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치고. 막고. 피하고. 던지고.
수십 합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팽팽한 싸움이었다.
악탁현의 검은 여전히 강하고 매서웠지만, 명한의 손속도 밀리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귀기의 침범마저 없었다.
오롯하게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어째서냐."
"몰라서 묻는 거냐, 아니면 거부하는 거냐."
"우린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그렇게 생각했겠지. 하지만 스스로 의심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이다."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스쳐 가는 검.
명한의 몸이 뱀처럼 스며 들어가 어깨로 악탁현을 밀쳐 올렸다.
공중으로 반 치가량 떠오르는 악탁현.
무겁게 땅을 밟은 명한의 주먹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콰르르릉.
벽이 무너지고 먼지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너는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왔던 거지, 악탁현?"
"……"
부스스, 무너지는 파편 사이로 악탁현이 몸을 일으켰다.
바위가 무너질 충격에도 그의 육체는 흠집조차 없었다.
"처음부터 모두를 죽이겠다는 마음가짐은 아니었을 텐데?"
"난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모든 영예를 뒤로한 채 화산을 떠났다. 네깟 놈이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얄팍한 무림의 상식으로 우리를 재단하지 마라."
"그렇다면 답해라. 네 검은 지금 화산에 부끄럽지 않은가?"
"……닥쳐!"
악탁현의 검을 중심으로 수백, 수천의 매화나무가 꽃을 피웠다.
사방이 매화 향으로 가득 차고 그 가지마다 꽃잎이 날렸다.
환상. 화산파의 신기인 매화검이었다.
꽃잎 하나하나가 검기를 품고 있는 극에 이른 변검(變劍).
촤아악!!
순식간에 명한의 몸 전체에 검상이 새겨졌다.
어깨, 팔, 허리, 허벅지……
피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예리한 공격이었다.
낙화(落花) 속 피어나는 검기는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화산의 절기. 아직 품고 있었군."
"……닥쳐. 그 입을 닫아라. 우리를 더 이상 어지럽게 하지 마라."
"어지러운 건 내 말이 아니야. 네 마음이지. 이 땅의 귀기를 접하고 무엇이 그토록 저주와 원념을 낳았는지 궁금했어. 단지 죽음의 고통과 속박의 저주가 그렇게 만들었을까도 싶었지. 하지만 너를 보니 알겠어."
명한은 뒤늦게 흘러나오는 피를 손끝으로 훔치며 몸을 낮췄다.
상처는 그를 위축시키지 못했다.
태산과 같은 무게감과 태양과 같은 열기가 그를 중심으로 뻗어 나갔다.
"꺾인 무인의 마음. 피지 못한 화산의 검, 뿌리내리지 못한 소림의 법, 흐르지 못한 무당의 걸음. 너희들의 긍지와 신념. 모든 마음을 부러뜨려 이 땅에서 썩히고 있는 거야."
"나는…… 아니다. 아니야. 나는 아니야!"
"그럼 보여라. 아직 네게 화산의 검이 남아 있는지를."
"크…… 아아아아아!!"
악탁현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안개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의 힘과 육체를 이루고 있던 귀기의 정수였다.
전신으로 실금이 뻗고 머리가 순식간에 하얗게 물들었다.
"나는 화산의 악탁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죽음에 한 발을 걸친 상황에서도 검을 쥔 채, 한 그루의 매화나무처럼 꼿꼿하게 섰다.
이 땅에 발을 들일 때의 모습처럼.
화산검수, 악탁현이었다.
"내 남은 매화잎을 받아다오."
"얼마든지."
남은 걸 따 쏟아붓는 싸움.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
그래, 화산이었다.
악탁현은 뿌옇게 흐려진 기억의 단말을 붙잡았다.
대체 언제부터 이 모든 걸 잊고 있었던 걸까.
시간은 무의미하고 모든 건 제자리에 멈춰 있는 기분이었다.
[사형. 사형. 이번에 중요한 밀명을 받고 떠나신다면서요?]
이건…… 어린 사제의 목소리.
언제나 뒤를 쫓아다니며 사형, 사형 외치는 바람에 복주머니라는 별명까지 얻은 놈이다.
이날도 이렇게 찾아와 소매를 당기며 물었었다.
[사부님이 특별히 부탁한 일이야. 화산의 제자로서 완수해야지]
[역시 화산 제일의 기재! 사형이라면 어떤 임무라도 완수하실 거라고 믿어요!]
[하하. 나라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사제의 기대도 있으니 이번에는 힘 좀 써봐야겠다.]
좋다고. 자랑스럽다고 펄쩍펄쩍 뛰는 놈.
잘 다녀오라며 동그란 옥패를 선물해 주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무엇을 사가야 할까.
그런 생각만이 전부였다.
하지만.
사부님이 명하신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모든 상식과 모든 개념.
화산제자로서의 자긍심은 철저하게 부서졌다.
[화산파의 제일 기재로도 안 되는 건가?]
[열쇠가 없으면 문을 열 수 없다니까]
[환상루와 검성이라. 수백의 기재들을 쏟아부었는데도 문은 굳건하군]
[흥. 상관없어. 어차피 인간은 넘치고 넘쳐. 계속 붓다 보면 틈이 생기겠지]
[그래. 인간은 넘쳐나니까]
화산에서 낳은 불세출의 기재.
당대 제일의 검수.
장차 천년 화산의 상징이 될 인재.
그 어떤 것도 이 지옥 안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악귀에 몸이 토막 나고 지옥에서 올라오는 장기에 영혼은 썩었다.
화산의 매화는 더 이상 향기를 뿜을 수 없었다.
그렇게 100년이다.
"이것이 화산의 검이라는 건가!?"
문득 눈을 떠서 본 낯선 이의 주먹이 화산의 뿌리를 흔들었다.
코끝을 감도는 매화향, 언제나 웃음으로 반기던 사형제들, 자긍심 넘치던 검까지.
썩어 문드러져 그 형태조차 남지 않았으리라 생각한 기억과 감정들이 검을 통해서 되살아났다.
그래, 이것이 화산의 검이다.
"그대에게는 감사의 말로도 부족하다. 이 땅의 저주와 지독한 고통의 굴레. 그 연쇄의 사실 속에서 나라는 인간을 찾아 주었다."
"난 그저 화산의 검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하하하. 그야말로 낭만이로고."
웃음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사방 모든 공간이 매화나무로 뒤덮이고 그 향이 천지로 뻗어 나갔다.
한때, 화산의 절경에서 맞이한 그 향.
그립고 그립다.
"……너. 팔이 부서지고 있다."
"이 땅은 삶과 죽음을 묶어서 부여잡고 있다. 날 지탱하던 것도 그 힘이겠지. 하지만 이제 나는 다시 화산의 매화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니 더 이상은 이런 육체는 필요 없어."
"그쪽이야말로 낭만 아닌가?"
"화산에서 나고 화산을 위해 살았다. 죽음 이후에 문드러진 그 마음에 그대가 다시 싹을 틔웠으니, 후회 따위는 없어. 하나 남은 아쉬움이라면……"
"아쉬움?"
"내 사제. 악불군에게 선물을 전하지 못한 거겠지."
하얗게 웃던 사제의 얼굴.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세상의 이치대로 무너지는 몸은 더 이상의 예우를 지켜주지 않았다.
"네 사제가 악불군이었군. 그는……"
"그를 아는 건가?"
"조금이나마. 그는…… 좋은 무인이다. 화산을 상징하는 그런 무인. 그러니 아쉬움은 필요 없겠지."
"그런가. 그래. 그 아이는 잘 자라 주었군. 그럼 후회는 없다."
파스슥.
손가락부터 전신의 모든 부위가 차례대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꽃이 피면 지기 마련.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낙화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충분했다.
"……이 땅의 가장 깊은 곳에 한 구의 백골이 있다. 최초의 무덤지기이자 스스로를 이 땅에 묻은 검사. 검성, 파운락. 네가 바라는 건 아마 그곳에 있을 것이다."
"기억하고 있는 거냐?"
"희미하게. 하지만 명심해라. 우리는 분명 사기에 먹힌 피해자에 불구했지만, 그와 그를 따른 몇몇 무인들은 숭고한 의지로 스스로를 이곳에 버렸다. 네 선택의 결과를 반드시 생각해라."
"그건……"
파스슥. 파슥.
부서지기 시작한 몸은 더 이상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바람에 몸이 가루가 되어 날리기 시작했다.
"아아. 화산의 제자는 다시 화산으로 돌아가렵니다."
더 이상의 문답은 없었다.
악탁현의 몸은 완전히 가루가 되었다.
바람끝에 날리는 건 희미한 매화의 향기.
명한이 입을 닫고 그 마지막에 조용히 포권했다.
"잘 가시오, 화산의 검."
꽃잎이 떨어졌다.
#
힘 빠진 명한이 털썩 주저앉았다.
내공으로 억눌러 두었을 뿐, 그 역시 상처는 심했다.
향아가 날듯이 달려왔다.
"도련님, 상처. 상처가 심해요!"
"호들갑 떨지 마. 안 죽었으니까."
"으으으으. 일단 약부터 발라드릴게요"
부산스럽게 약을 꺼내는 향아를 뒤로한 채, 명한이 운기를 시작했다.
악탁현이 남기고 떠난 혼기가 천천히 스며들어왔다.
묵혼공을 통한 영단의 연성이 칠채향과 맞물려서 몸 안으로 약효를 퍼뜨렸다.
순식간에 내상이 회복되었다.
"후우. 진짜 무리나 하고."
한 걸음 늦게 다가온 은소소가 핀잔을 늘어놓았다.
막천우가 설명하기는 했으나 싸움 내내 초조했던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얼굴이 붉고 숨이 가빴다.
"정상적으로 싸우면 쉽지 않을 거 같아서. 나름대로 도박수를 던져 봤지."
"화산파를 떠올리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어느 쪽이든 통하긴 했을 거야. 귀기에 침식되었다고는 해도 그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하고 있었잖아."
"하긴.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치고는 멀쩡했지."
"그나마 최근에 이 땅에 묶인 사람이라서 그럴 거야. 아직 생의 기억이 남아 있던 거지. 설마 악불군의 사형인지는 몰랐지만."
"아. 그러고 보니 악불군은 이미……"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어. 사형제 모두 타인에게 이용당한 꼴이라. 기구하기도 하지."
내세에서는 평안하길.
명한이 다시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보다 그의 마지막 말은 뭐였어? 이 땅 끝에 백골이 있다고?"
"응. 검성, 파운락이라고 했어."
"검성, 파운락. 그럼 검성의 무공이 있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라는 거네?"
"그렇긴 한데…… 뭔가 좀 안 맞는 기분이야. 검성은 분명 전대 기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기억하는 연도 내에 있잖아. 하지만 이 섬은 그보다 훨씬 오래됐거든."
습작의 설정만 봐도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건 검성의 이름이 대를 이어서 전해지기 때문이네."
답은 막천우의 입에서 나왔다.
"시대적으로 뛰어난 검수에게 검신, 검성, 검제 등의 칭호를 붙이는 건 비일비재했으나, 제대로 된 검성은 언제나 하나였네. 겨뤄본 사람은 전부 그 특유의 검기를 기억하고 있지."
"막 장문도 겨뤄봤던 겁니까?"
"하하, 나는 아니네. 사부님이 그와 겨루고 크게 감탄하여 사문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고 하네. 그때 말하기를 당대의 검성은 아직 부족하여 받아들일 수 없다.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
"아. 그럼 신기자가 말한 섬의 명칭이 지금과 다른 것도……"
"초대 검성이라면 맞아 떨어지네."
아주 오래전.
처음으로 검성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간.
그가 이 섬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의미다.
‘그건 아마도……’
깊이는 구석은 있었지만, 섣불리 말하기는 어려웠다.
이 가정이 맞는다면 이번 일은 여러 가지로 복잡했다.
"근데, 이 땅의 밑바닥에 백골이 있다면 그건 무슨 수로 꺼내? 보통 깊어 보이지 않는데."
"흐음. 그건 나도 고민 중인데……"
무공으로 파 들어갈 깊이는 아니었다.
다른 길이라도 있는 걸까.
명한이 막 다른 쪽으로 사고를 돌리려는 차였다.
콰르르르릉―!!!
어디선가 들려온 폭음.
그리고 지축을 흔드는 진동.
"도, 동굴이!"
"무너진다!!"
상황이 일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