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러진 마음을 잡고
명한은 적의 실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수준 높은 고수임은 확실하나, 기도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감지능력을 생각하면 이건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
"생각만 할 셈이냐?"
바닥을 타고 은색 실이 살아있는 생명처럼 솟구쳤다.
옆구리에 긴 상처를 남기고 석실 상부를 파괴.
그대로 돌을 잘라 바닥으로 쏟아냈다.
낙석에 깔릴 수는 없으니 명한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사이, 다시 실이 움직였다.
낙석과 낙석 사이의 틈을 뱀처럼 유영했다.
그 유려함과 속도가 엄청나서 명한은 완벽하게 피할 수 없었다.
어깨와 목 언저리가 찢어졌다.
"그렇게 피만 흘리다가는 죽고 말 텐데?"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압니다."
상처를 손으로 지혈하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 동시에 움찔하는 명한.
기존에 운용하던 내공의 감각과 달랐다.
전이 깊이 있는 잔잔한 호수라면 이건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의식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치익―!!
그사이 실이 뺨을 스쳤다.
벌어지는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고통이 물감처럼 번졌다.
‘정신 차려.’
상대는 손속에 여유를 두는 연습 상대가 아니다.
당장 목을 앗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적.
입술을 씹고 요동치는 내공을 찍어 눌렀다.
쿠르르릉.
묵직한 충격이 발을 중심으로 뻗어 나갔다.
안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이어지는 내공의 순환이 물리적인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건 단순하게 ‘내공이 늘었다.’라고 표현할 수준이 아니었다.
"외경의 힘을 다루기 시작했군."
"외경?"
"체득해라. 못 하면 죽음뿐이다."
실이 다시 뱀처럼 날아왔다.
명한은 몸의 변화를 제어하기에 앞서 반사적으로 허리를 눕혔다.
어깨를 지나 등 쪽으로 지나가는 흐름이 느껴졌다.
호수 위에 새겨지는 오리의 흔적과 같았다.
안과 밖의 경계를 떠나서 주변의 흐름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안과 밖의 의미가 없어?’
인간의 틀 안으로 묶어 두는 자연의 기운이 내공.
하지만 명한은 지금 그런 경계가 없이 힘의 흔적을 읽었다.
현경에 다다르며 몸 밖의 기운을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밖의 힘."
몸 안과 밖의 문제가 아닌, 세상을 나누는 안과 밖의 문제였다.
이미 명한은 같은 경험이 있지 않은가.
명한과 소백의 차이.
즉, 외경이라는 것은 이곳에 속하지 않은 밖의 이야기.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모든 것이 더 선명해지는 이치와 같았다.
‘신이 내게 남겨준 그 가루는 이곳의 힘이 아니야.’
선도로 치자면 선계의 힘.
핑―!
명한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서 은색의 실을 움켜쥐었다.
바위도 자르는 날카로운 무기임에도 그의 손바닥은 멀쩡했다.
희미하게 손바닥 위로 덮인 기운 때문.
이건 내공이지만, 내공과는 뭔가 달랐다.
"흠. 곧바로 응용하다니. 확실히 적응력은 좋군."
"이게 뭔지 알고 있는 겁니까?"
"말했을 텐데 외경이라고. 현경의 끝에 도달했을 때, 한 단계 높은 세상에 도달할 수 있다. 그곳의 힘을 외경이라 칭한다. 이것이 최초로 그곳에 도달한 사람의 평이다."
"이 힘이 현경 너머의 것이라는 겁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네가 그 경지에 오른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넌 타인에게서 그 힘의 편린을 받은 거에 불과하니까."
명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파도치던 기운이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고요함 속에 섞인 이질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게 외경의 힘."
"남용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어디까지나 받은 것이니, 쓰면 사라질 뿐."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적은 답을 하지 않고 은색 실을 회수했다.
"말해주시죠. 절 죽이지 않고 힘의 수습까지 도와주었다는 건 뭔가 목적이 있어서 아닙니까?"
"착각하지 마라. 널 죽이지 않은 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 네게 어떤 목적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 힘도 마찬가지. 이 방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외경에 대한 지식이 있다. 그러니 도운 것뿐이다."
"이 방의 존재…… 황제 말이군요."
"그건 황제가 아니다. 부서진 마음의 파편. 상념의 조각이라고 해야겠지. 일부라 해도 그 존재가 크기 때문에 감히 접근하지 못했을 뿐. 무덤을 지키는 놈들도 그곳만은 그대로 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적이 손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명한이 무의식중에 도달했던 ‘황제의 방’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애초에 그곳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건 그저 명한에게 반응한 결과였을 뿐이다.
"그럼 왜 절 죽이지 않는 겁니까? 그쪽 무리는 황제를 이용해서 불사를 연구하는 거 아닙니까? 계속해서 방해한 절 내버려 둘 이유가 없을 텐데요."
"생각은 네 역할이다. 황제를 둘러싼 여러 세력은 그 숫자만큼의 생각을 품고 있다. 같은 곳에 있다고 같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그건……"
"여기까지. 나머지는 네가 헤아려라."
무어라 더 묻기도 전.
적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희미하게 남은 힘의 흐름을 명한이 눈으로 좇았지만, 이미 멀어진 후였다.
"머리 아프군."
진심을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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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소소가 정신을 차린 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뻐근할 정도였다.
얼마나 앉아 있었던 걸까.
의문을 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그리고 봤다.
검 한 자루를 바닥에 박아 넣은 채 넝마와 같은 꼴로 서 있는 검수를.
피가 흘러 바닥을 적시고 전신에 상흔이 넘쳐서 멀쩡한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저앉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검성지기. 배웠나."
그는 은소소를 눈치채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단절된 말이지만, 이젠 그녀도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앞으로 돌아갔다.
‘흡……!’ 정면에서 본 검수의 모습은 더욱 처참했다.
두 눈은 파여서 멀었고, 가슴부터 허리 아래까지는 크게 베여 속이 다 엿보였다.
사람이면 회생이 불가능한 상처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다쳤어?"
"침입자. 배제. 내 역할…… 마지막."
"침입자가 있었다고? 누구? 왜 나를 안 깨웠어?"
"소임. 금호장."
"대체 무슨 소리를……!"
은소소의 목소리가 높이 올라가려는 찰나.
검수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바닥에 박아 놓은 검으로 겨우 형태는 유지하나, 이미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왜 그래? 넌 그거잖아. 되살아난 시체. 그럼 안 죽는 거 아니야?"
"……한계. 이것을 위한 삶. 충만."
"잠깐.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하고 죽으면 안 되지. 난 네가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이름…… 잊었다. 누군가 말하기를…… 검성."
"검성? 검성이라고? 당신이 검성이었어!?"
깜짝 놀란 은소소가 검성의 어깨를 쥐었다.
육체가 부서져 먼지로 화하고 있음이 감촉으로 느껴졌다.
"운명. 필연. 검을 이어……지키기를."
"지키다니? 뭘? 내가 뭘 지켜야 한다는 건데."
"……황제 폐하."
"황제!?"
놀라움도 잠시.
검성이 땅에 박을 검을 비틀어 작은 틈을 만들었다.
그것은 석실 아래로 이어지는 숨겨진 통로.
이곳에서 이런 모습이 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을 알려준 것이다.
"부탁. 후예여……"
파스스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끝으로 몸이 완전히 부서졌다.
은소소의 손끝에서 먼지처럼 새어나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검성으로 추앙받던 일대의 기재치고는 허무한 끝이었다.
"……"
은소소는 좀처럼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신이 배운 검의 원류가 검성에게서 시작했다는 것도, 그가 지키는 것이 황제라는 것도.
마지막이 이렇게 허무하다는 것도.
풀지 못한 답답함에 속이 무거웠다.
"이제야 죽은 건가."
"……!!"
그리고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백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한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은소소는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초대 검성이라. 그 이름에 걸맞은 실력이었지. 몸이 온전했으면 나도 쉽지 않았겠어."
"누구냐, 넌."
"이렇게 마주치는 건 처음인가? 내 이름은 백면. 혼천의 얼굴 중 하나를 맡고 있다."
"혼천? 뭐 하는 놈인데 여기서 알짱거리는 거지?"
"후후. 그 드센 성격은 아버지를 닮은 건가? 아니면 천마에게서 배운 건가?"
은소소가 검을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앞으로 튀어나가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건 상대의 기세.
그리고 돌아가는 형국이었다.
‘검성의 상처는 저 인간과 싸우다가 생긴 건가?’
그렇다면 호락호락한 상대가 절대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런 곳에 비전을 숨겨 두었을 줄이야. 여기 남은 건 검성지기의 원류인가? 이래서야 성좌라는 이름으로 흉내 내는 우리 꼴이 우스울 지경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냥…… 선배에 대한 예우라고 할까? 어찌 됐든 내 검의 모태도 결국은 초대 검성에게서 온 거니까."
"뭐?"
"아. 그러고 보니 제대로 설명을 안 했군. 가장 최근까지 활동하던 검성이 바로 나야."
백면이 검을 뻗어 기세를 드러냈다.
살이 예이고 숨이 잘려나갈 것 같은 날카로운 기세였다.
검성이 보이던 것과는 다르지만, 어딘가는 닮은 구석이 분명 있었다.
"이래저래 우리의 기반에는 이들의 공로가 크거든. 정상적인 상태에서 만났더라면 나나 흑면. 아니, 그 적면조차도 상대가 되지 못했을 거야. 완전하지 못한 불사의 한계지."
"불사의 한계라고?"
"네 손에서 스러진 그 인간이 몇 살이라고 생각해? 백? 이백? 하하. 그보다 훨씬 오래된 인간이야. 이미 죽고 사라졌어야 할 인간이 불사의 법에 묶여서 지금까지 견뎌왔던 거지. 다만, 완벽하지 않았을 뿐이야. 그러니 저렇게 한정 공간이 부서지자 간단하게 죽은 거다."
"네가 그를 죽인 건가?"
"굳이 말하자면 열쇠의 힘이지. 이 공간 자체에 깃들어 있는 힘을 열쇠가 상쇄했어. 그 덕에 불사자들은 필멸의 업으로 돌아가게 됐지. 사실 이건 우리가 도와준 거라고. 그들은 불필요한 책무에 영혼이 저당 잡힌 불쌍한 이들이었으니까."
"……"
비웃음 가득한 말에 은소소가 이를 악물었다.
상황은 일 할도 이해되지 않았으나, 마지막 검성의 모습에서 한 가지는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책무를 온당하게 받아들였으며, 그것에 자긍심을 느꼈다.
절대로 영혼이 저당 잡힌 불쌍한 사람이 아니었다.
은소소가 검을 쥐고 몸을 세웠다.
"무슨 소리를 떠드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네가 좋은 놈이 아니라는 건 단번에 이해했다."
"흐응?"
"타인의 긍지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놈은 결코 좋을 수가 없어. 네놈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체가 뭔지 알 수는 없으나, 여기서는 내가 막겠다."
"후후후. 고작 검성지기의 파편을 얻은 애송이 따위가 날 막겠다고? 막천우조차 감히 내 앞에서는 그럴 수 없는데, 네가?"
백면의 기세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당장이라도 목을 베고 영혼을 난도질할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은소소는 검을 쥔 채 물러나지 않았다.
검을 쥐고 맞상대를 해본 사람이라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이해하는 것이 있다.
먼지가 되어 사라진 검성에게서 은소소는 그것을 넘겨받았다.
"당대 검성은 내가 이어받겠어."
물러날 수 없는 긍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