에 활력이 돌았다.

무당파의 그 어떤 영약보다 뛰어난, 터무니없는 효력의 선단이었다.

막군천이 다시 머리를 땅에 박으며 소리쳤다.

"어르신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한 만큼 받아갈 뿐이네. 자네 덕분에 서복 그 아이는 온전한 물건을 얻지 못했어. 천마의 숨겨놓은 칼도 확인했고. 이래저래 소득이 많은 일이었네."

"그럼, 앞으로는 어찌 되는 겁니까?"

"때를 기다릴 뿐이네."

"때라 하심은……?"

어둠 속에서 백색의 연기가 흘러나와 구체 하나를 만들었다.

구체는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돌아, 조금씩 자리를 찾아갔다.

마치 여러 조각이 맞춰져 하나의 구를 이룬 듯한 모습이었다.

"우린 이미 과거에 큰 실수를 범한 적이 있다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잡았으니 만전을 기하는 수밖에. 천지의 기운이 세상의 끝에 모이고 모든 의지와 생각이 한 점에서 충돌하는 날이 올 거네. 그때가 하늘의 문을 여는 시간이겠지."

"하늘의 문을…… 천지개벽의 날이라는 겁니까?"

"후후. 자네에게 이를 말로 이해시키기는 참으로 어렵구만. 편하게 천지개벽이라 생각하고 싶다면 그리하게나."

"소인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하하. 자네같이 용을 꿈꾸는 자가 어찌 개와 말이 되겠는가. 욕망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가장 인간답게 발버둥을 치게나. 그저, 내 눈만 벗어나지 않으면 그만이네."

막군천이 순간 말을 잃고 마른 침을 삼켰다.

말은 평온하고 그 내용 또한 너그러웠지만, 왠지 모를 소름이 전신에 퍼졌다.

아주 짧은 순간, 범해서는 안 될 역린을 본 기분이었다.

머리를 땅에 박고 그저 숨죽여 다음을 기다렸다.

"……후후. 조금 예전 일이 생각났던 모양이네. 그만 고개를 들게."

"네, 네. 어르신의 명을 받듭니다."

겨우 풀린 긴장감에 숨이 터져 나왔다.

"그럼, 자네에게 한 가지 더 할 일을 주겠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네. 구르기 시작한 돌을 가볍게 밀어주는 거라고 해야 할까."

원을 형성했던 흰 연기가 이번에는 글자로 변해서 허공에 새겨졌다.

막군천이 한 자 한 자 눈에 불을 켜고 바라봤다.

그리고 모든 글자가 새겨져서 문장이 완성됐을 때.

그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이, 이걸……?"

"사소한 일이지. 어렵겠나?"

"아, 아닙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마른침을 삼키는 막군천.

두 눈 가득 새겨진 글자를 마음속 깊은 곳으로 눌러 담았다.

어차피 선택지라는 건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어르신의 말대로 용이 되기 위해서라면……

가장 인간스럽게 탐욕할 뿐이다.

#

명한 일행은 다시 귀문으로 돌아왔다.

무당파로 복귀해야 하는 막천우를 제외하고는 이탈 없이 복귀했다.

수의 변화는 없었지만, 상황은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앉거라."

은휘는 산문에서 명한을 잡아채서 연공실로 끌고 갔다.

대뜸 떨어진 명령에 의아해하면서도 명한은 좌정을 했다.

머리로 툭 떨어진 은휘의 손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수십, 수백 년 이상 누적된 영기였다.

"쯧. 어쩐지 천기가 이상하다 싶더니."

한참을 그렇게 움직이던 은휘가 손을 떼고 물러났다.

명한이 눈을 깜빡이며 답을 재촉했다.

"네놈 몸에 밖의 힘이 덕지덕지 붙어있지 않더냐. 제 것도 아닌 걸 그렇게 기워입고서는 뭐가 좋다고 웃고 있어."

"사부님은 이게 뭔지 아십니까?"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지. 영적으로 한 단계 높은 차원에 이르러 일찍이 난 육체를 버리고 떠났었다. 그럼 뒤에는 내가 어디에 갔었을까?"

"……선계?"

"쯧. 그런 시시껄렁한 곳이 있을 것 같더냐?"

혀 차는 소리에 명한이 뒷머리를 긁었다.

"죽음 이후에 찾아갔어야 할 명계 대신, 나는 이곳의 밖을 봤다. 그건 내가 보고 경험했던 모든 사유 너머의 공간. 애초에 닿아서는 안 될 곳이다."

"그런 곳이 존재한다는 건가요?"

"모든 것에는 굴레가 존재한다. 이건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족쇄가 아니야. 우리라는 존재가 나약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유지되는 것이지. 이를 개인이 넘어선다는 건 존재의 부정과도 같다."

명한은 신이 넘겨준 외경의 힘을 떠올렸다.

분명 이질적인 힘이기는 하지만, 은휘의 말처럼 파괴적인 속성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의아함을 은휘도 눈치챘다.

"쯧쯧. 네가 얻은 건 그저 가루에 불과하다. 겉면을 살짝 긁어서 뿌려준 셈이지. 본질에 닿으면 인간 따위는 감히 견딜 수 없다. 네게 이를 선물한 존재도 아마 부서져 영겁에 휩쓸렸겠지."

"영겁에 휩쓸리게 되는 건가요?"

"이해하기 쉬우라고 말로 풀었을 뿐. 실제로 그게 어떤 건지는 나도 모른다. 살짝 발을 담그고 그 아득함에 도망쳐 나왔으니까."

"사부님이 그럴 정도군요."

"그러니 감히 밖의 힘을 탐하지 마라. 황제든 뭐든 굴레 안에 있을 때야 이해가 성사되는 법. 과욕을 부리면 너와 네 주변의 모든 걸 파멸시키고 말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이렇게 진지한 은휘는 명한으로서도 처음이었다.

감히 아니라고는 답을 할 수 없었다.

"후우. 그럼 됐다. 앞으로 한동안은 새벽마다 이곳으로 나와서 내게 호흡법을 배워라."

"호흡법이요? 갑자기 무슨……?"

"에잉. 네가 익힌 묵혼은 반쪽 아니더냐. 아무리 그래도 하나 있는 제자인데 마뜩하지 않다 싶어서 쓸만한 걸 만들어 봤다. 기식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될 테니 배워라."

"사부님……"

"그런 줄 알았으면 가 봐."

퉁명한 축객령에 명한이 깊이 읍소했다.

세상에 미련이 얼마 없는 은휘가 이렇게까지 신경 썼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누구보다 명한이 가장 잘 안다.

이게 사제 간의 정이라는 걸까.

돌아서는 걸음이 왠지 가벼웠다.

#

며칠간 귀문에서 머무르며 상황을 수습했다.

힘을 얻은 건 명한만이 아니었다.

은소소는 검성의 검을 향아는 야율선에게서 배운 춤이 있었다.

둘 다 불식간에 얻은 힘이라 이를 수습할 시간이 필요했다.

귀문에 엉덩이를 붙이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오랜만에 뵈어요, 태사."

그러기를 며칠.

밖에서 흑점을 움직이고 있던 이월이 찾아왔다.

"요즘 흑점이 많이 바쁘다고 하던데. 네가 고생이 많다."

"다 태사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요, 뭐. 전혀 힘들지 않답니다."

"말도 참 예쁘게 하는군. 그래, 뭔가 변화가 생겼나?"

"네, 태사."

이월이 옷자락을 끌고 명한의 옆에 앉았다.

은은하게 퍼지는 분 냄새에 명한의 코끝이 씰룩거렸다.

"일전에 쫓으라 하셨던 무당의 막군천에 대한 추가 정보를 알아냈어요."

"명왕도에서 빠져나온 뒤로?"

"전후로 행적을 찾아냈어요. 태사께서 예상하신 대로 모종의 집단과 긴밀하게 협력을 하는 거 같더군요. 아마도 그게 혼천이라는 집단이겠죠."

"섬에서 목적을 이루는데 우리가 필요했던 걸까?"

"그것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 묘한 부분이 있었어요."

이월이 손매를 걷어 붓으로 지도 위에 점을 찍었다.

"그간의 행적과 알아낸 정보를 바탕으로 혼천의 행동반경을 추정했어요. 그들도 나름의 기반은 있는지 꽤 규칙적으로 나오더군요. 다만, 여기 몇몇 구역."

"이건…… 행동반경에서 꽤 벗어나 있군."

"처음에는 별도의 접선지인가 싶었는데, 그간의 행적을 교차해서 비교해 보니 답이 나오더군요. 막군천이 이런 돌발행동을 보일 때는 항상 큰 정보가 오갈 때였어요."

"흠?"

"장보도의 소문으로 세력을 움직일 때. 태사의 이야기를 부풀릴 때. 명왕도의 일을 겪고 밖으로 나왔을 때. 모두 별개의 움직임을 보였어요."

"……보고인가."

"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명한이 일정 시기마다 벗어난 점들을 눈으로 훑었다.

생각해 보면 막군천은 명왕도에서도 주도적인 움직임이 없었다.

남궁환을 밀어 넣어 혼란을 부추겼을 뿐, 그 뒤로는 자취를 감췄다.

이건 행동을 주도하는 선봉이라기보다는……

"책사로군. 설마 이 접선지들은 별개의 세력인가?"

"가능해요. 실제로 그는 무당을 떠나서는 혈혈단신이었죠. 여러 세력에 발을 걸쳐 두었어도 이상한 건 아니에요."

"무당의 용이 이중 첩자라니."

기가 막힐 일이지만,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실제 습작에서도 막군천은 무림맹을 움직이며 여러 세력을 이간질 하곤 했다.

천성이 그런 인간이었다.

"그래서 한 가지 더 보고드릴 내용이 있어요."

"더 있다고?"

"막군천의 다음 행선지예요."

지도위의 점이 다른 곳으로 이어졌다.

대부분이 눈에 익은 지역이었다.

"여긴 설마?"

"네. 지금 봉문에 들어갔거나 내부 변고가 생긴 문파들이에요."

혼천의 움직임과 맞물려서 일제히 행동에 들어갔던 문파들.

막군천의 다음 행선지가 이 문파들과 겹친다는 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흑점의 인력을 모아.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 같다."

불안한 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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