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235)

멈출 수 없는 시계

상황이 수습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흩어진 일행을 찾고 서로의 상황을 짜 맞출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해할 수 있는 결론이 나왔다.

"이걸 회수하려고 혼천이라는 놈들이 왔다는 거지?"

"확실해. 나와 싸웠던 놈은 신교 팔반의 수장. 혼천에서 박아둔 첩자 중에서도 가장 윗선일 거야. 이 물건을 회수하기 위해서 직접 왔던 거겠지."

"근데, 그런 거라면 왜 그냥 두고 간 거지?"

"……그건 모르겠어."

셋으로 나뉜 일행 중 목함을 회수한 것은 은소소가 있던 곳이 유일하다.

나머지 곳은 돌아가 확인해도 목함을 찾을 수 없었다.

"피와 흔적을 볼 때 다른 누군가 개입한 것 같은데. 본래 이곳을 지키던 이들이 있다고 하니, 그들이 도운 것 아닌가?"

막천우의 질문에도 쉽사리 끄덕이기 어려웠다.

도움 자체는 이해해도 목함을 남기고 간 건 여전히 의문이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이 목함이 맞다면, 이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일.

"그 여자가 도움을 준 건가?"

"그 여자?"

"붉은 가면을 쓴 여자가 있었어. 혼천의 무리임에도 날 죽이지 않고 도와줬지. 다른 목적을 가진 채 혼천에 잠입한 사람 같았어. 가능성이 있다면 그 여자가 아닐까?"

"혼천이면서 같은 혼천을 공격한 다음에 목함은 두고 갔다고?"

"……어렵네."

단락적인 상황은 이해가 되어도, 전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명한이 이마 주름을 깊이 새기다,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서 계속 고민하는 건 의미가 없겠어. 일단은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고, 돌아가자."

"또 괴상한 것들이 들러붙는 건 아니겠지?"

"아니. 깨어나고 난 뒤부터 느낀 건데…… 더 이상 이곳에서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아. 겹쳐 있던 세계가 다시금 분리된 느낌이야."

"그럼 역시 이 목함 때문에?"

"응. 상황을 되짚어 보자면 이 목함 안의 물건은 황제의 심장. 그것도 셋으로 나뉜 심장의 일부지. 셋 모두가 모여있었을 때는 그 자체로 죽음과 현생을 이어붙일 정도로 강력한 존재였던 거야."

"그게 가능한 일인가?"

"선뜻 이해는 안 되지만 다른 설명은 없어."

명한은 자신이 봤던 ‘신’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 어느 것도 상식이라는 선으로 재단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움직이자."

지금은 그저 나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

일행이 길을 찾아 해변으로 나왔을 때.

그들을 반긴 건 엄청난 숫자의 무인과 맞서고 있는 무당파 사람들이었다.

해변에 돛을 내린 배만 해도 수십 척이 넘었다.

후발주자로 찾아온 이들이었다.

"크하하하! 검성의 무공은 우리가 접수하겠다!"

"무당파의 위세가 좋다 해도 이 숫자 앞에서는 장사 없는 법! 순순히 검성의 무공을 내어놓고 물러나라!"

한가락 하는 이들이 섞여 있었다.

사파의 거두부터 중도 성향의 거목까지.

거느린 수하를 포함해서 해변 전체를 포위했다.

"이게 지금 무슨 짓들인가!"

"장문인!"

때맞춰 막천우가 뛰어들어가 양쪽 세력 중간에 섰다.

"오호. 그쪽이 무당의 장문인 막천우, 막 대협이구려."

"하하. 나는 소상륵이라고 하오. 보다시피 막돼먹은 놈들을 이끌고 있지."

"크하하하! 오늘 여기서 무당파가 끝장나는 걸 구경할 수 있는 건가?"

"아서라! 누가 감히 그딴 망발을 지껄이는 거냐!"

"뭐? 뭐가 어째?"

난잡하기 짝이 없는 말이 쏟아졌다.

뒤섞인 무리는 검성의 무학을 탐할 뿐, 지도자는 없었다.

중구난방에 오합지졸.

다만, 그 숫자가 많다 보니 위세가 강할 뿐이었다.

"……여긴 내게 맡겨 줘."

"소소?"

그때 앞으로 나선 것은 은소소.

어깨부터 시작해서 검을 쥔 손까지 전부 붕대로 칭칭 동여매고 있는 상태였다.

워낙 상태가 위중한 터라 명한의 약으로도 완치는 무리였다.

그런 만큼 앞으로 나서는 모습에 명한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맡겨 둬. 저들이 탐하는 건 어디까지나 검성의 무학. 그리고 그것을 이어받은 건 바로 나야."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검성의 무학을 이어받은 건 은소소였다.

자신의 입으로 검성을 이어받는다고 말했으니, 철회 같은 건 자존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수백의 사람 앞에 우뚝 섰다.

"너희가 탐하는 검성의 무학은 내게 있다."

"뭐!? 지금 뭐라고 했지!?"

"검성의 무학이 네게 있다고!?"

한마디에 폭발적인 반응이 흘러나왔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에 이미 무기를 꼬나쥐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붕대를 전신에 감고 있는 어린 여자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눈앞의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

"두 번은 없다. 검성의 무학을 탐하는 자. 내게 도전해라."

손목이 부러진 손으로 수도를 만드는 은소소.

검은 아직 쥘 수 없지만, 검이 없어도 그려낼 수 있는 검기는 존재했다.

한참 부족하고, 아직 미진하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한 번 새긴 심상(心狀)은 영혼 깊이 남아 있다.

평생을 쫓아야 할 심검이라는 목표.

"하지만 탐하는 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법. 나, 은소소는 당대의 검성으로 말한다. 목숨을 걸 용기 있는 자만이 내게 도전해라."

수도를 뻗어 해변을 그었다.

심상을 담은 검기가 거리를 불식하고 뻗어 나가 해변을 절단했다.

물이 멎고 파도가 죽었다.

이질적인 정적이 한동안 이어졌다.

"뭐, 뭘 한 거야?"

"방금 그거. 손으로 바다를 가른 거야?"

"웃기지 마. 저런 어린 계집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보는 눈이 있는 이들은 순간의 정적을 이해했다.

강하고 약하고의 개념이 아니라 이질적이었다.

그건 그들의 이해를 너무나 많이 초월한 탓에 상상이 닿지 못한 것이다.

강하면 수로 덮을 수 있으나 불가해는 두렵다.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크, 크윽! 고작 저런 계집 따위에게 겁을 집어먹은 거요!? 나 산동의 파산부 오현이 도전하겠소!"

물론, 그럼에도 나서는 이는 있었다.

용기라기보다는 만용.

도전이라기보다는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

"내 도끼를 받아라, 어린 계집!!"

"저, 저. 자신이 베인 것도 모른단 말인가?"

"무시무시한 검기로군."

도끼를 쥔 채 그대로 절반으로 갈라지는 오현.

자신이 죽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합을 겨루거나 힘을 다투는 것도 아니었다.

"……검성이군."

"허. 검성을 무학을 좇아 이곳까지 왔는데, 검성의 탄생을 보게 된 건가."

"저 어린 나이에 저런 무공이라니. 중원 무림에 신성이 탄생했군."

한 차원 높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기를 집어넣고 승복했다.

아무리 탐욕에 눈이 멀어도 눈앞에서 부나방이 타들어 가는데 뛰어들 생각은 없었다.

무리가 좌우로 갈라지고 길이 열렸다.

그리고 후일.

중원 무림에 소문이 퍼졌다.

검성이 탄생했다고.

#

명왕도를 떠난 배가 내륙으로 돌아오기 전.

명한은 홀로 갑판으로 나와 흘러가는 달을 말없이 바라봤다.

복잡한 생각이 뒤엉켜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

가만히 의식을 침잠하면 내공과 육체 사이로 부유하는 힘이 느껴진다.

적면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외경의 힘.

즉,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의 힘이라는 의미였다.

‘이곳이 아니라면 본래의 세계. 내가 있던 곳의 힘이라도 되는 건가?’

선뜻 와닿는 설명은 아니었다.

하물며 신이 남긴 일기에서 그는 이곳의 흐름과 습작이 맞닿아 있음을 분명하게 말했었다.

그렇다면 습작이 세계를 이룬 것일까, 이뤄진 세계를 습작으로 풀어낸 것일까.

하나부터 열까지 명확한 해답이 없었다.

"넌 대체 내게 뭘 원한 거냐, 신."

예전에는 그저 재미없는 글을 읽어주는 고마운 팬으로.

적적한 생활에 말동무를 해 주는 친구로.

한계 없는 세상으로 보내는 신과 같은 존재로.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맞으며 아니기도 했다.

"어쩌면 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냐?"

일기에서 드러난 것도 그렇고 상념의 파편으로 구성된 방도 그랬다.

신은 명한 자신에게 상당한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단순히 삐뚤어진 애정이라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느낌이었다.

‘언젠가부터 내 글이 보인다고 했지.’

그 전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말.

조금 더 확대하자면 보이는 것이 없었다는 의미.

시간은 확정하기 어려우나, 황제로 존재했던 시기 이후.

아마도 불로불사를 위한 무언가가 이루어지고 난 뒤로 추측이 가능하다.

"불로불사를 위한 어떤 행동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넌 사람도 뭣도 아닌 존재가 됐다. 하지만 의식만은 어떤 곳에 갇혀서 영겁의 세월을 살아왔던 거야. 그러다가 우연히 나와 접촉했고. 우연히라."

그렇다면 왜 습작이 이 세계를 반영하고 있었던 걸까.

왜 수많은 사람 중 자신이 신과 만났던 걸까.

우연이라는 말 하나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후우. 신…… 너는 아직 살아있는 거냐?"

그 방이 상념의 파편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진짜 의식은 어디에 존재할까.

존재하기는 했던 걸까.

명한이 깊은 한숨으로 답답함을 토로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밤하늘 저편으로 말이 흩어졌다.

#

밤색으로 뒤덮인 어딘가의 대전.

늘어진 그림자 사이로 가면을 쓴 이들이 모여있다.

그중 두 사람은 이미 모습을 드러낸 적 있는 흑면과 적면.

나란히 한 개의 목함을 앞에 둔 채 좌정하고 있었다.

"백면은 어찌 된 건가."

침묵 사이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림자 너머 얼굴이 보이지 않는 단상 위의 인물이었다.

"각자 다른 길로 찾아가 물건을 회수하기로 했습니다."

"열쇠를 사용한 이상 시간을 끌 수 없기에 먼저 복귀했습니다."

흑면과 적면의 답이 차례대로 흘러나왔다.

"허면, 백면이 함을 지키던 호법에게 당했다는 건가?"

"열쇠로 문을 열고 난 뒤는 각자의 책임이었기에 저희도 알 길이 없습니다."

"셋 중 둘이나 피해 없이 물건을 회수했는데, 남은 하나를 도울 생각은 없었나?"

살짝 책망 섞인 말에 두 사람의 고개가 깊이 가라앉았다.

다시금 침묵이 내리고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어르신. 싸움이 길어지면 분명 루에서 개입했을 겁니다. 서둘러 빠져나온 두 사람의 판단은 옳았다고 사료되옵니다."

"……황면. 네게 발언을 허락한 적은 없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하지만 백면이 당했다면 남은 두 사람도 그리되지 말란 법은 없었을 터. 무사히 물건을 회수한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적을 깨고 끼어든 것은 황색 가면의 인물이었다.

품이 넓은 옷으로 몸을 가려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근사근한 말투에 단상 위의 인물이 말을 아꼈다.

"좋다. 황면의 말대로 잃은 하나보다는 얻은 둘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지. 허나, 이렇게 넘어가는 건 이번뿐이다. 다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불로불사의 축복이 너희를 떠나게 되리라는 걸 명심해라."

"네, 어르신."

"명심하겠습니다."

깊이 숙인 자세로 읍을 한 뒤 두 사람이 물러났다.

그리고 앞으로 내려 두었던 목함은 손짓 한 번에 단상 위 존재에게 빨려 들어갔다.

딸칵. 함이 열리는 소리가 도드라지게 들려왔다.

표현하기 어려운 힘의 물결이 주변으로 몰아치고……

이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완전히 형태를 지웠다.

"곧이다. 곧 그분께서 부활하신다. 모든 것은 저주받은 하늘의 이치를 깨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것. 혼천의 도래가 머지않았다."

깊이 새기는 하나의 선언.

시곗바늘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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