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로
후두두. 두둑.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위 부스러기에 명한이 깨어났다.
전신이 부서질 듯 아파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호흡을 고르고 내공을 한 바퀴 돌리고 난 뒤에야 겨우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긴 어디지?"
머리 위는 부서진 돌무더기들.
주변은 온갖 파편이 쌓인 잔해의 현장이었다.
앞서 일어난 동굴의 붕괴의 여파를 그대로 맞이하고 있었다.
‘소소나 향아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지만 다른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애초에 다른 사람이 섞일 만큼 넓은 공간이 아니었다.
"설마 낙반에 휩쓸린 건가……?"
초조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아니. 아니야. 마지막 그 검기는 분명 막 장문의 혼원일기였어."
붕괴의 방향 때문에 서로 갈라졌지만, 나머지를 막천우가 수습하는 걸 봤다.
그의 검기는 낙반을 가르고 다른 방향의 길을 열었었다.
그가 있다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확실했다.
‘후우―’ 명한이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안과 초조함에 먹히기보다는 움직이는 편이 나음을 깨달은 것이다.
"동굴 상부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지반도 가라앉았군."
주변에 널린 잔해들은 상부의 석재만이 아니라 하부의 금속도 섞여 있었다.
함께 무너져서 뒤섞였다는 의미.
검붉은 금속 속에 섞여 있던 시체들도 여럿 보였다.
‘일반적인 붕괴는 아니었지.’
지진으로 인한 붕괴였다면 이렇게 단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이건 의도적인 폭발.
이 안에서 무언가 다른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으으으……"
"으아아아아……"
하지만 알아내기 위해서는 지금의 상황이 우선.
파편 단위로 뭉개졌던 시체들이 하나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악탁현처럼 이성을 유지한 존재는 아니나, 이들 하나하나가 고수.
"내가 갈 때까지만 무사해라."
가는 길이 순탄해 보이지는 않았다.
#
명한이 죽은 고수들과 싸우고 있을 무렵.
은소소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젠장! 뭐 하는 놈이야, 대체!"
수의로 몸을 감싼 표정 없는 검사였다.
낙반 속에서 갈라져 겨우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그녀를 공격해 왔다.
일검일검이 날카롭고 무거웠다.
한 번의 충격에 몸이 다 떨릴 정도였다.
"불허한다."
"대체 뭘!"
검사는 한 가지 말만을 계속 반복했다.
그 의미불명의 말에 은소소는 짜증이 치밀었다.
어딘가 넋이 나간 정체불명의 검사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현실.
그 무력함이 그녀를 화나게 했다.
‘대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무력했지?’
검 하나면 모든 걸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의 검은 한없이 무력하기만 했다.
벨 수도, 지키지도 못하는 검.
"……짜증 나. 전부 짜증 나. 어차피 이런 말 해봐야 소백은 날 응원하고 말겠지. 하지만 내가 받고 싶은 건 동정이 아니라고."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를 위해 검을 쥐기로 했어. 보호받아야 하는 건 내가 아니야. 그의 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검을 휘둘러야 해. 그게 내 소명이야!"
한계까지 내공을 끌어올려서 천마검을 사용했다.
천마응출의 초식.
솟구치는 검기에 검수의 표정이 처음으로 달라졌다.
"검성지기……?"
"뭔 헛소리야! 이건 천마검이라고!"
검을 비틀어 천마응출을 다각도로 쏟아냈다.
마치 해일처럼 몰아치는 연격에 검수가 연신 밀렸다.
예리한 반격도 무거운 공격도 지금은 없었다.
"뭐하자는 거냐!? 갑자기 날 봐주기라도 하는 건가!?"
"검성. 후예……?"
"자꾸 뭐라는 거야! 난 광검, 은소소다!"
어딘가 조금 이상한 모습.
이것은 기회. 은소소가 검을 고쳐 쥐었다.
혼원일기를 사용해서 적의 요혈을 노릴 심산이었다.
"아니."
하지만 그 순간.
자세의 간격 사이를 검수가 검으로 찔렀다.
은소소의 몸이 곧바로 무너지고 기운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게 아니야."
"큭!"
마치 훈계하는 어투.
혼원일기가 아닌 천마검을 사용하라고 종용하는 것 같았다.
은소소가 이를 소리 나게 갈았다.
"그래! 원하면 얼마든지 써 주마!"
전력으로 쏟아내는 천마응출의 초식.
한 마리의 독수리가 허공을 나는 것처럼 날카롭게 검수를 압박했다.
쾌속한 검격은 그 자체로 위력적이었다.
"……!?"
하지만 닿지 않으면 의미 없는 일.
검기 다발이 닿기 직전에 검수는 기만한 동작으로 그 범위를 벗어났다.
그리고 무언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 맞아. 따라와라."
아예 등을 돌려서 한쪽으로 걷는 검수.
은소소가 황당함에 입만 쩍 벌리고 바라보다, 바닥을 힘껏 굴렀다.
지금의 일격으로 검수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음을 안 것이다.
지독한 굴욕이었다.
"그래. 간다, 가. 뭘 보여주려는 건지 똑똑히 지켜봐 주마."
이를 악물고 검수의 뒤를 쫓았다.
#
"어, 어떻게 하죠?"
머리 위로 쏟아진 먼지도 다 치우지 못한 채 향아가 물었다.
갑자기 붕괴한 동굴에 일행은 세 무리로 분할.
지켜야 할 명한을 놓친 채 막천우 등과 함께 떨어져 나왔다.
"소백, 그 아이라면 괜찮을 거다. 마지막에 무사히 빠져나가는 걸 봤으니."
"저, 정말이죠? 도련님 무사한 거죠?"
"그래. 어떻게 해서든 길을 찾아서 합류하면 될 거다."
막천우는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향아를 다독였다.
그 역시 확신은 없었지만, 그걸 대놓고 말할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문제는 나가는 길인데.’
대충 살펴도 낙석이 길을 모조리 막고 있었다.
"이쪽이야. 금홍이 이쪽에 길이 있데."
그때, 청청이 다른 방향에서 걸어왔다.
향아가 당황으로 쩔쩔매고 있을 시간에 그녀는 이미 길을 확인하고 왔다.
태산파를 떠나고 난 뒤, 혼자서 아등바등 살아온 경험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었다.
"이걸 길이라고 할 수 있나?"
청청이 안내한 ‘길’은 낙석과 낙석 사이의 조그만 틈.
몸을 구겨서 기어가도 될까 말까 할 정도였다.
체구가 큰 막천우는 아예 불가능.
청청도 버거워 보였다.
"이 너머에서 바람이 흘러들어와. 막히지 않은 통로가 있다면 아마도 저편이겠지."
"으음. 하지만 섣불리 길을 내려 하면 이차로 붕괴할 위험이 있다."
"그러니까 먼저 확인해 봐야지."
"그 금홍이라는 새가 하면 안 되나?"
"그게……"
청청이 축 늘어진 금홍을 들어 올렸다.
틈을 확인하고 온 뒤로는 이 모습이었다.
기력이 떨어졌든 무언가에 놀랐든 당장은 무리였다.
난감함이 일행 사이로 감돌았다.
"제, 제가 가볼게요."
그때 나선 건 향아.
"제 체구가 가장 작으니까 어떻게든 기어들어 갈 수 있을 거예요. 안쪽에 다른 통로와 연결되어 있으면 제가 신호를 보낼게요. 그때 안과 밖에서 하나씩 길을 열어봐요."
"괜찮겠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도련님이 어딘가에 갇혀계실지도 모르는데 혼자서 울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졌다.
말마따나 여기서 운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눈물을 소매로 슥 닦고는 틈 앞에 섰다.
‘조, 좁아.’
몸 하나 겨우 들어갈 틈에 지금도 부스스 무너지는 돌무더기.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들어가기 기쁠 틈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왕 꺼낸 말, 이를 악물고 몸을 욱여넣었다.
"향아야, 괜찮아?"
"괘, 괜찮아요. 어떻게든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무리하지 말고. 위험하면 말해 내가 뒤에서 당겨줄게."
"네!"
허리에 감은 옷자락이 전부.
몸을 비틀며 틈 사이로 기어들어 갔다.
팔과 다리가 돌조각에 긁혔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전진했다.
"어?"
그렇게 가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앞을 막던 바위가 사라지고 넓은 공간이 나왔다.
구르듯 틈을 벗어나 몸을 세웠다.
"와……"
그곳에 있는 건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사당.
좌우측에 무서운 인상의 신장이 서서 사당을 보호하고 있었다.
추정되는 세월을 고려하면 굉장히 보존 상태가 좋았다.
이곳이 출구인 걸까.
향아가 무의식적으로 사당으로 손을 뻗었다.
[일월(日月)의 후손이여 환영한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리고……
그그그그긍.
굉음을 토하며 열리는 사당의 문.
향아의 눈이 소리 없이 깜빡였다.
#
피가 손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이어지는 긴 자상이었다.
고통은 날카로운 송곳처럼 머릿속을 헤집었다.
쉬고 싶다―
그런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후우."
하지만 명한은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머뭇거리면 흩어진 다른 일행들의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고통 따위로 멈출 거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짧은 호흡으로 내식을 정리하고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한 점의 찌르기가 와류(渦流)를 만들어 주변 시체들을 쓸어갔다.
팔과 다리가 날리고 피가 안개처럼 퍼졌다.
"으…… 으아아아아!!!"
"으으어어!"
남은 감정이라고는 분노뿐일까.
남은 시체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명한을 공격했다.
다양한 식(式)과 다양한 형(形)이 쉼 없이 쏟아졌다.
기억을 잃고 이지마저 상실했지만, 그 안에는 쌓아온 무공의 업이 있었다.
아마도 악탁현과는 다르게 동굴이 무너졌기 때문에, 짓누르던 집착이 희미해진 것.
화산파이며, 무당파이며, 소림파이며, 청성이며, 남궁세가이며……
중원 무림 전체였다.
"비켜. 이곳에 묻힌 너희에게 염(念)을 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온갖 번뇌와 고통.
분노로 점철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명한은 우직하게 나아갔다.
멸아(滅我)는 스스로를 지워 세상을 받아들이는 공법.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만이 이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속에서 계속해서 움직였다.
주먹에 무언가 닿고, 팔을 날카로운 물건이 스치고, 어깨를 무거운 도구가 때려도.
계속해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하나로 섞으며 움직였다.
"후우. 후우. 후우……"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빛도 들지 않는 작은 암굴 안에서 걸음이 멈췄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온도와 시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적막의 한가운데였다.
달아올랐던 흥분이 가라앉으며 이질감이 피부 위로 찾아왔다.
이곳은 무언가 달랐다.
덜컥.
그때, 무언가 단단한 것이 명한의 무릎에 닿았다.
차가운 감촉에 묘한 굴곡을 지닌 물건이었다.
눈으로 보고 싶었지만, 이곳의 어둠은 그의 빛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이 안으로 빛이 침범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불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명한은 무의식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왜. 나는 이 공간이 익숙하지."
몸을 스쳐 가는 기묘한 감각이 이미 불가능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기시감.
언젠가 이 공간에 자신이 들어와 본 것 같았다.
이유 따위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느껴질 뿐이었다.
"오래된 책상. 낡은 벽지. 쓰다 버린 노트."
손끝에, 발끝에, 볼에 스치는 물건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여기 이곳에는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기도 했다.
"여기는……"
글을 끄적이며 청춘을 다 바쳤던 그 공간이다.
하나하나 손때가 묻어 있고, 어느 것 하나 추억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다.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확신하며.
그렇기에 부정했다.
"내 방이잖아."
‘소백’이 아닌 ‘명한’의 작은 방.
낯선 교차점에서 명한은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