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235)

화산의 검

남궁세가가 뚫고 왔던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내, 자연동굴의 형태가 사라지고 반듯하게 정비된 길이 나타났다.

중간중간 박힌 횃대나 갈림길 표시 등은 제법 오랜 시간 이 길을 사용했음을 증명했다.

"최근에도 손본 흔적이 있어."

"소문이 퍼지기 이전부터 이곳에서 상주했다는 건가. 무엇 때문에?"

"검성의 무덤을 찾았는데, 열지 못한 것 아닐까?"

"못 열어서 중원 사람을 불러 모은다고? 그것도 이상한데."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마땅한 해답이 없었다.

"근데, 소백. 이 위치를 신기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래. 그것도 의문이지. 대가 운운하며 검성 무덤의 위치를 알려준 것부터가 뭔가 속셈이 있었던 거야."

"우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아니. 신기자가 셈이 많은 인간이기는 해도 이건 맞지 않아. 차라리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지.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야 하는 이유."

"무언가를 해 줬으면 해서 보냈다?"

명왕도에 모인 무리에는 두 종류가 있다.

소문을 따라 검성의 무덤을 탐하려는 자들.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얻어서 명왕도를 찾은 무리.

장소가 같다고 목적도 같으리란 법은 없었다.

명한의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이곳에서 계속 생각해 봐야 의미가 없겠지. 움직이는 것이 어떻겠나?"

침묵을 깬 건 막천우의 말이었다.

"네. 멈춰서 생각한다고 나올 답이 아니겠어요. 우리를 보낸 이유가 있다면, 아마 그 답은 저 너머에 있겠죠."

명한이 반듯하게 놓인 길의 저편을 가리켰다.

깊은 곳으로 이어져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금홍. 기운이 침식하지 못하게 막을 계속해서 쳐 줘."

"뺘아!"

일행을 금적색의 막으로 보호한 채.

"가죠."

다시금 걸음을 떼었다.

#

지하로 깊어질수록 귀기의 침범은 점차 강해졌다.

죽은 자의 원념이 귀에서 속삭이고 머리를 통째로 후벼 파는 기분이었다.

금홍과 명한의 막이 없었다면 이미 씌고도 남을 정도였다.

"지독하네. 이 아래에 정말로 지옥이라도 있는 건가?"

"이런 곳에 검성의 무덤이라니."

"죽은 뒤에 이곳이 이렇게 된 건지, 아니면…… 이런 곳이라서 찾아와서 죽은 건지."

풀리지 않는 의문의 꼬리를 잡으며 계속 걸었다.

감각으로 셈하기를 대략 반나절.

깊이로 따져도 밖에서 본 산의 절반은 아래로 파고 들어온 수준이었다.

"여긴…… 뭔가 다르군."

그렇게 도착한 공간.

폭이 좁은 통로와는 다르게 탁 트인 공간이었다.

못 잡아도 거대 저택의 정원 정도.

지금까지는 못 보던 기묘한 무늬와 생소한 조각들도 주변에 널려 있었다.

"이건 해산파의 조사령 아닌가?"

"이쪽을 봐봐. 이건 화산파의 물건이야."

"저긴 금환표국의 상징도 있어. 이것들 전부 밖에서 온 물건이야."

하나하나가 평범한 것이 없었다.

지금은 맥이 끊긴 해산파의 조사령이나 화산파의 매화검수가 사용하던 증표.

한때, 중원을 호령하던 금환표국의 상징마저 세월에 삭아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이곳까지 꽤 많은 사람들이 왔었다는 증거였다.

"희미하게 핏자국도 남아 있네. 이곳에서 큰 싸움이 있었고 많은 사람이 죽은 거야."

"대체 뭐 때문에? 이런 거대 문파의 사람들이 움직였다면 소문으로라도 남아 있을 텐데. 나는 단 한 번도 명왕도에서 죽은 무림인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아마 소문이 퍼지지 못하도록 막았겠지. 아니면……"

"아니면?"

"이곳에 모인 이들이 각자의 문파에는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

툭. 명한이 흙에 덮인 묘한 상징을 발끝으로 찼다.

양쪽으로 갈라진 산세가 하나로 뭉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 놓인 흔적 사이사이에 같은 형태의 상징이 계속해서 발견됐다.

"다른 세력에 같은 상징. 이들 모두가 문파에 잠입한 첩자였다는 거야?"

"어쩌면. 신교만 봐도 여러 세력의 첩자들이 섞여 있잖아. 어쩌면 이들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어."

"각각의 문파에서 숨어 지내다가 어떤 정보를 얻어서 다 같이 이곳으로 모였다? 그리고 큰 싸움 끝에 모두가 죽었다는 건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거겠지. 모든 걸 버리면서까지 이곳에 모여야 했던 이유."

명한이 발을 굴러 내공을 주변으로 퍼뜨렸다.

흙이 둥글게 말려서 주변으로 쭉 밀려났다.

먼지와 돌가루 따위와는 다른 독특한 재질의 바닥이 표면으로 드러났다.

검붉은 색에 반투명한 재질을 가진 독특한 형태였다.

"이건 대체 뭐지? 철처럼 단단한데 안쪽은 반투명하군."

"묘강에서 생산되는 흑운철하고도 닮았네요."

"아니. 내가 철에 대해서는 조금 알아. 이건 흑운철이 아니야. 되레……"

"피."

막천우의 말을 명한이 맺었다.

"아, 안쪽에! 젠장! 안쪽을 봐!"

"꺄악! 도련님, 돌 안쪽에 사람 시체가 있어요!!"

"허어. 이게 전부 피가 굳어서 생긴 물질이라 이건가?"

지면을 이루고 있는 광석 안쪽으로 수많은 시체들이 보였다.

다리가 잘리고 팔이 잘리고 몸통이 갈라진.

저마다의 복색, 저마다의 생김새를 지닌 셀 수도 없는 엄청난 숫자의 시체였다.

명한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이 안으로 들어오며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기운이 있었어. 벗어나지 못하고 한곳에 메여 있는 영혼의 절규. 어째서 그런 건지 몰랐는데, 이걸 보니 알겠네."

"이 시체들의 혼이 저 안에 갇혀 있다는 건가?"

"어떤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보입니다. 이 정도 숫자를 한곳에 묶어 두었으니 지독할 정도의 귀기가 생기는 것도 당연하죠."

물처럼 혼도 고이면 썩는다.

한곳에 매인 혼이 썩고 썩어 지독한 원념이 되는 건 당연한 이치.

숫자를 헤아리자면 귀기가 명왕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들은 이곳에서 이런 방식으로 죽은 거지?’

우연 따위로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 우우우우우……

― 그으으으으……

순간. 바람과 섞인 신음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적이다."

깊이 생각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것일까.

우드드득. 드득.

바닥이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

전투가 시작될 무렵.

명왕도에 작은 나룻배 하나가 조용히 도착했다.

다섯밖에 안 되는 작은 무리가 타고 있었다.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이게 네 수라면 조악할 뿐이다."

셋은 입을 실로 꿰매고 양팔은 소매를 묶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 둔 기괴한 인간들.

남은 둘은 백선에 흰 학사의를 입은 신선 차림의 남자였다.

나란히 명왕도 해변에 내려서서는 먼 곳을 응시했다.

"사형께서 언제부터 이 사제의 수를 고려하셨는지 모를 일이군요."

"네놈의 얄팍함 때문에 열쇠를 빼앗겼다. 내가 그럼 웃고 있을까?"

"열쇠를 빼앗긴 건 어디까지나 사형의 잘못입니다. 강유 도련님께서 사형을 믿고 맡긴 것 아니었습니까? 그걸 그렇게 뺏겨서야 대국을 치르겠습니까?"

"네놈은 선법보다 입이 매섭구나."

"어련하겠습니까."

둘의 대화는 한마디 한마디가 날 서 있었다.

비슷한 복장에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지만, 서로를 경계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을 경쟁하고 싸워왔던 사이이기 때문이다.

파운의 아래에서 오른팔로 움직이는 신기자.

그리고 맞은편은 강유의 뒤에서 수를 놓는 구문자였다.

"쯧. 사태만 이 지경이 아니었어도 네놈과 같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데."

"저도 이런 동행이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열쇠를 빼앗긴 이상 명왕도의 그것이 강탈당할 것도 고려해야 할 터. 혼자서는 어렵습니다."

"그렇겠지. 네놈이 날고 기어봐야 혼천의 개들을 만나면 줄행랑일 터니."

"하하. 누가 보면 사형은 아닌 줄 알겠습니다?"

"시끄럽다. 길이나 열어."

비웃음에 구문자가 혀를 차며 손짓했다.

신기자 역시 웃음을 거두고 품 안에서 커다란 붓을 하나 꺼냈다.

휙휙. 바닥에 먹으로 긋는 선들이 순식간에 하나의 문양을 만들었다.

사람 두엇이 설 정도의 크기를 지닌 문이었다.

"회색으로 칭한 이들은 곡(谷)에 도달했나?"

"요동치는 귀기를 보니 망자들이 깨어난 모양입니다. 적어도 저희가 도착할 때까지는 길을 열어두겠죠."

"제법 친한 듯 말을 하더니 결국에는 쓰고 버리는 패인가."

"그들이 곡에서 죽을 거라고 보십니까?"

"흥. 영겁의 세월 동안 묵힌 죽음이다. 나와 너. 하물며 사부님조차 그 안에서는 쉽지 않을 텐데, 고작 속세의 무인 따위가 무얼 한다고."

"그럼 저랑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내기?"

신기자가 가볍게 웃으며 손가락을 하나 치켜들었다.

"그들이 살아서 곡을 벗어난다면 제 승리. 죽는다면 사형의 승리입니다."

"흐음. 상품은?"

"서로가 용인할 수준의 소원으로 하죠."

"우습군. 좋다. 네 알량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라."

"하하. 저는 후회 같은 건 안 합니다, 사형."

웃음 섞인 말을 흘리며 문 위로 올라서는 신기자.

구문자도 그 옆에 나란히 섰다.

이내, 흰빛이 짧게 명멸 두 사람의 모습이 지운 듯 사라졌다.

바닥에 그려둔 문 모양도 마찬가지.

바닷바람에 씻은 듯 지워졌다.

#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명한은 쉽사리 정의할 수 없었다.

분명 죽음에서 일어났으니, 사자(死子).

하지만 이미 한 번 죽음을 겪은 자가 산 자와 같은 모습으로 육신을 지닌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 다시 그때가 된 건가."

반쯤 찢긴 화산파의 복장을 한 남자.

살점은 문드러져 썩은 내장이 보이고 뼈와 근육은 제멋대로 붙어 있었다.

소리를 내는 것조차 신기한, 상식과는 괴리된 존재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너는 누구냐?"

"나? 이름이라. 기억이라는 걸 해본 지도 오래로군. 그래. 내가 알기로는 탁현. 아마 그렇게 불렸던 것 같다."

"탁현? 탁현? 악탁현? 설마 화산중검, 악탁현이 너라는 거냐?"

"아. 그래. 그 이름이었지."

화산중검, 악탁현.

대략 100년 전의 사람으로 화산이 낳은 불세출의 기재였다.

하지만 과거 한 시점에서 역사에서 사라진 뒤,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지금 이곳에 시체와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다.

믿기지 않았다.

"그리 놀랄 것도 없어. 저 뒤에는 더한 놈들이 있으니까. 오늘은 그저 내가 먼저 깨어나서 움직였을 뿐이야."

"먼저 깨어나? 무슨 소리지?"

"여기는 곡(谷). 산 자와 죽은 자의 접점이다. 우리는 이곳을 통과할 수 없도록 입구를 틀어막은 병사라고 할 수 있지."

"어째서 당신들이 이곳을 막는다는 거야?"

"그야. 그래야 하니까."

악탁현이 반쯤 부서진 왼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역겨움을 자아냈다.

하지만 역겨움이 경악으로 변하는 건 고작 한 호흡이면 충분했다.

그륵. 그륵.

바닥을 덮은 검붉은 광물이 다리를 타고 올라와 그의 부족한 살점과 내장.

그리고 뼈를 채워 주었다.

넝마에 가까운 시체에서 건장한 무인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우린 안식조차 허락받지 못한 죄의 후손. 이곳을 막고 접근하는 모든 이들을 죽여 침묵으로 끌고 갈 뿐이다."

"죄의 후손? 대체 무슨 소리야?"

"말했잖아. 우린 병사라고. 네 질문에 답을 해 줄 그런 존재가 아니야."

"……!"

바람이 갈라지고 악탁현의 검이 곧게 섰다.

그곳에 있는 건 더 이상 기괴한 존재나 죽음에서 돌아온 시체 따위가 아니었다.

검(劍).

"와라. 내게 죽는 것이 그나마 편할 테니."

한 자루의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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