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155/235)

검성의 검

검성의 검은 함축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수백, 수천의 변화보다는 하나의 검.

강하게 두드리기보다는 간결한 일격.

깊이 찌르기보다는 단순한 공격.

검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방식을 최대한 압축해서 펼치는 것에 핵심이 있었다.

‘지금껏 익힌 검은 모두 잊어.’

이를 위해서는 형(形)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틀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검.

그렇기에 모든 걸 담을 수 있는 폭넓은 검이 된다.

"잔생각이 많군."

"……!"

사고의 틈새로 백면의 검이 찔러 들어왔다.

막는 것은 불가능.

발끝으로 땅을 차며 물러났다.

찢어지는 앞섬 사이로 번쩍이는 눈이 보였다.

발이 땅을 딛는 소리가 들리고, 검의 궤적이 변했다.

어깨 언저리. 검으로 땅을 찍으며 공세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아릿하게 이어지는 고통은 어깨의 상흔.

모든 수의 반응이 백면보다 반걸음 늦었다.

"후후. 즐거운 발버둥이군."

농락의 기조다.

놈은 초대 검성과의 싸움에서 손해를 입었음에도 힘을 아끼고 있다.

그런 상태로도 자신쯤은 손쉽게 이긴다는 자신감의 발로.

화가 나고 짜증이 치솟았다.

‘나는 은소소다.’

광검, 은소소.

치익―!

검을 어깨로 받으며 간격을 좁혔다.

상처가 깊어 고통이 심하지만, 견뎌야 한다.

치욕은 몸의 상처보다 깊은 것.

검의 손잡이로 백면의 몸통을 밀치고 떨어지는 거리만큼 휘둘렀다.

백면의 가슴 앞으로 스치는 검.

‘조금 더 간결하게.’

손에 익은 초식이 형태를 만들어 속도를 늦췄다.

평생을 갈고닦은 초식이지만, 지금은 덜어내야 한다.

잊고 지워서 가장 기본만 남긴다.

그것이 검성의 검.

"……음?"

짧은 경탄성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검.

맞물린 검격에 불꽃이 튀고 서로의 방향이 엇갈렸다.

휘두르기 위한 간격은 서로에게 없다.

하지만 형태가 없다면 굳이 휘두름에 구애받은 이유도 없는 법.

검을 놓고 손으로 백면의 몸을 베었다.

놈은 깜짝 놀라 뒤로 풀쩍 뛰었다.

"검이 없어?"

맨손에 아무런 기운도 두르지 않았음에도 백면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만큼 은소소의 검격이 자연스러웠다.

놓았던 검을 다시 쥐고 멀어진 백면을 향해서 휘둘렀다.

닿지 않을 거리임에도 옷자락이 잘렸다.

검기도 검강도 어떤 기운도 섞이지 않은 검격에.

백면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말 시키지 마. 슬슬 감이 잡히고 있으니까."

입술을 혀끝으로 핥으며 은소소가 검을 고쳐 쥐었다.

엄청난 기운을 두르거나 쏟아붓지 않음에도 그 어떤 때보다 고양감이 높았다.

지금이야말로 검과 하나 된 기분이었다.

"살려둬서는 안 되겠군."

일순간에 분위기가 바뀌는 백면.

더 이상은 놀이가 아니었다.

죽거나 죽이거나.

생사의 기로였다.

#

야율선이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고요함으로 가득 찬 공간 안에 잔을 부딪침만이 유일한 소리였다.

옷자락을 끌러 자세를 고치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적막에 놓인 공간 위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이 기운은 강씨 일가의 것이군요."

"강유옥이라 하옵니다.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천녀."

"후후. 그 이름을 알고 계신 분은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앉으시죠. 차를 올리겠습니다."

"아뇨. 감히 저는 받을 수 없습니다."

차를 청하는 손길에 강유옥은 고개를 저었다.

"나름의 목적이 있어 이 길을 걷고 있으나, 염치는 있습니다. 제가 어찌 천녀의 차를 받겠습니까."

"염치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 그런 걸 따지는 이가 몇이나 될까요. 어차피 세상 속의 먼지와 같은 이들. 차 한잔을 주고받는다고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천녀의 호의를 받겠습니다."

거듭된 청에 강유옥이 소리 없이 다가가 앉았다.

그의 모습은 경건하고 태도와 손짓 모두 정성이 가득했다.

오래전부터 황제를 곁에서 지켰던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잠자리 동화와 같은 수준.

존경심은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이었다.

"입에 맞을는지 모르겠네요. 이곳은 속세와는 많은 것이 다른 터라."

"제가 감히 어찌 품평을 하겠습니까. 영광으로 알고 마시겠습니다."

"딱딱하기는. 그래서야 원하는 것을 얻기까지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각오하고 있을 뿐입니다."

야율선은 강유옥을 바라보며 찻잔을 채웠다.

찰랑거리는 찻물에 서로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바뀌는데, 이상하게도 우린 주변만 그대로군요."

"탐하는 것이 세상 밖에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요."

"어쩌면 처음부터 탐하지 말아야 할 것을 탐했는지도 모르겠군요."

"후회하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너무 긴 세월이라. 그 말이 맞군요."

찻물에 비친 야율선의 볼이 갈라져 있었다.

시간을 빗겨나가게 해 주는 공간의 힘이 사라지며 눌러 두었던 세월이 다시금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야속함보다는 후련함이.

그리고 두고 가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저 아이는 천녀께서 거두신 겁니까?"

강유옥은 석실 뒤편에 잠들어 있는 향아를 눈짓으로 물었다.

대화가 오감에도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연이 닿았으니 작은 재주를 전할 뿐이지요. 이 세상에 작은 흔적이나마 남기고자 하는 것이니 너무 박하게 보지 마시기를."

"천녀의 의사를 존중하여 저 아이는 무사히 돌려보내겠습니다."

"후후.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야율선이 옷자락을 잡고 크게 예의를 차렸다.

깜짝 놀란 강유옥이 자세를 바로 하자, 입을 가리며 소리 죽여 웃기도 했다.

어딘가 소녀다운, 생기 가득한 모습이었다.

"……천녀께서는 모든 미련을 거두신 겁니까?"

"한평생 폐하를 모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리되신 이후로도 계속. 하지만 이젠 그만할 때가 아닌가 싶군요. 지극한 마음으로 바란 것이 언제나 옳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 이제는 알 것도 같습니다."

"이해했습니다."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야율선이 품 넓은 소매를 길게 펼치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함(木函).

아무런 무늬도 색도 입히지 않은 물건이었다.

"그 안에 있는 겁니까?"

"네. 그네들이 회수한 폐하의 육편(肉片)이 아닌…… 생명을 담고 있던 심장의 일부입니다."

"황제의 심장."

강유옥이 떨리는 손으로 목함을 받아 들었다.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대업에 한발 다가간 것이다.

그 모습을 야율선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 가지. 그대에게 충고를 해도 괜찮을까요?"

"경청하겠습니다."

"삶과 죽음은 이 세상의 근원입니다. 이를 거스르는 건 축복도 행운도 아닌, 저주에 불과하죠. 그 사실을 그대는 부디 일찍 깨닫기를 바랍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멈출 수 없습니다."

"아아. 정(情)이라. 애달프구나, 애달파."

파스스……

야율선의 몸이 조금씩 부서져 먼지로 변해갔다.

영겁의 시간 동안 맡은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던 이의 최후였다.

강유옥은 말없이 그 모습을 응시하고는 큰절을 올렸다.

적어도 이것이 한때 흠모하던 자에 대한 예의였다.

"부디 내세에서는 평안하시기를."

더 없는 진심이었다.

#

검과 검이 부딪치며 굉음을 쏟아냈다.

붙고 떨어지고 밀고 밀리고.

순식간에 수십 합이 지나갔다.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팽팽한 싸움이었다.

"이 계집이 정말로 검성의 진전을 이었군."

"왜? 이제보니 검성이라고 칭하고 다닌 것이 부끄럽기라도 한 건가?"

"헛소리. 잠깐 배운 재주로 감히 나와 견줄 생각인가?"

"뭐…… 생각보다 어렵진 않은데?"

백면의 입술이 비틀렸다.

아무리 초대 검성과의 싸움에서 손해를 입었다고는 해도 상대는 손녀뻘.

아니, 그보다도 훨씬 안 되는 어린 무인이다.

자존심에 금이 가고 치욕에 피가 끓었다.

"혹시나 황제의 육체가 손상될까 봐 힘을 조절했었는데…… 이젠 안 되겠어."

"……!!"

갑자기 가속하며 검을 뿌리는 백면.

은소소가 검으로 궤적을 비틀어서 튕겨 냈음에도 그 여력에 몸이 밀려났다.

속도에 무거움까지 섞인 일격이었다.

앞선 공격도 대단했지만, 이건 한 차원 위였다.

"고작 너 같은 계집에게 신기를 쓸 줄은 몰랐다."

"……수응?"

일월신교에서 나온 신기 중 하나인 수응이었다.

‘그러고 보니 검성이 수응 출신이라고 했지?’

이렇게 보면 신기자가 거짓 정보를 준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사실이 지금 상황에 반갑지 않을 뿐.

"본래라면 너희 같은 잔챙이들과 드잡이질 할 필요는 없겠지만, 방해될 잡초라면 미리 밟아두는 편이 낫겠지."

"그딴 소리는 날 제압하고 난 뒤에나 하시지."

"건방진 계집. 예전부터 네년이 마음에 안 들긴 했어."

"……예전부터?"

마지막 말에 은소소가 반응하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검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도 반사적으로 궤적을 비틀었기 때문에 그나마 상처가 얕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상체가 반으로 갈라질 뻔했다.

‘제법.’ 하지만 공격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치 바다 위에서 몰아치는 파도처럼.

백면의 검이 쉼 없이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산의 무게를 실은 벼락이었다.

은소소의 몸이 계속해서 뒤로 밀려났다.

쾅! 쾅! 쾅―!!

"……쿨럭."

속도를 따라잡는 건 형을 없앤 깔끔한 검세.

기본적인 능력이 부족한 은소소이나 검성의 기예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이를 어떻게든 따라잡게는 만들어 주었다.

문제는 힘.

엄청난 속도를 내는 검격을 쓰면서도 백면의 검은 지나치게 무거웠다.

일격 일격이 산을 받아내는 것 같아, 내장이 흔들리고 기식이 어지러워졌다.

숨을 쉴 수 없는 압력이었다.

"흥. 발버둥 쳐 봐도 여기까지군."

검을 고쳐 쥐는 백면.

다음 공세를 위한 숨 고르기였다.

그리고 은소소는 다음 공세를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관건은 무거움.

신기를 빌린 백면의 중검이었다.

― 풍랑의 무거움은 바다 표면에서만 힘을 발휘한다.

"……!"

순간, 어디선가 낯선 전음이 들려왔다.

매우 높은 수준의 기교였다.

눈앞의 백면조차 눈치 못 챌 정도의 실력.

‘누구?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은소소가 전음을 곱씹었다.

"죽어라, 계집."

동시에 백면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무게를 실은 연검이었다.

검과 검이 닿고 힘과 힘이 충돌할 때마다 은소소의 몸이 들썩거렸다.

아무리 용을 써도 견딜 수 없는 위력이었다.

‘풍랑. 바닷속. 그래, 그거야!’

이해의 순간은 그야말로 찰나.

"가라앉자."

연격의 흐름 사이로 착(着)의 요령으로 달라붙었다.

속도를 낮추고 힘을 연속된 상황이 아닌, 한 지점에서 받았다.

단순한 힘 대결이면 밀려야 정상.

하지만 은소소의 검은 백면의 검에 밀리지 않았다.

"너, 너! 대체 무슨 수로!?"

"연속된 공격에서 무게를 더하는 거로군."

신기, 수응이 가진 힘의 속성이었다.

공격이 가중될수록 그 힘이 늘어나서 버틸 수 없게 만드는 능력.

그렇다면 공격이 가중되기 전에 심해로 끌어들이면 그만이다.

표면이 아닌 깊은 곳에서는 풍랑이 몰아칠 수 없으니까.

"감히 네깟 년이!"

틈.

분노한 백면의 자세가 틀어지고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였다.

은소소는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검을 비틀어 그 틈으로 쑤셔 넣었다.

맞물리던 힘은 되레 그녀 쪽으로 쏠려서 무겁고 강한 일격을 만들어 주었다.

"크아아악!!"

백면의 오른쪽 눈을 검이 파고들었다.

가면이 깨어지며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탁발귀!?"

그리고 드러난 얼굴.

악귀나찰의 표정을 한, 팔반의 수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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