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235)

각자의 방에서

혼란은 다급히 찾아왔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명한이 마른침을 삼키며 눈앞의 알림창을 바라봤다.

허공에 새겨진 글귀는 환상이 아니었다.

"너. 신이냐?"

많은 것을 함축한 물음이었다.

이에 알림창의 단어들이 잘게 쪼개지며 다른 것으로 변해갔다.

[응. 신이야. 오랜만이지?]

너무 평범한 문답.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던 그 신이 맞았다.

명한은 가슴의 답답함을 느끼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기계적으로 떠 있는 알림창은 어떤 온기도 내보내지 않았다.

"이 모든 건 네 작품이야? 날 여기로 보낸 것도. 지금의 상황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머리에서 입으로 질문이 쏟아졌다.

낱말이 바쁘게 형태를 바꿔갔다.

[맞아. 맞아. 아니야]

예상대로의 답이 두 개, 아닌 것이 하나였다.

"지금의 상황은 네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말이 안 되잖아."

판의 책임자가 신이라면 상황도 그의 작품이어야 맞다.

앞뒤가 안 맞는 답에 명한의 목소리가 커졌다.

[인과라는 건―□□□□]

"신!?"

갑자기 깨지기 시작하는 단어들.

[내가 바란 □□□ 도 몰라. 하지만 이건 □□□□]

잘린 단어에 뭉개진 낱말들.

눈앞에 떠 있는 알림창의 존재조차 금이 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 대화의 흐름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었다.

[□□□미안. 널 위해□□없어. □□]

창 자체가 부서지며 바닥으로 은색의 가루를 날렸다.

실존하지 않는 것이 실존하며 그 흔적을 남긴 것이다.

명한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그 가루를 받았다.

놀랍게도 그 가루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했어. 부디 넌□□]

그렇게 갈라진 창은 마지막 부분까지 가루가 된 뒤 사라졌다.

소복하게 쌓인 가루 한 줌.

명한이 입을 굳게 다문 채 텅 빈 공간을 바라봤다.

이제 겨우 무언가 실체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냥 사라져 버린 것이다.

허무함과 분노.

안타까움 등이 복합적으로 휘몰아쳤다.

"대체 뭐 하자는 거냐. 뭔데. 뭐냐고!"

주먹을 움켜쥔 채, 소리쳐도 닿을 곳이 없었다.

공허하게 맴돌다 그대로 사라졌다.

츠츠츠츠……!

대신 다른 것이 반응했다.

깨진 알림창의 가루들이 희미하게 떨더니 천천히 허공으로 부유했다.

그리고는 반응할 틈도 없이 명한의 몸으로 스며 들어갔다.

내공을 통한 막고 가이신공의 반탄지력도 의미 없었다.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건……"

알 수 없는 기운에 말끝을 흐리는 명한.

모든 게 사라진 건 아니었다.

#

"거하게 해 주었네."

지면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봉우리 위.

신기자가 뿌옇게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시작된 동굴의 붕괴는 섬 전체로 번져서 거대한 균열을 만들었다.

높은 곳에서 보자면 커다란 구멍과 같았다.

"물건은 회수했겠지?"

"겨우 빼냈습니다. 사숙께서 목숨 걸고 무덤을 무너뜨리지 않았으면 걸릴 뻔했어요."

"흥. 사숙은 무슨.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는 주제에 살가운 척은 그만둬라."

구문자의 비웃음에 신기자가 흐릿하게 웃었다.

아무리 포장해도 한때 같은 사문이었던 이들을 이용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꾸 없이 품에서 천으로 싸인 물건을 꺼냈다.

"그게 원본인가?"

"네. 후대의 황제가 기술한 황제진경의 원본. 사실상 최초의 불사종법이라고 할 수 있죠."

"고작 이런 책 한 권에서 그 모든 일이 벌어졌다니. 사부님은 왜 이걸 회수하라고 한 거지?"

"혼천이 육체를 회수하는 건 정해진 수순. 원본마저 손에 들어가면 이래저래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가속되겠죠. 적어도 시일만이라도 늦추려는 겁니다."

"우습기 짝이 없군."

구문자가 입술을 비틀며 책에서 시선을 뗐다.

"사형은 책에 욕심이 없습니까?"

"치워라. 내가 루를 떠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불사종법 같은 건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어. 인간이 강한 건 그 순간을 불태우기 때문.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그래서 강유 공자를 따르는 겁니까?"

"그는 나약한 부친과는 다르니까."

많은 것이 생략된 답이었으나, 신기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이 땅의 일이 끝나면 서로가 경쟁하는 관계.

친분을 위한 대화는 필요 없었다.

"그보다 사형. 내기 말입니다."

"내기? 아, 그 인간들. 이런 붕괴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없겠군. 내 승리인가?"

"후후. 그렇게 결론을 급하게 내릴 필요는 없겠지요."

"무슨 소리냐? 살아있기라도 할 것 같더냐?"

"천기는 점하기 어려우나, 가까운 길흉화복 정도는 알 수 있겠지요."

신기자가 품에서 나무 막대기 여럿을 꺼내 허공으로 던졌다.

이 막대기들은 서로 부딪치며 여러 갈래로 나뉘어 바닥에 떨어졌다.

이를 눈으로 훑던 구문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 점괘가 사실이냐?"

"글쎄요. 천기가 뒤틀려 어긋난 점괘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지켜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들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이 땅에 아직 혼천이 남아 있음에도?"

"그 정도 모험은 해야지요."

구문자의 입술이 달싹이다 멈췄다.

할 말은 여럿이었으나, 답은 이 정해져 있음을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말은 줄이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좋은 자리를 찾아보죠."

바람과 함께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

강유옥이 머리 위로 쌓인 돌무더기를 밀어내며 밖으로 나왔다.

옷이 조금 찢어지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손으로 먼지를 툴툴 털며 얕은 한숨을 토했다.

"빌어먹을 늙은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발악하고 있군."

"제법 집요한 수였어. 잘못했으면 그대로 매몰당할 뻔했다고."

"역시 그분께서는 상황을 예견하셨던 걸까? 이 귀문경(歸門鏡)이 없었다면 벗어나기 힘들었겠지."

강유옥에 품에서 꺼내 흔드는 건 손바닥 정도 크기의 거울.

얼핏 평범해 보이나, 무림 전체에 딱 하나뿐인 보물이었다.

공간과 공간의 틈을 비틀어서 순간적으로 길을 여는 공능이 있었다.

동굴이 붕괴할 당시 귀문경이 없었다면 제아무리 두 사람의 능력이 뛰어나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나저나 무덤이 이 꼴이라면 육체는 어디에서 찾지?"

"불사의 육체야. 상황이 이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흔적을 쫓아서 따라가면 그만이다."

"흐음. 육체노동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는데. 별수 없겠네."

"이제 곧이야. 육체만 회수해 가면 혼천의 대업이 완성되는 것도 코앞이겠지. 그때가 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 글쎄. 그리 호락호락할지는 모르겠군."

"시끄러워. 따라오기나 해라."

비아냥을 일축하며 강유옥이 손바닥보다 작은 종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건 과거 종리운이 명한을 찾아서 내놓으라 협박했던 ‘귀혼령’과 쌍이 되는 ‘귀백령’이었다.

각각 혼과 백을 불러들이는 공능이 있었다.

지금의 경우 혼이 깃드는 백이 황제의 육신이니 저절로 찾아가게끔 돼 있다.

"응?"

헌데, 그 기운이 뭔가 예상과는 달랐다.

"셋? 지금 기운이 셋으로 나뉘어 있는 건가?"

"하. 이런 수작질을 해 놓다니."

하나여야 할 황제의 육체가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기 다른 방향, 다른 형태로 귀백령과 반응했다.

"귀찮게 됐군. 무덤의 방어가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 싶더니 이런 식이었나."

"우리가 열쇠를 얻은 걸 알았으니, 차선을 택한 거겠지. 하나씩 맡아서 회수하도록 하자."

"이쪽은 내가, 저쪽은 네가."

"남은 하나는?"

"지금까지 놀고 계신 적면께서 맡아 주셔야지."

백면, 탁발귀가 어깨 너머로 턱짓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적색 가면의 여성이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라앉은 눈으로 상황을 확인한 뒤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각자 재주껏 책임을 지자고."

"죽지나 마라."

"넌 죽어도 상관없지만."

저마다 한마디씩을 남기며 갈라지는 세 사람.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

은소소의 첫 번째 생각은 ‘부정’이었다.

마냥 긍정하기에는 지난 세월 동안 쌓아온 상식이 너무 두터웠다.

하지만 보고 또 볼수록 생각은 바뀌어 갔다.

"이게 원형이야."

커다란 석실 중앙에 서 있는 수십 개의 석상.

한 인물을 따서 여러 동작을 석실 안 가득 재현해 놓았다.

그 모습은 하나의 무리를 여러 동작으로 나열한 것.

보고 있으면 ‘천마검’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왜 천마검이 여기에 있어."

"검성. 검성지기."

검수의 답은 한결같았다.

눈앞의 증거가 없다면 그냥 미쳐버린 사람의 헛소리라 치부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천마검의 역사를 생각해 봐도 눈앞의 석상 쪽이 훨씬 빠르다.

누군가 천마검을 이곳에 재현한 것이 아닌, 이곳의 재현을 신교가 가져갔다는 것이 옳다.

"하긴, 생각해 보면 초대 천마께서는 검을 쓰지 않았어. 후대에 올라오면서 갑자기 검술이 추가됐지.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기술은 전혀 없었음에도."

천마신공은 신교의 역사와 함께 성장한 무공총람.

천마검이 그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초대 천마의 시기가 지난 후.

원류도 모른 채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의 주인에게서 배웠다?’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그그긍―!

"뭐, 뭐야!?"

순간, 주변 석상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우 느리게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였다.

하나하나는 큰 의미가 없었지만, 전체를 보자면 달랐다.

"천마검. 천마검의 초식이야."

은소소가 곧바로 검을 뽑아서 석상의 무공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미 천마응출을 익힌 그녀이기에 기초 자체는 탄탄했다.

느리게 반복하는 석상의 무공을 흡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그그긍.

게다가 석상은 하나의 초식이 끝나고 난 뒤에야 다른 형태를 보여 주었다.

은소소가 완전히 따라오기를 바라는 모습이었다.

한 동작, 한 동작 곱씹으며 따라 했다.

파스스스……

언제부턴가 은소소 주변으로 희미한 기운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 기운은 석상을 타고 이어져서 거대한 고리를 만들었다.

서로를 이어서 호흡하는.

하나의 순환이었다.

길어지고 짧아지고 강해지고 약해지는.

살아 숨 쉬는 순환 속에서 은소소의 동작은 점차 정교해졌다.

"……"

완전한 몰입에 빠진 은소소는 이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보이는 것을 잊고 들리는 것을 잊고 종국에는 자신마저 잊은 채 그저 검에 빠져들었다.

무인이라면 평생에 한 번 겪기 어려운, 완벽한 물아일체의 경지였다.

"……불청객."

그리고 그때.

이를 지켜보던 검수는 석실 밖의 어딘가를 응시했다.

자신이 지키고 바라왔던 지금의 이 순간을 방해하려는 어떤 기척이었다.

대충 스쳐 가는 방문자와는 급이 달랐다.

자신보다 강하고 이 땅의 주인보다도 강할지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건 용인할 수 없는 일.

검을 쥔 채 소리 없이 은소소의 뒤로 빠져나갔다.

‘주인께서 남기신 명령.’

단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배제한다."

검수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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