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235)

초대

수백의 사람이 마을 주변으로 집결했다.

굵직한 이름을 지닌 이들이 수십이었다.

서로를 견제하며 기세를 돋우는 것이 제법 흉흉했다.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소?"

그리고 그 앞을 지키는 것은 다름 아닌 막천우와 무당의 검수들.

수백의 사람을 앞에 두고도 한 점의 물러남이 없었다.

"지금 무당파가 검성의 보물을 독점하겠다 이거요?"

"우린 혼란을 막고자 할 뿐이오. 갑자기 검성의 무덤 위치가 중원 전역으로 퍼졌소. 이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소이까?"

"흥. 핑계는 그럴듯하군. 결국, 몇 마디 말로 사람을 물리고 독점하려는 것 아닌가?"

"흑백쌍살 노선배. 이 막 모는 검성의 보물이 필요 없는 사람이외다."

"으, 으윽."

막천우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막강한 기세.

말을 꼬아 핀잔을 주던 흑백쌍살이 인상만 구기며 물러났다.

연배로 찍어누르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했다.

"하하. 무당의 기세가 가히 용을 보는 듯하구려. 장문이 바뀌고 주춤한다 싶더니, 그건 다 헛소문이었군."

"벽력문의 노 선배군요."

"이 늙은이를 선배라 칭해주는 건가? 막 장문이 그래도 사람 됨됨이는 돼 있구려."

"어찌 청해의 노학수 선배를 몰라보겠습니까. 일수에 왜적을 도륙 내어 청해일수라는 명칭까지 얻지 않았습니까. 평소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좋군, 좋아. 막 장문께서 사람을 허투루 대하지 않아. 그럼 그 자세를 빌려서 한 가지 묻겠소."

청해일수, 노학수의 몸에서 무거운 기세가 풍겨 나왔다.

능히 한 성의 제일고수를 자처할 만큼의 기세였다.

기력이 약한 이들이 모두 몇 걸음씩 물러나 이를 피해야 했다.

"무림인이 보물을 탐하는 것은 본능. 그것이 검성의 비전이라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이도 허다할 것이오. 내, 무당의 청백을 의심하지는 않으나 과연 혼자서 모두를 막을 수 있겠소?"

"선배의 고견을 귀담아듣겠습니다."

"힘이오."

양손을 내리며 흑색의 기운을 품는 노학수.

강대한 기운에 주변 공간마저 일렁거렸다.

"결국, 무림이라는 곳은 강자존. 힘으로 무당의 주장을 피력한다면 대부분은 떨어져 나갈 터. 이 노학수가 그대의 첫수를 받아내고 싶소."

"노 선배."

"날 선배라 칭한다면 힘을 아끼지는 말아야 할 것이오."

뚜렷한 태도에 막천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력 충돌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

검을 뽑아 들고 내기를 집중했다.

"파랑수(波浪手)라 하오. 그대의 무공은?"

"……혼원일기."

무당의 것으로 무당 밖에서 태어난 무공.

"하하하! 무당제일검의 실력을 견식하겠소!"

"실례하겠습니다, 노 선배."

섬광이 명멸하고 바람이 점으로 빨려들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사라져 먼지 폭풍 속에서 번개처럼 충돌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촌각.

맞물린 소리가 우레처럼 터져 나오고 두 사람의 거리가 다시금 벌어졌다.

"혼원일기라. 그야말로 신공이군."

"과찬입니다."

"내가 졌소."

입가의 피를 닦으며 포권하는 노학수.

짧은 대결이었지만, 격차는 충분하게 느꼈다.

전력을 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막천우의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마음만 먹었으면 일수에 목이 달아나고도 남았을 터.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해 준 것이 다행일 따름이었다.

"하하하! 이곳에 모인 병아리들아! 네놈들이 이 노학수를 꺾을 실력이 되지 못한다면 냉큼 도망치거라. 여기 이 무당의 검은 그야말로 천하제일이구나!"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떠났다.

이건 그 나름의 경고이자 기준이었다.

"또 도전할 이가 있소?"

막천우라는 벽의 높이를 가늠할 기준.

#

막천우. 그리고 무당파라는 벽은 높았다.

엄청난 숫자의 무림인들이 검성의 무공을 노리며 몰려들었지만, 섬으로 넘어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포기한 이들도 상당했다.

수천이 수백이 되고 다시 수십으로 줄었다.

이제 남은 건 정말로 절실한 인간.

혹은 벽을 넘을 자신이 있는 이들이었다.

"슬슬 움직여도 될 거 같은데?"

"아무리 막천우가 강해도 혼자서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 지치고도 남을 시간이야."

"후후. 그럼 네가 먼저 도전할 생각인가?"

"흥. 힘을 뺀 뒤에 기회를 잡으려고?"

서로 눈치를 보며 기회를 탐하는 분위기였다.

"누가 보면 무당파가 무림의 주인이라도 된 줄 알겠군."

그때였다.

뒤늦게 합류한 한 무리가 정면으로 접근했다.

숫자도 기세도 다른 이들과는 격이 달랐다.

"남궁세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환도 왔어."

"전력을 전부 끌고 온 거 같은데? 제대로 작심했네."

남궁세가의 전력이었다.

막천우를 선두에 세운 무당파를 전면에서 맞서서 기세를 돋우었다.

팽팽한 기류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 위태로웠다.

"남궁세가의 가주께서 직접 오셨군요."

"흥. 무당파의 장문이 직접 왔는데, 우리도 면은 세워야지. 안 그렇소, 막 장문?"

"하하. 이 자리가 체면을 요하는 곳이 아니외다, 남궁 가주. 번거롭게 이런 곳까지 행차할 필요가 무에 있겠소?"

"필요라. 하긴 무당의 검은 천하제일을 자랑하니 검성의 독문무공 따위는 탐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우리에게 보물을 견식할 기회를 주는 건 어떻소?"

"제가 어찌 남궁세가의 행차를 억지로 막겠소이까. 다만, 불필요한 피해는 서로 간에 없으면 좋으니 정중하게 권유할 뿐이오."

"권유라. 무당파의 검으로 말이오?"

막천우가 답 대신 가볍게 웃어 보였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의 목적과 의도를 알고 있다.

허울 좋은 몇 마디 말로 바뀔 가능성이 없다는 것도.

"좋군. 안 그래도 무당의 검을 견식하고 싶었던 바요."

"오늘 남궁세가의 절기를 경험하겠구려. 이거 영광이오."

"아직 실력이 부족하여 실수가 왕왕 나오곤 하오. 자칫 내 검이 막 장문을 벤다 해도 고의가 아님을 알아주시오."

"물론입니다, 남궁 가주."

검을 빼 든 두 사람의 기세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예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 땅을 베고 벽을 할퀴었다.

쩍쩍 갈라지는 바닥에 다른 무인들은 황급히 물러나야 했다.

"그 검으로 아버님도 베었던 것입니까?"

"……!"

순간,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고 막천우가 다급하게 물러났다.

이런 곳에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백부님."

"……군천이냐?"

"네. 그리 귀신 보듯 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람을 밟으며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는 한 남자.

바로 막군천이었다.

막천우의 동생인 막천강의 아들.

"네가 이곳에는 어인 일이냐?"

"무당파에서 쫓겨나 무림을 떠돌던 중에 검성에 대한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혹시 압니까. 검성의 무공을 얻으면 아버님의 복수를 할 수 있을지."

"군천아. 네 아버지인 천강은……"

"듣기 싫습니다. 무당 장문이라는 직위를 탐하여 아버님을 죽인 당신이 대체 무슨 변명을 할 생각입니까?"

"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 위선자 같으니. 내가 당신을 살려두는 건 힘이 부족하기 때문. 그딴 변명 따위에 설득돼서가 아닙니다."

날카로운 말에 막천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상황이 어지러웠다고 한들 자신의 손으로 동생을 죽인 것은 사실.

그 사실에 막군천이 분노하는 것도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었다.

"그 잘난 군자의 얼굴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지켜보고 싶군요."

"……그날의 일을 변명하지는 않는다. 허나, 후회도 없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내 검은 동생을 베겠지."

"당신! 결국, 장문직이 탐나 동생을 베었으면서 온갖 변명으로 치장을 하고 있군요. 그러고도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떳떳하고말고! 그 자리에는 나도 있었으니까!"

뒷말을 받은 건 막천우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너!"

"이렇게 마주 보는 건 처음인가? 뒤에서 아주 재미있는 수작을 벌여 주었어, 막군천."

"소백. 결국, 네놈도 검성의 무학이 탐나서 온 건가?"

"하. 어중간하게 돌려서 묻지 말라고. 오기를 바랐잖아."

"……"

"하긴. 속이 그렇게 시커먼 놈이니 아비가 죽자마자 무당을 떠나 다른 곳에 의탁했지. 무엇이 진실인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면서 말이야. 안 그래?"

"네놈이!"

막군천이 검을 뽑아 명한을 향해서 찔렀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하지만 그 검은 명한의 앞까지도 닿지 못했다.

"이 계집들이!?"

궤적을 비튼 은소소의 검, 검극을 잡아챈 향아의 손, 아예 팔목을 밀어낸 청청의 주먹까지.

삼면의 방어는 막군천의 검보다 빠르고 강했다.

"무턱대고 흥분하는 모습이 제 아비를 쏙 닮았군."

"네놈이 정말로 죽고 싶은 거냐?"

"꼬우면 덤벼. 그날 네 아비를 내 손으로 직접 못 죽인 것이 한이라서. 아들놈 목이라도 따고 나면 속이 좀 풀릴까 싶은데."

"그만. 이제 그만하시오, 소백 공자."

격해지는 분위기를 만류한 것은 막천우였다.

"오랜만입니다, 막 대협. 신수가 훤한 것이 무당파 일은 제대로 마무리된 모양이군요."

"청운이 적극적으로 도운 덕분이지요. 공자께서 주신 선물 덕도 톡톡히 봤습니다."

"그건 반가운 소식이지만…… 대협께서는 아직도 그날 일에 미련이 남은 모양입니다."

"으음."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

자기 손으로 동생을 베었다는 사실은 막천강이 어떤 인간이고 어떤 죄를 지었는지보다 더 깊이 남아 있었다.

‘유약한 인간.’

명한은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설정한 것도 자신 아닌가.

별수 없었다.

"하. 이제 보니 두 사람이 아주 돈독한 사이인가 보군."

막군천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득이 없는 짓이었다.

"말했잖아. 그날 그곳에 있었다고. 광인을 상대로 힘을 모으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유대가 쌓이는 법이라서."

"……기회가 되면 네놈의 입을 잘라서 화덕에 구워서 먹어보고 싶다."

"할 수 있다면. 굽기 전에 네놈 창자부터 솥에 삶아지지 않을까?"

"하하하. 직접 보니 더 재미있는 인간이군, 소백."

"너야말로. 마주하고 보니까 더 재수가 없어."

으르렁대는 기세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이곳에서 당장 목 두어 개 정도는 떨어지고 남을 분위기였다.

"어, 어!? 저, 저기를 보시오!"

"우아아아악! 저게 뭐야!?"

"세상에! 맙소사!"

하지만 그 순간.

조금 떨어져 기회를 보던 무림인들이 무언가를 확인하며 기겁했다.

"저건…… 배인가?"

"물에서 배가 올라온다고? 이게 무슨 기괴한 현상이란 말인가."

"이곳 주민들은 섬을 명왕도라고 부른다지. 이유 없는 명칭은 아니었나."

마을 나루터에서 섬으로 이어지는 뱃길.

어스름히 떠 있는 달빛을 받으며 누더기에 가까운 배가 물을 가르며 떠올랐다.

찢어진 돛, 갈라진 갑판, 반쯤 무너진 선수까지.

도무지 항해가 될 것이라 보이는 배가 아니었다.

― 명왕도를 찾은 손님들인가. 명왕의 부름을 받아 그대들을 환영하지.

하지만 자연스럽게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배.

그리고 그 안쪽에서 들려오는 음유한 목소리까지.

이미 상식 따위는 저편으로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아직도 막아설 셈이오, 막 장문?"

"섬이 우리는 초대하는 모양인데. 어쩔 생각이지?"

막천우가 주변을 눈으로 훑은 뒤 검을 집어넣었다.

"주인이 초대한다면 내가 막는 것도 이상한 일. 알아서들 하시오."

문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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