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서
첫 판단은 이랬다.
악탁현이 아무리 전대의 고수라 해도 이곳에는 현경만 둘, 화경이 셋이다.
숫자의 우위를 뒤로하더라도 순수한 무력에서 압도적이다.
이건 싸움이 되지 않는다.
분명 처음에는 그랬다.
카앙―!
날카롭게 울리는 충돌음.
명한의 몸이 붕 떠서 두 걸음이 물러났다.
파르르 떨리는 타구봉의 겉면에는 생전 처음 보는 흠집이 나 있었다.
파괴불가 속성이 붙어 있는 물건에 최초로 흠이 생긴 것이다.
‘불가능해.’ 속으로 외침이 가라앉기도 전.
검이 사선으로 짓쳐들어왔다.
카앙. 캉.
맞물리는 충돌에 몸이 크게 떨리고 속이 진탕되었다.
"소백!"
"돕겠네!"
열세에 놀란 막천우와 은소소가 합류.
두 사람의 검이 악탁현의 좌우에서 요혈을 노리며 쏟아졌다.
기세의 측면을 노린 공격에 놀랄 만도 한데, 악탁현은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땅을 발끝으로 찍으며 몸을 부드럽게 회전.
검세의 틈으로 빠져나가 검을 돌렸다.
완벽한 회피와 완벽한 반격이었다.
막천우와 은소소는 검을 수습하며 날아오는 검기를 쳐내기에 급급했다.
"젠장! 그냥 화산파의 적당한 고수 아니었어!?"
청청이 다급히 태산파의 무공으로 끼어들지만, 일검에 패퇴했다.
내공의 빼어남이나 엄청난 무공을 선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일보일검은 모두 기본기였다.
"방심하지 마. 모든 공격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에 귀기가 섞여 있어."
"보는 눈이 좋군."
해답을 내어놓은 건 명한이었다.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현경에 달한 그나 막천우가 힘에 밀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쓰는 힘이 상리에서 벗어나 있다면 가능으로 추가 기운다.
귀기. 죽은 자의 힘이며 현세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즉, 이 죽은 자의 세계와 겹쳐 있는 이 공간에서만 발휘되는 독특한 힘이었다.
‘그래서 타구봉 역시 흠이 난 거야.’
파괴불가라는 속성은 어디까지나 기존 세계의 법칙.
그것을 벗어난 힘이면 이를 무시할 수 있다.
"이곳은 세계의 접점. 내 힘의 근원 역시 너희가 딛고 있는 세계의 것과는 다르다. 그러니 너희의 이치와 상식 역시 통하지 않는다."
"……본래부터 그런 방식으로 구성된 건가?"
"말했을 텐데? 난 질문에 답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쯧―!"
호흡 사이로 파고드는 검.
그 예리함은 살갗을 파고드는 풀잎만큼 날카로웠다.
다급히 퇴보를 밟지만, 가슴 앞섬이 잘리며 피부가 갈라졌다.
붉은 피가 검의 궤적을 따라서 튀었다.
‘소백―!’ 다급한 외침과 함께 은소소의 검과 막천우의 검기가 쏟아졌다.
그야말로 장대비와 같은 공세.
하지만 악탁현은 이 빗줄기를 검으로 하나하나 걷어냈다.
검강도 검기도 예리한 무공도 모조리 그의 검을 넘지 못했다.
그를 중심으로 삼보의 공간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긁힌 수준이야."
상처를 손끝으로 씻어내는 명한.
검이 파고든 깊이는 깊지 않으니, 큰 상처는 아니었다.
― 욱신!
분명 그래야 하는데.
아찔한 감각에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몸이 잘게 떨릴 정도로 발열이 심했다.
"……귀기가. 청청, 금홍을."
상처를 파고든 귀기였다.
귀기는 말 그대로 죽은 자의 원념.
산 자를 저주하고 생명에 대해서 반발한다.
작은 상처라고 해도 그 안으로 파고든 귀기는 외부에서 맴돌기만 하는 섬의 기운과는 차원이 달랐다.
순식간에 생명을 좀먹고 정신과 육체를 흔들었다.
화악―!
상세가 가라앉은 건 금홍의 막이 명한에게 집중된 후였다.
신수의 상서로운 힘이 귀기를 누르고 반격의 힘을 주었다.
그 틈에 명한이 묵혼공의 힘으로 침투한 귀기를 밀어냈다.
"크흐윽. 대체 얼마나 많은 인간이 이곳에서 죽어간 거냐?"
보통 인간이었다면 미치고도 남을 원념이었다.
명정의 경지에 오른 명한의 정신마저 아찔하게 흔들릴 정도였다.
혼을 다루는 묵혼공의 이치가 귀기의 본질을 정면에서 맞닥뜨리지 않았다면 명한 역시 눈앞의 악탁현의 꼴이 될 뻔했다.
"그걸 견디다니 대단하군. 소림의 고승, 무당의 도사들도 하지 못하던 일이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쓸데없는 칭찬 따위는 필요 없어."
"칭찬이 아닌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이 땅이 언제부터 있었을까? 몇 명이나 이곳을 탐하여 발을 들였을까? 수십? 수백? 수천? 그중 화경은 몇이오, 현경은 몇일까. 그중 귀기를 극복한 건 정말로 소수일 뿐이다."
"처음부터 그랬다고 말하는 건가?"
"어째서 처음에 그리 집착하는 거지?"
"그야……"
명한이 상처에서 검은 피를 뽑아냈다.
바닥으로 후두두 떨어지는 귀기의 정수는 그대로 땅으로 흡수되어 핏빛 광석에 섞였다.
아스라이 퍼지는 흐름은 지금의 대화보다 더 많은 걸 전해 주었다.
‘원념과 원념. 저주와 저주. 온갖 부정의 산물 속에 다른 것도 섞여 있어.’
그것이 계속 캐물은 ‘처음’에 대한 이유.
"이해야말로 모든 일의 초석이니까."
금이 간 타구봉을 던지고 주먹을 쥐었다.
초대 천마가 창안했다고 알려진 ‘멸아’의 이치가 그 위로 깃들었다.
"그 힘은……"
"나도 네 질문에 답하는 사람이 아니야."
명한이 달려들었다.
#
검면에 손등이 닿았다.
굉음과 함께 면과 면이 튕겨 나갔다.
반발력에 몸이 흔들리고 중신에서 엇나간 발은 지면으로 미끄러졌다.
길게 그려지는 족적은 난잡한 그림이었다.
허나, 쉴 시간 따위는 없었다.
쉬익―!
뺨을 스치는 검.
귀기가 몸으로 스며들어와 다시금 호흡을 조였다.
막고자 하면 물러나야 하나, 명한은 그러지 않았다.
되레 한 걸음 나아가며 검을 쥔 손을 어깨로 밀어냈다.
살짝 벌어진 틈은 주먹을 위한 공간.
우드득―!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악탁현의 몸이 벽으로 날아가서 처박혔다.
바위가 통으로 무너지고 잔금이 전역으로 뻗었다.
인간이면 사지 육신이 그대로 폭발해도 모자란 위력.
허나, 악탁현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벽을 치며 몸을 밖으로 빼, 그대로 명한 쪽으로 달렸다.
벌어졌던 거리가 좁혀지는 건 그야말로 촌각.
벼락같은 검과 천둥 같은 주먹이 연달아 충돌했다.
"상처가! 이대로는 위험해!"
한 명은 맨주먹이고 다른 한 명은 검이다.
실력에 우위를 지녀도 상처 없이 제압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
하물며 악탁현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였다.
명한의 전신에 상처가 새겨졌다.
"기다려라."
"아버지!"
"아직 아니다. 소백은 생각 없이 달려들 아이가 아니야."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는 은소소를 막천우가 제지했다.
끼어들 기회는 몇 번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소백’이라는 인간은 생각 없이 싸울 성격이 아니었다.
손발을 맞춘 합공이 아니라면 여기서는 지켜보는 편이 낫다.
"어째서 침식되지 않는 거지?"
몇 합이나 지났을까.
닫혀 있던 악탁현의 입이 열렸다.
"멸아의 이치는 스스로의 존재를 지워 세상과 동화되는 것에 있다. 이는 내 것을 비워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도 일맥상통하지."
"헛소리. 네놈이 이 땅의 귀기를 받아들였다고?"
"말했잖아. 이해야말로 초석이라고."
명한의 주먹 위로 귀기가 맺혔다.
여전히 산자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저주하는 탁기였으나, 침범하지 않았다.
마치 그 너머로 가면 안 되는 듯한, 몸부림이었다.
악탁현의 눈동자에 의문이 깃들었다.
"대체 무엇이 이 땅의 기운을 부정하게 만든 것이지?"
"부정이 아니야. 긍정이지. 지독한 원념과 저주 이면에 새겨진 이 땅의 긍정."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있어. 귀를 기울인다면 너도 들을 수 있는 목소리."
명한은 땅의 고동을 통해서 깊은 곳의 목소리를 들었다.
묵혼공의 이치와 반야의 눈.
그리고 멸아로 스스로를 지워 만든 공백의 힘이었다.
지독하게 밀집된 원념은 공백을 찾아 스며들었고, 그 안에서 묵힌 이야기를 흘렸다.
명왕도가 만들어진, 처음의 이야기.
"이 땅에 새겨진 첫 사람들의 기억은…… 의로움이었어. 그들은 무언가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 이곳에 뼈를 묻었어. 누군가를 저주하거나 죽음으로 끌어당기기 위함이 아니야."
"웃기지 마. 이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 다가오는 자를 모두 죽여서 이 아래에 파묻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건 그저 매몰된 목적일 뿐이지. 처음은 아니었어. 지키기 위해 존재하던 땅이 수많은 세월 동안 죽음에 매몰되어 지금의 원념을 낳았지."
"네가 이 땅의 원념에 대해서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말했잖아. 이해야말로 초석이라고."
명한이 주먹을 휘둘러서 공간을 때렸다.
쩡― 하는 충격음과 함께 선이 그 주변으로 퍼졌다.
이건 땅에서부터 올라와 명왕도 전역으로 퍼진 귀기.
그 위에 새긴 균열이었다.
"초석을 쌓았으니 이제 나아갈 때다."
명한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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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검 한 자루가 노인의 등 뒤로 튀어나왔다.
수염을 멋들어지게 길러 두었던 노인이다.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검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다 천천히 주저앉았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옷을 적시고 바닥으로 번졌다.
"노백!! 감히 네놈이!!"
노인의 친구, 그렇게 생각되는 인물이 훌쩍 뛰어 그를 부축했다.
손을 다 적시고도 남을 피는 상처가 심각함을 나타냈다.
점혈로 지혈을 하고 황급히 내공을 불어넣지만, 쉽지 않았다.
노인을 관통한 검은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사멸검(死滅劍)! 더러운 배신자 놈이 루주의 물건을 쓰다니!"
"하하. 대체 누가 누구에게 배신자라고 하는지. 애초에 그분을 배신한 것은 네놈들 아니었나?"
"죽음을 거부하려는 괴물 따위를 따를 생각은 없다! 우리는 어르신의 판단이 옳다, 생각했고 그곳에서 갈라져 나왔을 뿐이다! 사형제들을 죽이고 루의 보물을 훔쳐 달아난 저놈과 같은 선상에 두지 마라!"
"그래 봐야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흑색 가면, 강유옥의 손짓에 노인을 꿰뚫은 검이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이기어검의 높은 경지에 검 자체가 가진 공능이었다.
한때, 천기자가 사용하던 신검.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불러오는 마검이기도 했다.
"쿨럭! 쿨럭!! 강유옥. 강유옥. 네놈이 결국 일을 저지르는구나."
"노백. 한때 루에서 존경받던 당신이 이런 꼴이라니. 당신 정도 되는 인간도 죽음은 두려운 모양이야."
"쿨럭!! 닥쳐라!! 우린 루주의 명을 받아 무덤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헛소리. 정말로 그럴 의도였다면 왜 열쇠를 빼돌렸지? 환상루에 충성을 하기에는 다가오는 죽음이 두려웠던 것 아닌가? 너나 거기 늙은이들이나 모두."
"네놈이―!! 커허헉! 컥!!"
노백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지고의 경지에 이른 그이나, 사멸검의 공능은 견딜 수 없었다.
상처부터 살점이 썩어들어가며 모든 기운을 앗아갔다.
"발악해봐야 이미 늦었어. 이루지 못한 대업을 다시 시작할 때다."
"쿨럭! 쿨럭! 미련한 놈…… 그리하면 그 잘난 황제가 네 죽은 아내를 살려주기라도 할 것 같더냐? 크하하하하! 턱도 없다, 이것아! 어차피 난 것은 모두 죽기 마련! 네놈의 계집 따위 이미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다! 오래야!!"
"이 늙은이가!"
강유옥의 역린이었다.
노백의 발언에 더없이 분노한 그가 한 걸음을 크게 움직였고.
그때……
"지금이야말로 루주의 명을 수행할 때다!"
노백이 남은 힘을 쥐어짜 바닥을 힘껏 때렸다.
쿠르르르릉.
이어지는 것은 굉음.
그리고 산이 흔들리는 것 같은 진동이었다.
"노백!!"
"크, 크하하하! 어디 재주껏 가져가 봐라!"
순식간에 동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