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싸움이 벌어졌다.
남궁환과 남궁세가의 무리들은 완전히 귀기에 침식당해서 이지를 잃었다.
마구잡이로 달려들어서 생사를 불문하고 덤볐다.
맞서는 명한 등도 손에 여유를 두기 힘들 정도였다.
"후후후. 재미있지 않나?"
그 모습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는 막군천.
남궁세가 무리를 유도.
그들을 귀기에 절여서 명한 일행 쪽으로 보낸 것도 그였다.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도 모르고 발악하는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군요."
"그래. 그게 바로 저들의 한계지. 저들만이 아는 세계만을 진실이라고 아는 우매한 것들."
막군천의 옆에는 못 보던 인물이 부복해 있었다.
흑의로 전신을 두른 묘한 복색의 남자였다.
"명령만 내리시면 지금이라도 공격이 가능합니다."
"아니. 아직 아니다. 어르신들께서 문을 열기 위해서는 더 커다란 제물이 필요해."
"설마 릉의 안까지 보낼 생각이십니까? 자칫 잘못하면 어르신들과 맞닥뜨릴 위험이 있습니다."
"후후후. 걱정하지 마라. 섬의 귀기로 살아난 그들에게 양지의 벌레들은 좋은 양분일 뿐. 저들을 집어삼키고 더욱 짙은 귀기로 이 땅을 덮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어르신들도 이면의 문을 열겠지."
막군천이 양손을 치켜들며 격정적으로 말했다.
아버지를 잃고 무당을 박차고 나온 뒤, 목적 잃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
그건 현존하는 무림 이면의 어떤 존재들을 양지로 불러오는 일이었다.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존재.
이를 선두에 서서 이끌 수 있다는 건 지극한 영예이자 삶의 원동력이었다.
"가서 어르신들께 전해라. 열쇠를 사용하는 시점은 땅의 시간이 보름달에 닿는 순간. 루의 늙은이들이 아무리 강해도 그때가 되면 절대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네, 도련님."
흑의 남자는 답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제 곧이다. 곧 세계의 문이 열린다. 그때가 되면 모든 이들이 알게 되겠지. 나 막군천이 어떤 사람인지."
광기에 물든 목소리가 그 위를 덮었다.
#
마지막으로 봉을 휘둘렀다.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남궁환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분수처럼 솟는 피는 부상의 정도를 알려주는 척도였다.
"소백, 되겠어?"
"해볼게."
쓰러진 남궁환의 머리를 명한이 움켜쥐었다.
붉은 피 너머로 꿈틀거리는 귀기가 느껴졌다.
완전히 남궁환이라는 영혼에 달라붙어서 기생충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산 것에 대한 집착.
보물에 대한 지독한 갈망.
무차별적인 원녕.
어마어마한 부정이 그 안에서 느껴졌다.
‘젠장. 토할 거 같네.’
묵혼공이 경지에 이른 명한이지만, 이건 과했다.
앞서 일행을 괴롭히던 귀기가 1이라면 이건 10. 아니 100은 족히 됐다.
깊고 깊은 수렁 속에서 얇은 한지 한 장을 꺼내 올리는 격이었다.
"나도 도울게."
"뺘!"
청청과 금홍이 가세했다.
금홍의 기운이 주변을 감싸며 남궁환의 귀기를 억눌렀다.
지독하게 달라붙던 귀기도 조금씩 세가 약해지며 명한의 손짓에 따라서 딸려 올라왔다.
소리는 없었지만 쩍, 하는 울림이 들린 듯한 착각.
명한이 풀썩 주저앉으며 자신의 오른손을 감쌌다.
"소백!"
"아직 다가오지 마."
황급히 다가오는 은소소를 제지하며 명한이 오른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검은색 일렁임이 그 위에서 발악하다, 천천히 잦아들었다.
향 하나를 태울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야 검은 일렁임은 완전히 사라졌다.
"후우. 지독하네, 이거."
"괜찮은 거야?"
"응. 귀기는 완전히 제거했어."
명한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지금껏 꽤 많은 혼을 묵혼공으로 거두었다 생각했는데, 이런 건 처음이었다.
원념의 깊이도 다르고 무게와 세월도 차원이 달랐다.
애초에 한두 명이 묶여서 만든 귀기가 아니었다.
‘그러니 남궁환 정도의 고수도 저렇게 당한 거겠지.’
지독하고 지독했다.
"끄…… 끄으으으."
"아. 남궁환이 정신을 차리나 봐."
귀기를 뜯어낸 자리에서 남궁환이 천천히 깨어났다.
그는 머리의 상처에 잠시 고통스러워하더니, 두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훑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듯, 어딘가 멍한 얼굴이었다.
"남궁환. 정신은 드나?"
"넌…… 막천우와 함께 있던 인간이군. 분명 이름이…… 큭!!"
"어이, 남궁환!"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남궁환.
상처 때문일까 싶어, 명한이 향아 쪽으로 손을 뻗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하지만 그런 외상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이런 인간이 아니다. 어째서 이런 감정이 드는 거지?"
"정신 차리고 똑바로 말해. 뭐가 어떻다는 거지?"
"왜 내가 후회 같은 걸 하고 있냔 말이다! 어째서 널 두려워하는 거냐고!"
"……같이 뜯겨나간 건가."
남궁환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다.
몇 마디에서 드러난 감정 너머의 것들이 섞여 있었다.
귀기를 뜯어내는 과정에서 그의 영혼도 상처를 입은 것.
감춰 두었던 후회, 불안, 두려움 따위고 겉으로 드러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 그 인간. 막군천 때문이다. 그놈이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했어."
"막군천? 막군천이 뭘 어떻게 했다는 거지?"
"그놈이 샛길을 안다고 우리를 이상한 통로로 안내했다. 그 안은 이곳과는 다르게 잘 정비되어 있었지. 처음에는 정말로 숨겨진 길이라 여겼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크윽!!"
"남궁환!"
"오, 오지 마! 다가오지 마!! 내 잘못이 아니야! 나는 남궁세가를 최고로……으아악!!"
남궁환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렸다.
안휘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남궁세가의 가주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인 것이다.
영혼의 상처는 지위도 체면도 막지 못하는 아픔이었다.
"아니,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아. 막 문주님."
때마침 돌아오는 막천우.
"마, 막천우!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야! 나는 그저 무당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었을 뿐이야! 날 괴롭히지 마라!"
"……이건 뭔가? 남궁 가주가 왜 이런 꼴이 됐지?"
"말하자면 깁니다."
짧게 한숨을 내쉬는 명한.
주검산장 일부터 남궁세가는 아군보다는 적에 가깝다.
기회를 잡았으니 이 틈에 정보든 뭐든 캐내는 편이 유리한 것이 사실.
하지만 유아퇴행에 가깝게 벌벌 떠는 남궁환을 보자니 그런 마음이 쏙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었다.
"밖에 무당파 사람들이 대기 중이죠?"
"그렇네만."
"일단 이 사람들부터 정리하죠. 버리고 가도 무방하지만…… 뭔가 좀 그렇네요."
"그만큼 자네가 인덕을 지녔다는 거겠지."
"저랑 인덕은 거리가 먼 개념입니다만."
"뭐, 그런 셈 치게나."
명한이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덧붙일 말이 부족함도 있지만 ‘후후후후. 좋은 사윗감이군.’이라는 눈빛의 막천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
고개를 돌리고 쓰러진 이들을 하나씩 깨웠다.
#
급하게 끝낼 일이 아니다.
명한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행보를 정했다.
우선은 남궁환을 비롯한 남궁세가 무리들.
동굴 밖, 섬의 초입으로 옮기고 무당파의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군천. 그 아이가 그랬다는 건가."
다음으로 막군천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샛길을 알고 남궁세가를 유인했다는 건 이쪽 지리에 해박하다는 의미입니다."
"소문을 퍼뜨린 것도 그 아이라고 하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겠군."
"게다가 그는 같은 길을 걷고도 남궁환과 다르게 아무런 이상이 없었죠."
"……"
지리를 알고 대처법도 안다.
이 말인즉슨, 명왕도 자체가 함정이라는 의미.
혹시나 하던 생각이 확신으로 변한 상황이었다.
"역시 주저하시는 겁니까?"
"동생의 하나뿐인 아들이네. 아우를 이 손으로 죽였는데, 그 피붙이까지 죽이는 건……"
"그렇군요. 그럼 막군천에 대한 건 제게 일임해 주세요."
"자네에게 말인가?"
"막군천 자체보다 배후를 알아내야 합니다. 막 장문보다는 제가 더 어울리는 일이겠죠."
막천우는 분명 엄청난 고수.
하지만 사람이 유하고 망설임이 많다.
막천강과의 싸움에서도 은소소 죽기 전까지는 손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는가.
막군천을 그에게 맡긴다면 분명 틈이 생길 것이다.
‘습작의 작은 부분이라도 유지되고 있다면 막군천은 살려두면 안 돼.’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훗날을 고려해서도 안 된다.
"후우. 알았네. 그 아이는 자네에게 맡기지. 하지만 가능하면 손속에 정을 두었으면 하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나?"
"첫 번째는 기존의 길을 그대로 탐색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그럼 두 번째는 뭔가?"
"남궁환이 가로질렀다는 샛길입니다."
"뭐?"
깜짝 놀란 막천우의 반응에도 명한은 담담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
위험성이야 당연히 높겠지만, 갈 수만 있다면 이쪽이 지름길이다.
"저는 두 번째를 택하고 싶습니다."
빨리빨리.
명한은 한국인이었다.
#
어느 시점, 어느 공간.
거대한 유리창으로 나눈 듯한 공간 안에 몇 사람이 서로의 상(狀)과 대치하고 있다.
위와 아래가 없고 좌우가 구별되지 않는 괴상한 장소였다.
"이렇게 시간을 끈다고 달라질 것은 없소."
백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
혼천의 백면이었다.
뒤집힌 공간을 거꾸로 걸으며 여유롭게 말했다.
"다 삭아 빠진 것들이 무슨 욕심이 많아서 이리 찾아온 것이냐."
이를 받아친 것은 머리카락과 수염이 길게 자라서 몸 전체를 뒤덮은 이상한 모습의 노인.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 성격과 힘이 느껴졌다.
"삭아 빠진 것으로는 댁들이 더하지 않소. 그만큼 나이를 먹고 세월을 견뎌 왔으면, 이제 슬슬 삼도천을 건너야지."
"흥. 어림도 없는 소리. 세상이 바르게 돌아가고 있는데, 묵은 것을 꺼내어 대체 무슨 사단을 벌일 셈이냐. 내가 살아있는 한, 어림도 없다."
"하하하. 노인네가 욕심만 많아서는. 세상의 정의? 이치? 헛소리는 집어넣어. 어차피 네놈들도 영생을 위해 집착하고 있는 반송장 아닌가?"
"이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이."
비아냥에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간의 위아래가 뒤바뀌고 상을 비추는 축이 제멋대로 돌아갔다.
공간감이 쓸모없어졌다.
"발악은 그만하시오."
그때,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백면의 옆에 소리 없이 내려오는 흑색 가면의 인물이었다.
뒤틀리던 공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했다.
수염투성이 노인이 입술을 비죽이며 토로했다.
"혼천의 광대들이 오늘 다 모이는구나."
"어차피 그대들이나 우리나 세상에 던져진 광대인 건 마찬가지요."
"아서라, 애송이. 옛것을 탐한 자들의 말로를 우리는 안다. 그렇기에 세상 변경에서 이리 영겁의 시간을 고통받고 있는 것이지. 네놈들이 대체 뭘 안다는 거냐."
"알고 모름은 상관없소. 세상은 이미 흐르기 시작했으니."
흑색 가면의 남자, 흑면이 품에서 황금 열쇠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광채가 도드라진 열쇠였다.
"너, 너……! 네놈이 어떻게 그 물건을!?"
"배신자의 후손에게 이 중요한 물건을 맡기다니. 배짱도 좋더군."
"강유옥!! 네놈이 탐욕에 눈이 돌아갔구나!"
"눈이 돌아간 것은 당신들이오. 본래 모시던 주인을 버리고 탐욕을 취한 어리석은 인간들. 결국, 그 선택이 당신들을 벌하게 되겠지."
흑면, 강유옥의 손을 떠난 열쇠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파직―!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열쇠 주변으로 맞물리고 공간에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어긋나고 뒤틀린 모든 현상이 풀려가는 것이다.
"네놈들 뜻대로 둘 것 같더냐!? 절대로 그것만큼은 넘길 수 없다!"
"사형! 사제! 오늘 이곳이 우리의 무덤이 되겠구려!"
노인과 노인 주변의 다른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전이 불가한 상황.
강유옥이 그 모습을 눈으로 쭉 훑으며 한마디를 뱉었다.
"황제의 육체를 받아가겠다."
개전의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