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153/235)

시작의 노래

아주 오래전에 황제를 곁에서 모시던 이들이 있었다.

점과 궤를 두며 길흉화복을 점지하던 천기자.

한 자루의 검으로 황제를 향한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던 금호장.

그리고 춤과 노래.

온갖 재주로 황제의 마음을 달래던 한 여인이 있었다.

"그게 야율 언니라는 건가요?"

"그래. 한때, 황제의 곁에서 세상의 모든 복을 누리던 여자란다. 당시에는 야율선이라는 이름보다는 천녀(天女)라고 불렸었지."

"하지만 언니가 말하는 황제는 아주 오래전 사람이잖아요."

"그래. 그렇지. 아주아주 오래전 사람이란다."

야율선이 조금은 처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욕심이라고 해야 할까. 세상의 끝에서 신선과 같은 삶을 누리던 우리에게는 죽음의 존재가 너무나 불쾌하고 두려운 것이었단다. 죽음 자체를 극복하려고 했지."

"불사…… 말인가요?"

"어리석은 짓이었지. 해서는 안 될 일이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괴물을 만들었단다. 우리 손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거야."

"황제. 황제가 괴물이 되었다는 건가요?"

열리던 입술이 다시 닫혔다.

너무 괴로운 기억이었다.

그 어떤 말로도 그날의 감정은 표현이 불가능했다.

"언니 괴로우면 그만해도 괜찮아요."

"아니. 아니란다. 이 땅에 일월가의 아이가 다시 찾아온 것은 어쩌면 운명.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내 소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일월가의 아이. 저에게도 일월이라고 말씀하셨죠. 그게 대체 뭔가요?"

"향아 동생은 일월교에 대해서 알고 있니?"

"네. 신교의 모태가 되는 집단이라고……"

"신교?"

"네. 일월교가 후에 신교로 바뀌었잖아요. 모르세요?"

"그랬구나. 이젠 일월교마저도 없는 거네."

신교의 탄생은 오래전 일.

야율선은 그마저도 모르고 있었다.

살짝 가라앉은 신색을 수습하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이 언니는 한때 일월교의 호법으로 있었단다."

"호법이요?"

"교주를 보좌하는 좌우호법 중 하나였지. 앞서 말한 금호장이 좌호법. 이 언니가 우호법이었단다."

"높은 자리였네요."

"후후. 자리보다는 하는 일이 중요했지. 천하에 적수가 없다는 금호장이 무예를 나는 금기서화를 통한 예법을 교육했단다. 후인들은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이었지."

"후인이요?"

"바로 너 같은 아이들을 말하는 거야."

야율선의 손끝이 향아의 이마를 쿡 눌렀다.

"일월교는 황제의 핏줄을 잇기 위한 하나의 울타리였어. 그분의 피는 매우 특별해서 선택받은 소수를 제외하면 제대로 발현이 되지 않았거든."

"……그게 저라고요?"

"그래. 널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어. 일월교의 후손은 모두가 독특한 기운을 가지고 있거든. 아마 네 부모. 혹은 조부모 대에서 혈통의 발현이 있었을 거야. 그걸 네가 진하게 물려받은 거고."

"전혀 몰랐어요. 전 고아로 신교에 들어왔거든요."

"그래. 이제는 일월교도 없으니, 그 후손을 제대로 관리하기도 어렵겠구나."

향아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핏줄을 안 건 반가운 일이나, 그 원류가 황제라는 건 복잡한 일이었다.

반갑기보다는 두려웠다.

"후후. 너무 그렇게 어려운 얼굴을 할 필요는 없어. 어떤 피를 이었든 너는 너 자신이니까. 자신을 둘러싼 목적이나 이유 따위에 너무 매몰당하지 마렴."

"……야율 언니는 그랬던 건가요?"

"그래. 그랬지. 황제의 가기. 애첩. 사랑…… 너무 하나를 위해서 매몰되었어. 인간이면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하면서. 내게는 죽음마저 사치일지도 모르지."

"언니?"

"후우. 괜한 궁상이구나. 어쨌든 향아 동생. 일월의 후인이 날 찾아온 건 어떤 인연이야. 그럼 나도 역할을 해야겠지."

야율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향아도 급히 일어나 그 뒤를 쫓는데, 뭔가 알 수 없는 향이 조금씩 짙어졌다.

꽃향기 같기도 하고, 풀잎 냄새 같기도 한 묘한 향이었다.

"그거 아니? 일월교의 무공은 본래 춤에서 시작했다는 거."

향의 중심에 서서 두 팔을 길게 펼친 야율선.

바람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고 향이 색을 가지고 여러 선을 만들었다.

그건 마치 총천연색의 비단과 같았다.

‘아름다워.’ 향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져가렴. 낙일무(落日舞)와 등월무(登月舞)란다."

야율선의 발끝이 땅에서 떠올랐다.

#

어딘가. 그리고 누구와.

명한은 이것이 기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뿌옇게 흐려진 전경과 희미하게 느껴지는 냄새.

작은 방 안에 모여 있는 3남 1녀의 모습이었다.

"하하. 그대의 충정은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군. 그새 서역 땅까지 다녀왔다는 건가?"

호방한 말투의 한 남자.

붉은색, 허리 아래까지 떨어지는 화려한 복색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흐릿하여 보이지 않았으나, 웃고 있음은 확실했다.

"폐하를 위한 일에 제 노고가 대수겠습니까. 다행히 이번에는 성과가 있었으니, 기대해 주시기를."

이에 허리를 숙여 극진하게 답하는 건 긴 수염의 남자.

말투가 공손하고 어조에 존경심이 가득 배어 있었다.

"저번에도 그리 말하고 실패하지 않았나. 자네가 바라는 이상은 너무 과해. 이 세상에는 이치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네."

"맞아요, 노사. 저 역시 폐하의 영생을 바라 마지않지만, 갈수록 쓰임이 늘어나는 것이 영 불안하답니다."

둘의 대화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끼어들었다.

둘 모두 기골이 빼어나, 흐릿한 모습에서도 용과 봉황의 자태임을 알 수 있었다.

"두 분의 우려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하만민이 폐하의 발밑에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 평화가 천년만년 이어진다면…… 그보다 더 좋은 없을 겁니다."

"그건 우리 모두가 아는 일이네. 걱정하는 건 자네의 수가 갈수록 과해진다는 거야. 자칫 폐하의 명성에 누가 될까 우려되니까 하는 말이네."

"저희라고 어찌 노사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제 심장을 빼서 폐하께 드리고 싶어요. 허나……"

"허허허. 그만들 하게."

살짝 격앙되는 분위기에 상석의 남자가 제지했다.

"셋 모두 날 위해 애써주고 있음을 아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복은 모두 누렸지. 천하가 안정되고 웃음이 끊이질 않으니, 이것이야 말로 천하태평의 시기. 황제가 되어 이보다 기쁜 일도 없을 거네. 그러니 작은 욕심을 부리는 것에 서로가 힐난하지는 않도록 하지."

"네,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명을 받듭니다, 폐하."

셋은 그 한마디에 각축을 그만두고 읍소했다.

의견은 달라도 한 사람에게 충정을 다하는 건 진심이었다.

"자자. 고개를 들고 술들을 자시게나. 동쪽에서 가지고 온 귀한 물건이네."

적어도 이때는 그러했다.

[□□□ □□□□]

명한의 사고(思考)가 깨졌다.

#

세상이 무너지는 광경이었다.

공간을 이루는 형태가, 시간이라 판단되는 어떤 흐름이, 색이 향이 촉감이.

차례대로 무너져서 모든 가치를 잃었다.

아무것도 존재하는 않는 무(無)의 공간이 반겼다.

정신은 이 아득함을 감내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한하게 늘어지는 개념적 시간을 견디는 건 생명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사고가 부서지고 정신이 찢어졌다.

이대로 무에 휩쓸려 사라지겠구나―

그렇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정신 차려라."

"헉!"

누군가의 목소리에 명한의 사고가 본래의 것으로 돌아왔다.

억만분의 일초.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이 역산되어 존재하지 않았던 가정의 영역으로 쏟아졌다.

명한은 두 눈을 깜빡이며 자신이 헤맸던 억겁의 공간을 더듬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수습해. 계속 그러고 있으면 잡아먹힌다."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명한이 고개를 들어 눈앞의 존재를 바라봤다.

붉은색 옷에 붉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독특한 모습의 여인이었다.

"당…… 당신은 누구입니까?"

입에서는 말이 너무 낯설어 명한이 잠시 움찔했다.

말만이 아니라 숨 쉬는 것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전부 새로웠다.

마치 ‘명한’이라는 인간이 완전히 분해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기분이었다.

"이름은 알 필요 없어. 편하게 적(赤)이라고 불러라."

"적. 직관적인 별호네요. 날 그 공간에서 꺼내준 게 당신입니까?"

"꺼내? 그런 능력은 누구에게도 없어. 그냥 여기서 불렀을 뿐이다. 나오고 말고는 네 역량이었지."

"그 공간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어렴풋하게. 칭하는 방식은 여럿이나 나는 그곳을 외경(外境)이라 부른다."

"외경. 외경이라.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떠오르는 건 없으나, 손끝에 남은 희미한 감촉은 있다.

이해의 범주로 포장되는 세계의 밖.

그야말로 영역 너머의 공간이었다.

"정신 차렸으면 물건을 수습해서 떠나라."

"물건? 무슨 물건 말입니까."

"이곳까지 왔으면 대충의 흐름은 알고 있을 텐데?"

"……황제. 황제 말이군요."

"그래."

명한의 말을 적이 확인시켜 주었다.

신기자가 던진 미끼에 땅을 지키고 있는 죽지 않는 자들.

악탁현과의 싸움에서 느낀 최초의 충정과 의기를 고려하면 떠오르는 건 하나였다.

"황제가 살아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존재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살아있다라. 그런 존재에게 삶을 붙이는 건 모순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 괴물을 인간의 탐욕이 이용하고 있을 뿐이지."

"그럼 일련의 사건 배후에 있는 게 황제 자신이 아니라는 겁니까?"

"……너. 내가 누군지 짐작하면서 캐묻는군."

명한이 변명을 입술에 담았다가 지웠다.

자신이 알아챈 것처럼, 상대도 눈치를 챈 것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불사의 법을 실험하고 이용하는 건 혈교와 손을 잡은 모종의 무리. 그리고 그 반대쪽에서 미끼를 던진 것이 신기자를 포함한 무리. 아마도 당신은 둘 중 하나에 속해 있을 겁니다. 예상하건데…… 혈교 쪽이 가깝겠네요."

"이유는?"

"당신에게서도 같은 냄새가 나고 있거든요."

정확하게는 금환이다.

품 안에 가지고 있던 금환이 적의 모습에 반응하고 있었다.

눈앞의 여성도 황제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백과 흑의 계획이 어긋날 만하군. 놀라운 통찰력이야."

"백과 흑이라. 혈교도 같은 방식의 체계를 사용하는데…… 아니, 그들이 당신들에게서 배운 거겠군요."

"옳다. 혈교는 후대에 생긴 일종의 분파. 본류의 방식을 훔쳐 배우고선 자신들만의 영역을 마련했지. 조악하지만 쓸모가 있기에 내버려 두고 있을 뿐이다."

"이름이라도 좀 알 수 없습니까?"

"뻔뻔하군."

"그게 장점입니다만."

"후후. 좋다. 이것도 인연이니 이름은 알려주지. 우리 조직의 이름은 혼천(混天)이다."

혼천. 이름을 듣는 순간 명한은 깨달았다.

본래 습작에서 구무림을 부활시키려는 무리의 이름도 혼천.

본래의 설정을 지금의 무리가 꿰찬 것이다.

같은 이름이나 성질과 힘은 전혀 다른.

"그럼, 한 가지만 더. 당신들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은 것 아닌가? 내가 혼천이라면 너와는 적대관계일 텐데."

"죽일 거였으면 기회는 많았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혼천 내에서도 당신의 목적은 특수하다는 의미. 한마디 덧붙이는 건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만."

"참 재미있는 아이야."

적의 가면 아래로 미소가 그려졌다.

이것은 답에 대한 신호―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

날카로운 실 하나가 명한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릿한 고통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는 붉은 피.

"알고 싶다면 힘으로 알아내라."

"결국, 이렇게 되는 겁니까."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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