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235)

거부할 수 없는 함정

귀문으로 돌아와서 일주일이 지났다.

명한 등은 부족함을 채우며 자신의 것을 다듬는 시간을 보냈다.

많지 않은 시간 안에서도 일주일을 할당할 만큼 충만한 시간이었다.

꽤 많은 것이 달라졌다.

"태사, 이월이 보낸 전언입니다."

그리고 귀문 밖의 정세도 많이 것이 달라졌다.

"검성의 무덤 위치가 드러나 많은 무림인들이 움직이고 있다."

"세가 범상치 않습니다. 군소 방파나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은거기인들까지 속속들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무당파도 끼어들었다 이건가."

명한이 서신을 손으로 태워서 날렸다.

장보도를 노린 습격이 줄어들었다 싶더니 아예 위치가 드러나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이 정보가 허풍이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현재 돌고 있는 검성 무덤의 위치는 신기자에게서 들었던 곳과 정확하게 같았다.

"전형적인 함정이네."

"일월과 이월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흑점 무인의 첨언에 명한이 턱을 손으로 긁었다.

대놓고 ‘함정’이라고 말하는 상황임에도 이를 무시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은 검성의 무공이라는 것을 은소소가 얻기로 약속한 것이 첫 번째.

이 정도 규모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사건에 그들이 개입하지 않았을 확률이 낮다는 것이 두 번째였다.

"가서 전해. 무덤 주변 정세를 파악해 두라고."

"역시 무덤으로 가시는 겁니까?"

"손 놓고 있기는 힘들 거 같다."

"알겠습니다, 태사. 아, 그리고 저번에 지시하신 소문에 대한 단서를 잡았습니다."

"그래? 뭔데?"

세간에 퍼진 장보도에 대한 소문.

흑점 무인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말을 이었다.

"비응방의 수작이었습니다."

"비응방? 그건…… 정보집단이잖아. 그들이 왜?"

"확인해 본 결과 최근에 머리가 바뀌었더군요. 그 이후로는 방침과 움직임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머리가? 누구인데? 이름은 알고 있나?"

"이름 석 자 알아낸 것이 전부입니다. 석호주라고 하더군요."

"……석호주."

명한이 아는 이름이었다.

기존의 습작을 기준으로 막군천의 오른팔이 되는 남자.

본래는 하동 석가의 장자로 그 머리가 총명하여 관에 출두하였으나, 일에 휘말리며 일가족이 몰살.

그 이후에는 막군천에게 의탁하여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했다.

‘인물 설정이 그대로 움직이고 있다면 일의 배후에 있는 건 막군천이겠군.’

반갑지 않은 인간이었다.

"일월과 이월에게 전해. 석호주의 뒤에는 막군천이 있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일을 획책하는 것도 그일 거다. 그를 찾고 인력과 재물의 흐름을 쫓으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태사."

막군천은 무당을 떠난 뒤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재기했다면 반드시 뒤를 봐주는 세력이 존재할 터.

기존의 습작과 완전히 갈라진 부분이나, 인물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짚이는 건 소수다.

혈교나 팔반의 배신자들.

혹은 그 너머에서 암약하는 무리 정도.

‘결국, 돌고 돌아서 라이벌이라 이건가.’

"귀찮네."

악연이라는 거.

쉽게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

검성의 무덤에 대한 소문은 급속도로 퍼졌다.

소문에 발이라도 달린 듯 넓은 대륙 곳곳으로 전달됐다.

몇몇은 헛소문이라 일축했고, 다른 몇몇은 기회라 여기며 사람을 모았다.

그리고 또 다른 몇몇은 좌시하면 안 된다는 명분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의 숫자가 수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이 커졌다.

"그래. 네놈도 그 일에 끼어들겠다, 이거냐?"

"네. 아무래도 돌아가는 꼴이 마뜩찮아요. 흑심을 가진 놈이 뒤에서 수를 쓰는데,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네놈이 오는 걸 바라고 있다면?"

"그럼 더더욱 가야죠. 대놓고 부르는데 안 갈 만큼 배짱 없는 놈은 아닙니다."

"배짱은 무슨."

은휘는 혀를 끌끌 차며 볼멘소리를 냈지만, 막지는 않았다.

어차피 행동을 강제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천기의 흐름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다. 가만히 있는다고 세상이 널 놔주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움직여서 취해라."

"그건 사부님 눈에만 보이는 미래인가요?"

"미래 같은 것이 아니다. 천기라는 건 결국 하나의 흐름. 그 물길이 여럿으로 나뉜 지금에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 그렇다면 차라리 그 물길 안에서 너의 것을 만들어라. 그편이 적어도 후회는 남기지 않겠지."

"앞일은 모르니 현재에 충실하라, 이런 건가요?"

"뭐, 편할 대로 해석해라.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나보다야 네놈이 더 잘 알겠지."

은휘가 저 너머를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알아도 말하지 않을 것들이 있고,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할 것들이 있다.

그리고 어떤 건 무지가 더 나은 선택을 낳기도 한다.

"귀문의 문주로서 부끄럽지 않게만 행동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떳떳하기만 하면 그만.

"그럼 나머지는 이 늙은이가 어떻게든 해 줄 테니까."

은휘가 다시금 먼 곳을 바라보며 웃었다.

미련 없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하나 있는 제자에게는 좋은 것들만 주고 싶었다.

‘날이 갈수록 미련만 늘어나는군.’

이런 모순이 또 없었다.

"그래도……"

즐거우면 그만.

오래전의 감각대로 웃어 보았다.

#

"흐음."

구름 위로 뚫고 올라온 산의 정상.

바위로 깎아 만든 바둑판 앞에 한 노인이 앉아 있다.

길게 늘어진 수염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구름 너머를 묵묵히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어르신?"

머리를 동글게 말아 올린 시동이 쪼르륵 다가와 물었다.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을 때면, 좀처럼 침묵을 깨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귀문의 아이가 보통을 훌쩍 넘는구나. 흐름에 개입하려는 손들을 저 멀리서 밀어내고 있어."

"귀문이면 그 은휘라는 분 말인가요?"

"그래. 흑도 백도 아닌 회색을 지켜주는 아이 말이다."

노인은 과거 신기자와 대담을 하던 인물이었다.

"어르신께서 신경 써야 할 사람인가요?"

"글쎄. 작금의 흐름 속에서는 무엇 하나 명확한 것이 없구나. 무덤을 지키는 아이들이나, 노리는 아이들이나 혼탁하기는 매한가지. 어느 쪽이 옳다, 말하기도 어렵고 힘을 실어주는 것은 더더욱 어렵구나."

"하지만 무덤을 지키는 분들은 어르신의 사형제들이잖아요."

"태상노군이 죽고 현왕도 세월에 무너졌다. 그럼에도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더냐. 혼천을 막기 위한 정의라고? 노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으음. 저는 너무 어려워서 모르겠어요."

"그리 어려워할 것도 없다. 지키는 자도 노리는 자도 마찬가지라는 의미이니."

노인이 혀를 낮게 차며 바둑판 위에 돌을 올렸다.

백과 흑이 어지러이 포석되어 팽팽한 국면을 이루고 있었다.

"어쩌면 회색이야말로 이 대국을 이끌어갈 대마일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저번에 신기자 사형에게는 개입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모든 것은 시기의 문제. 내가 보는 것을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으니, 경거망동은 안 될 노릇이다."

"서복 어르신 말이군요."

"그래, 그래. 집 나간 그 망나니 말이다."

노인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아주 오래전, 환상루를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한 제자의 이름이었다.

"어르신께서는 역시 그 일을 후회하고 계시는군요."

"……하아. 일생의 불찰이지, 불찰이야. 그 아이 내면의 욕망을 읽지 못하여, 불로불사의 일면을 보여주고 말았으니. 황제를 속이고 온갖 연단과 금술로 옛것을 추종하게 된 것은 전부 내 잘못이니라."

"하지만 어르신……"

"됐다. 어차피 지난 일. 어긋난 흐름을 바로잡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왔구나. 이제는 과거 아닌 미래를 바라봐야 할 때."

툭.

바둑판 위에 다시금 돌을 얹었다.

대국의 형태가 일순간 바뀌며 돌이 우수수 쓸려나갔다.

누가 이긴 건지 알 수 없는 형태였다.

"루의 아이들에게 전해라. 무슨 일이 벌어져도 결코, 움직이지 말라고."

시동이 깊게 읍소했다.

장고 끝에 내린 결론은 방관.

그 답이 내키든 내키지 않든 이제는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짧게 답했다.

"네, 천기자 어르신."

#

검성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곳은 이름 없는 작은 섬이었다.

지역 주민들은 이곳을 ‘명왕도’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1년 내내 폭풍이 몰아치고 고기잡이를 위해 근처를 배회하는 배는 여지없이 난파했기 때문.

신이 노한 곳이니 접근하지 마라.

마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 명왕도에 접근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을 못 들은 거냐!? 당장 배를 내오라고 했지!?"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일 년에 한둘 있기 힘든 외지인의 방문이 급격히 늘어났다.

무리를 이끌고 들어와 사람을 겁박하고 몇 없는 배를 내놓으라고 강요하기 일쑤였다.

"아, 아이고…… 갑자기 그리 말씀하셔도 이젠 배가 없습니다."

"고기 잡아 입에 풀칠하는 놈들이 배가 없다니! 지금 이 방천방의 관립을 무시하는 거냐!?"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마을에 배가 없는 건 사실입니다요. 달 초부터 사람들이 몰려와서 배를 싹 쓸어가니 남은 거라고는 저기 저 판자때기밖에 없습니다."

촌로가 가리킨 건 다 낡아 부서지기 전의 배였다.

낡은 건 둘째치고 여기저기 구멍이 여럿이라 물에 뜨기나 할까 의문이었다.

관립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감히 이 관립을 우롱하다니! 네놈의 목으로 분을 풀어야겠다!"

촌로가 자신을 놀린다 생각한 관립이 언월도를 치켜들었다.

안휘성 남쪽에서는 제법 이름 꽤나 날리는 방천방의 방주.

이참에 힘을 과시해 둘 생각이었다.

"힘없는 자에게 무슨 짓인가!"

순간, 날 선 호통과 함께 검 한 자루가 날아와서 언월도를 꿰뚫었다.

탕. 소리와 함께 벽에 박히는 언월도.

관립은 충격에 벌벌 떨리는 오른손을 부여잡으며 자신을 방해한 사람을 바라봤다.

"누구냐!?"

"막천우라 하오."

"막…… 무당일검!!"

현 무당의 장문인.

무당 최고의 검수이나, 스스로는 부끄럽다 하여 무당의 검 중 하나라 ‘무당일검’이라 칭하는 인물이었다.

당연하게도 안휘 인근에서 힘쓰는 관립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무당에 속한 자로서 그대의 행동은 좌시하기 어렵구려."

"크, 크윽. 정말로 무당파 같은 거대 세력이 이번 일에 끼어든단 말이오!?"

"세태가 어지럽고 일에 엮인 이들이 지나치게 많소. 우리는 무림이 혼탁할 것을 우려하여 중재자로 참여하고자 하오."

"하! 말이 좋아 중재지, 무당도 결국 검성의 비전을 탐내는 것 아닌가?"

"감히!"

비아냥에 뒤이어 따라온 도포 차림의 무인이 검을 뽑았다.

"그만."

하지만 막천우의 손짓에 검은 뽑힌 속도보다 빠르게 검집으로 돌아갔다.

그 납검의 속도는 감히 관립이 눈으로 확인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게 무당의 검인가.’

마른 침을 꼴딱 삼키며 몸을 움츠렸다.

"검성 선배님의 진전이라면 능히 천하에 견줄 것이 없는 보물.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탐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오."

"그, 그것 보시오. 무당도 결국 마찬가……"

"허나!"

바닥에 검을 꽂아버리는 막천우.

검집째 단단한 돌을 뚫고 들어갔다.

"우리 무당은 도가의 일맥으로 그 본분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먹었소. 욕심이라는 것은 그저 스쳐 가는 작은 감정의 하나. 무당의 일원 중 누구라도 이를 사사로이 생각하여 움직인다면 이 막천우가 직접 목을 베겠소!"

"그, 그렇게까지……"

"그것이 무당. 청백의 검이오."

무겁다 못해 서늘할 정도의 선언.

관립은 입만 벙긋거리다, 이내 승복하고는 도망쳤다.

아무리 욕심이 나도 이런 이들 앞에서는 그저 객기일 뿐이었다.

― 검성의 무덤은 무당파가 지킨다.

소문은 순식간에 무림 전역으로 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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