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151/235)

진실의 틈

검수에 이끌려 은소소가 도착한 곳은 석실이었다.

오래되어 빛을 거의 잃은 야명주 하나가 안을 밝히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막다른 길.

이런 곳에서 뭘, 은소소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검. 성좌."

"무슨 소리냐?"

"성좌의 검. 검성지기."

검수는 손으로 벽을 가리키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의미불명에 은소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가리킨 곳을 유심히 바라봤다.

희미한 빛에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아 얼굴을 앞으로 박아야 했다.

그리고 그제야 어둠에 가려져 있던 흔적을 발견했다.

"……이건 전부 검흔이잖아."

석실 전체를 메우고 있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검흔.

깊이와 방식 하나하나가 모두 달랐다.

은소소가 손끝으로 그 흔적을 더듬으며 감탄했다.

그녀 역시 평생을 검에 매진하였기에 이 흔적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다.

‘검의 모든 가능성을 이곳에서 시험해 보고 있었어.’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검은 달라진다.

쥐는 힘, 비트는 팔의 각도, 손목의 방향 등.

주변의 검흔은 이런 모든 변화의 흔적이었다.

"이 검흔의 주인은 누구지?"

"성좌. 검성."

"검성? 그 검성이라 이거냐?"

"네 검. 같다."

손짓에 은소소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천마검은 어디까지나 천마에게서 전수받은 천마신공의 일부.

절대로 검성의 무공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석실의 모든 흔적을 보자니 부정하기 어려운 점이 분명 있었다.

‘이 안에 천마검의 흐름이 있어.’

경지에 오른 그녀이기에 보이는 흐름.

수십, 수백, 수천.

아니, 셀 수 없이 많은 검술의 모태가 이 안에 존재했다.

"보여라. 네 검."

"하아. 모르겠다."

계속되는 종용에 은소소가 검을 쥐었다.

생각보다는 행동이 차라리 편한 순간이었다.

전력으로 천마응출을 사용해서 벽에 검흔을 새겼다.

그러자……

그그그긍.

석실의 한쪽 벽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맞다. 너 검성의 후예."

어딘가 조금은 생기가 생긴 듯한 검수의 목소리.

은소소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검을 회수했다.

부정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어디로 가면 되지?"

지금은 따라갈 때였다.

#

향아는 홀린 듯 사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끌림이 있었다.

짧은 어둠이 주변을 스치고 이내, 밝은 공간이 나타났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야명주로 주변을 밝힌 정돈된 방이었다.

"이곳을 일월의 후예가 찾은 건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어!?"

그때 갑자기 찾아온 목소리 하나.

향아가 퍼뜩 깨어나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봤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백의 차림의 여성이 서 있었다.

긴 머리는 바닥에 닿고 창백한 피부는 그야말로 백옥이었다.

선계의 여신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향아는 대꾸조차 잊은 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후후. 그리 바라보면 부끄럽지 않더냐."

"아, 아. 죄송해요."

"괜찮다, 아이야. 나도 오랜만의 방문에 반가워 그만 불쑥 나오고 말았으니."

다소곳하게 웃은 여인은 백의를 끌어 향아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본 여인의 모습은 더더욱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누구신지 물어도 되나요?"

"이런. 소개도 안 하고 떠들었구나. 나이를 먹으니 이리 머리가 굳어. 내 이름은 선(善). 야율 선이라고 한단다."

"야율 선…… 전 향아라고 해요."

"향아. 예쁜 이름이구나."

"헤, 헤헤헤. 야율 언니의 이름이 더 예뻐요."

"어머, 언니라니."

"아! 제가 실수했나요? 너무 예쁘고 젊어 보여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니, 괜찮아. 언니라고 불러준다면 고마울 따름이지. 그럼 나도 향아 동생이라고 부를게."

목소리마저 아름다웠다.

향아는 잠시 상황마저 잊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저, 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뒤에 남겨진 사람들을 데리러 가야 해요."

그러다 문뜩,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벽 뒤의 아이들 말이니?"

"네. 제가 틈으로 먼저 안전을 확보하기로 했거든요.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흐응. 저 아이들은 이곳에 올 자격이 없는데."

"하, 하지만 저대로 있으면 언제 또 무너질지 몰라요. 몸만 잠깐 피할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본래는 안 되는데 우리 향아 동생이 마음에 들어서 해주는 거야."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손짓하는 야율향.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거친 진동음이 들리더니, 청청과 막천우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방금 그거 야율 언니가 도와주신 건가요?"

"사당 밖까지는 들어오게 해 줬어. 하지만 여기는 동생 아니면 들어와서는 안 돼."

"저 밖은 안전한 거죠?"

"일단은."

"하아. 그럼 괜찮아요."

일단 숨은 고를 수 있다.

향아가 안도한 표정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향아 동생이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네. 이거 마셔보겠어?"

"어? 이건 뭐에요?"

"담로수라는 거란다. 마시면 갈증과 피로를 씻어줄 거야."

야율향이 내미는 옥배에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다.

낯선 사람의 낯선 물건이나 향아는 이상하게도 그게 의심스럽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받아서 그대로 목으로 넘겼다.

속이 따듯해지며 순식간에 기력이 돌아왔다.

게다가.

"……와. 이거 뭐예요? 갑자기 내공이 늘었어요?"

"어머. 그런 효능이 있었나? 매일같이 물처럼 마시고 있어서 몰랐지."

무려 1갑자의 내공이 아무런 부작용도 없이 늘었다.

아무리 대단한 영약이라도 약효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준비와 수단이 필요한 것이 상식.

하지만 이 담로수라는 건 그 모든 상식을 무시했다.

"언니는 혹시 신선인가요? 선녀?"

"후후후. 글쎄. 동생이 보기에는 어떤데?"

"선녀가 맞는 거 같아요. 아니면 이런 동굴 지하에 언니같이 예쁜 분이 이렇게 살고 있을 수가 없잖아요."

"미안하지만 선녀는 아니란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사는 것도 아니지."

"그럼요?"

"갇혀 있는 거란다. 아주 오랜 시간. 이 땅에 묶여서."

서글퍼 보이는 얼굴과 서글퍼 보이는 목소리.

향아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야율향의 손을 부여잡았다.

온기에 조금은 놀란 듯, 야율향이 움찔하다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 기나긴 시간 끝에 찾아온 사람이 너라서 다행이구나."

"언니는 왜 이런 곳에 갇혀 계신 건데요? 누가 그랬어요?"

"후후. 그 이야기는 너무 지루하고 괴롭기만 해. 대신 이 언니가 재미있는 걸 얘기해줄까? 우리 동생이 품은 일월에 대한 이야기인데."

"일월이요?"

"어머. 설마 모르고 여기까지 온 거니?"

향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월에 대한 거라면 명한이 알려준 무공의 기원밖에는 없다.

"그럼 우리 동생에게 차근차근 이야기해줘야겠네."

더 좋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어가는 야율향.

목소리에서 향이 난다면 이런 것일까.

향아는 거절조차 잊은 채, 그대로 그녀의 목소리에 빨려 들어갔다.

아주 오래된, 한 여인의 이야기였다.

#

‘왜’라는 의문이 명한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껏 본래의 세상을 떠나서 이곳까지 온 것을 ‘신의 장난’ 정도로 치부했었다.

어쩌면 하룻밤의 단꿈일지도 모른다는 가정까지도 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본래의 세계의 접점을 찾으리란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이 상황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체 무슨……"

화악―!

반사적으로 말을 하려는 찰나.

주변 공간에 불이 붙으며 방 안 전체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빛바랜 벽지와 낡은 책상.

손때 가득 묻은 노트나 펜 따위.

이곳은 확실히 명한 자신의 방이었다.

"아니. 잠깐만. 이건 또 뭐야?"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방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보통 붙이는 연예인이나 영화 따위가 아니었다.

방 전체를 도배한 포스터의 주인은 명한의 모습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고민하는 모습, 습작 설정을 짜는 모습, 써지지 않는 글에 머리를 긁는 모습까지.

명한 자신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모습들이 전부 포스터로 붙어있었다.

"……여기에 내 스토커라도 살았던 건가?"

소름이 쫙 끼치고 가슴이 답답했다.

손이 닿는 족족 포스터를 찢어서 던져버렸다.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기를 바랐으나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대체 여긴 뭐 하는 곳이야?"

이젠 하나하나가 전부 의심스럽다.

명한이 포스터를 다 떼어버린 뒤,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책상을 뒤집고 펜을 분해하고 노트를 하나하나 열어봤다.

대부분은 안이 텅 빈, 겉모습만 채워둔 물건이었으나 노트는 달랐다.

그 안은 누군가의 글로 빼곡하게 차 있었다.

[……언제부터 그의 글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간의 특이성 때문일까? 알 수는 없으나, 다른 이의 생각이 읽힌다는 건 즐거웠다. 하나하나 음미하며 읽어갔다……]

[……대단했다. 그의 손을 통해 적힌 글 하나하나가 우리 세계의 운명과 맞닿아 있었다. 그는 신일까? 아니면 예언자일까. 도무지 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의 글에 우리 세계의 일면이 드러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사이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운명일까. 이젠 그의 글이 없으면 하루도 견디기 힘들다……]

[……어째서 그만둔다는 거지? 이건 받아들일 수 없다. 그의 글이 없다면 우리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그 반대일까? 이젠 상관없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삶은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다시 불러와야 한다……]

탁. 잠시 노트를 덮고 명한이 미간을 손으로 눌렀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지금 노트에 적힌 누군가의 글들은 정확하게 지난 과거의 일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명한의 이야기였다.

"내가 무적패도 연재를 중지할 무렵인가. 그럼 역시 이 글을 쓴 건 신인가?"

울렁거리는 속을 누르며 다시 노트를 펼쳤다.

[……그의 결심은 확고해 보인다. 그가 우리 세계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습작을 놓아도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 믿었던 결과가 이것인가. 내 말은 닿지 않고 응원은 힘을 주지 못한다. 슬프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죽음도 시간의 제약도 없으니까. 엇갈린 세계의 틈을 비틀어낸다면 이 또한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슬쩍 던진 말에 미련을 보인다. 그도 사실은 글을 그만두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내 행동은 잘못되지 않았다. 모든 걸 그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 내 세상의 창. 내 모든 것. 내 전부. 너를 위해서……]

노트의 마지막은 그렇게 끝났다.

명한은 문뜩 이쪽으로 넘어오기 전, 신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너스레를 떨며 여유 있는 척 모습을 꾸몄지만, 다급함과 초조함이 묻어났었다.

노트에 적힌 그 감정의 흐름 그대로였다.

"날 이곳으로 보낸 것이 정말로 너였다는 거냐? 하지만……"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풀리지 않는 의문의 매듭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큭!"

순간, 통증과 함께 찾아온 알림창.

최근에는 들여다보지 않았으니 꽤 오랜만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그 안을 채운 건 알 수 없는 부서진 낱말들.

이건 또 무엇―, 명한이 그렇게 생각하려는 찰나.

[오래간만이야, 명한]

상상도 못 한 글자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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