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진실
신교의 탁발귀라는 신분은 아직 숨겨야 한다.
깨진 가면을 손으로 움켜쥐며, 탁발귀가 이를 갈았다.
반절도 안 산 어린 계집에게 당했다는 것은 지독한 치욕.
거친 숨에서 감정이 섞여서 나왔다.
"네놈이 신교의 배신자였구나!"
"닥쳐라, 어린 계집! 너 따위는 아무것도 모른다!"
"흥. 배신자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한결같지. 오늘 이곳에서 신교의 소궁주로서 역할을 다하겠다."
"건방진 년!"
분노한 탁발귀의 검이 노도와 같이 움직였다.
일검 일검에 실린 감정이 지독할 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강렬함은 정제되지 않았다는 의미.
풍랑이 거칠수록 수면 아래의 용은 더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다.
퍼엉―!
무겁게 누른 검에 일격이 엇나가 벽을 쳤다.
바위가 무너지고 노도에 흐름이 멎었다.
은소소는 촌각의 망설임도 없이 탁발귀의 거리 안으로 파고들어 검을 휘둘렀다.
군더더기 없는 일격.
가슴부터 어깨까지 이어지는 상처가 쩍 벌어지며 피를 뱉었다.
붉게 물드는 앞섬에 탁발귀의 얼굴이 나찰처럼 일그러지고 뽑았던 검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흥분하고 있군.’ 위력이 늘수록 생기는 건 기회.
은소소는 자연스럽게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고 검을 회전시켰다.
흐트러짐 없이 이어지는 검세는 탁발귀의 등을 베고 지나갔다.
손끝에 남은 감각은 상당한 깊이.
근육이 잘리고 신경이 절단되는 수준이었다.
이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그녀는 그렇게 정의 내렸다.
"……!"
하지만 탁발귀는 상처 따위는 없다는 듯 반격했다.
코앞을 스치는 검에 은소소의 얼굴이 굳고, 이어지던 검세도 멈췄다.
"감히 네년 따위에게 낭비해도 좋을 힘이 아니다!"
"너. 대체 뭐냐?"
부글거리며 재생되고 있는 탁발귀의 상처.
단절된 신경이 이어지고 근육이 달라붙어서 흔적도 없이 치유됐다.
피의 흔적과 찢긴 옷자락이 아니라면 아예 상처 입지 않은 듯한 모습.
이건 인간이 보일 수 있는 회복력이 아니었다.
"신교 따위의 시시한 조직에 전부를 바친 너 같은 하찮은 계집 따위가 알 수 없는 힘이다. 불로불사. 완전하고 영구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의 가치. 무림이라는 세계는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지배받게 될 것이다."
"과대망상이 심하군."
"큭큭. 너 같은 계집이 어찌 알까. 그 위대한 힘을. 상리를 벗어난 압도적인 강함을. 그 편린이나마 보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탁발귀는 상처를 치료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몸이 천천히 부풀더니 골격과 근육의 형태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키는 구척을 훌쩍 넘고 팔과 다리의 근육은 이미 인간의 수준이 아니었다.
단련으로 얻을 수 있는 한계점 이상이었다.
"이것이 인간을 초월한 신계의 힘이다!"
지면이 폭발하는 것과 동시에 탁발귀가 은소소 바로 앞에 당도해 있었다.
반응이 거의 불가능한 속도였다.
은소소는 황급히 몸을 비틀어 범위 밖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어깨가 닿은 후였다.
"아아악!!"
둔탁한 통증과 함께 몸이 공깃돌처럼 날아갔다.
바닥을 굴러 벽에 충돌하고 여력이 남아서 구석까지 미끄러졌다.
어깨는 완전히 부서져서 산산조각이 나, 뼈가 근육 밖으로 튀어나왔다.
회복하더라도 다시 검을 쥘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
탁발귀는 일격으로 멈추지 않고 다시 은소소를 공격했다.
"크아악!!"
그나마 멀쩡한 손으로 검을 휘두르는 은소소.
공격의 방향을 비틀어 치명타는 피했으나, 손목이 그대로 부러졌다.
내공으로 몸을 보호해도 단순한 파괴력이 그것을 상회했다.
이젠 남은 수단이 없었다.
‘여기서 이렇게 죽는다고?’
무공도 뭣도 아닌 저런 공격에.
은소소가 양팔을 늘어뜨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바라던 모습이 아니다.
"큭큭큭. 이제 저항할 힘이 없어진 건가? 네년 따위에게 이 힘을 낭비한 것이 아깝지만, 그 비참한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 주마."
"닥쳐. 어디서 운 좋게 힘 하나를 주웠다고 그것이 네 역량인 것처럼 지껄이지 마. 그 힘에는 네 노력도 정성도 마음도 깃들지 않았다."
"크하하하! 그게 뭐 어때서!? 천 번, 만 번 검을 휘둘러야 그게 힘인가? 사자는 태어나서부터 강자야! 사슴에게 왜 노력하지 않았냐고 물어볼 셈이냐? 어차피 강한 놈은 그저 강할 뿐이다! 그게 이 세상의 이치야! 나는…… 우리는 그 이치를 손에 넣은 것이다."
"멍청한 새끼. 승냥이 따위가 털 쪼가리를 주웠다고 사자가 될 것 같나? 넌 발버둥 쳐봐야 결국 승냥이에 불과해."
"……건방진 년. 곧 죽어도 입은 살아있군. 사지가 도륙된 이후에도 계속 그렇게 건방질 수 있는지 지켜봐 주마."
다시금 힘을 모으는 탁발귀.
‘이번 공격은 피할 수 없어.’
양팔은 망가졌고 검은 손에 없다.
피할 방법도 막을 방법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포기라는 선택지만이 눈앞에 존재할 뿐이었다.
"아니."
그건 받아들일 수 없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렇게는 안 된다.
‘나는 광검이다.’
검이 없다면 검을 만들면 그만.
입으로 소매를 당겨서 손목이 부러진 팔을 곧추세웠다.
천 번, 만 번 휘둘렀던 검이다.
손에 쥐지 않았다고 그 흔적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죽어!!"
달려드는 탁발귀.
그의 몸동작, 땅을 딛는 발, 부서지는 돌, 일그러지는 대기.
모든 것이 아주 느리고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것은 죽기 전의 주마등인가.
아니.
이건 탁발귀의 ‘행동’보다 자신의 ‘마음’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검이 존재하는 이유는 베기 위해서.
벤다는 의식이 끝없이 팽창하여 모든 행동보다 앞서기 시작했다.
모든 육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은 결국 마음.
마음에서 일어난 검이 현상보다 먼저 움직이는 것이다.
무림에서는 이것을 일컬어 이렇게 부른다.
[심검(心劍)]
서걱――!
"컥!?"
멈춰있던 시곗바늘이 다시 돌아가듯.
탁발귀가 은소소를 지나쳐서 벽 언저리에 멈췄다.
있어야 할 충돌이나 파괴의 흔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한.
그리고 아릿한 통증만이 그 위로 느껴질 뿐이었다.
왜? 라는 의문이 머리에서 피어나는 순간.
툭.
탁발귀의 오른팔이 잘려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뭐어어어!?"
솟구치는 피 분수.
당황과 고통에 탁발귀가 몸부림쳤다.
자신의 팔이 왜 잘린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웃기지 마!! 네깟 계집이 날 무슨 수로 베었다는 거냐!?"
"……"
"은소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은소소는 하나의 검을 쏟아내고 난 뒤 그대로 기절했기 때문이다.
심검이라는 건 아직 닿기에는 요원한 경지.
일생일대의 순간에서 모든 걸 동원하여 그 검을 뽑아냈지만, 아쉽게도 완벽할 수는 없었다.
힘이 다한 그녀는 선 채로 기절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탁발귀는 더욱 분노했다.
"그아아아!! 네년이…… 네년이 나에게 이런 굴욕감을 주는 거냐!!"
실력도 경험도.
모든 것에서 부족하다 여겨진 어린 계집에게 당한 일격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부정한 지고한 경지에 의한 일격.
모든 행동과 의지를 정면에서 반박당한 기분이었다.
"죽인다. 갈가리 찢어서 죽이겠다."
남은 선택지는 그것뿐.
그것만이 지금의 울분과 화를 잊게 할 수단이었다.
"아니. 그건 곤란해."
"……! 적면!?"
하지만 그 순간.
어디선가 모습을 나타내는 적면.
땅에 발을 딛는 것과 동시에 은색의 실을 사방으로 뻗어서 탁발귀를 휘감았다.
극심한 부상에 허덕이는 그로서는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뭐 하는 짓이냐, 적면!?"
"기회가 있을 때 하나라도 손을 잘라두는 편이 좋겠지."
"감히!! 그분을 배신하는 거냐, 적면!?"
"배신이 아니야, 탁발귀. 애초에 난 너희 편이 아니었거든."
몸을 동여맨 실이 급속도로 탁발귀의 몸을 파고들었다.
철도 부술 만큼 강해진 그의 육신이었으나, 이 실은 그보다도 예리했다.
순식간에 전신이 난도질당하며 피와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크, 크아아아아!! 적면! 적면!! 네가 감히!!"
"얌전히 죽어. 이 난잡한 판세에 이 아이들만큼 확실한 변수도 없다. 너같이 너저분한 놈에게 죽어도 좋을 아이들이 아니야."
"이…… 이이! 배신자!! 서복께서 네년을 처단하실 거다!"
"넌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뭐!?"
"그냥 그대로 죽어."
적면은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분노와 고통. 의아함으로 가득 찬 탁발귀의 몸을 은사로 휘감아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지독한 소리와 함께 사람이었던 형태가 완전히 박살 났다.
"어리석은 놈. 불로불사 따위에 목을 매니 이렇게 되는 거다."
적면은 피 웅덩이에서 적은 돌조각 하나를 주워 품에 넣었다.
모든 것이 으깨진 이 상황에서도 펄떡이는 생명력을 품고 있는 조각이었다.
진정하라는 듯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은 뒤, 기절해 있는 은소소를 바라봤다.
"……이걸로 의리는 지켰다, 천마."
흘리듯 말을 던지고 사라지는 적면.
이내, 고요함이 그 위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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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되지 않는군."
고요함 위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던 신기자와 구문자였다.
두 사람은 피범벅이 된 현장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적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나?"
"아뇨. 흑과 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적면은 예상외입니다."
"사부님이 심어둔 사람일까?"
"그럴 가능성은 낮습니다. 비장의 수를 저희에게 숨겨둘 이유가 없지요."
두 사람 모두 적면에 대한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모르겠군. 모든 게 이상해. 이번 일에 다른 사형제들은 모두 접촉을 금하면서 우리에게는 황제진경을 회수하게끔 한 것부터……"
"사부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건가요?"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
신기자가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이번 일에 앞서서 상정해 두었던 것과 실제 상황은 많이 달랐다.
첫 번째로, 명왕도를 지키고 있던 사형제들.
그들은 불로불사에 대한 욕망 때문에 환상루를 저버리고 이 섬을 독점했다.
하지만 빼돌린 열쇠를 결국 강유가 보관하고 있었고, 욕망 때문에 섬을 지킨다고 하기에는 최후는 너무 비장했다.
하물며 과거로부터 황제의 심장을 지키던 두 사람은 어떠한가.
알고 있던 것과는 너무나 많은 것이 달랐다.
"사형께서는 열쇠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까?"
"오래전에 거래가 있었다는 것 정도."
"하필 왜 강유 공자였을까요?"
"……"
일월교를 배신하고 신교에 붙은 가문.
동시에 환상루를 등지고 나온 구문자가 배후에 있는 집단.
말하자면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제3의 영역이었다.
"사부님은 우리가 이걸 직접 보기를 원한 걸까요?"
"천기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분이시니 아마도 그렇겠지."
"무슨 의도로……?"
"글쎄. 사부님의 생각을 우리가 읽을 재주는 없겠지. 단순히 판세를 보라는 의도일지도 아니면……"
"아니면?"
"경고일지도."
지키던 모든 이들이 죽었다.
환상루의 사형제도 황제를 모시던 좌우호법도.
언제든지 어떤 방식이든지 죽을 수 있다는 의미.
"누군가 접근하고 있다."
"……음. 소백이군요."
이야기는 거기서 멈췄다.
관찰자가 아닌 주인공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
두 사람은 미진한 해답만을 가슴에 품은 채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