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가 된다는 것
차 한 잔을 곁들이며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휘는 꽤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곱씹었다.
세상에 미련이 없는 그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천기가 뒤틀린다 싶더니 묘하게 흘러가는구나."
"사부님은 천기를 읽고 계신 건가요?"
"그저 흐름에 손을 얹고 방향을 볼 뿐이다. 하지만 그조차 이제는 쉽지 않구나. 뒤틀림이 과해지며 흐름 자체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어."
천기라는 건 결국 물살과 같다.
커다란 바위가 여럿 강물에 놓이면 유속도 방향도 제멋대로 바뀐다.
도착지마저 달라지는 것도 가능하다.
"이에 개입하는 이들이 있을까요?"
"첫 변화는 아득한 무엇이나, 그 뒤는 다르다. 변혁에 편승하려는 자들이 있어."
"그것이 신교에서 암약한 무리일까요?
"글쎄다. 여럿이 묶여 하나로 움직이고 있으니 그들을 같은 것으로 봐야 할지는 확실하지 않지. 셈이 다르고 방법도 다르니 너는 반드시 신중해야 할 것이다."
혈교가 다르고 팔반의 종리운도 다르다.
그 뒤에 숨은 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려웠다.
차를 홀짝이며 은휘가 말을 이었다.
"일단은 이곳에서 몸을 추스르며 네게 깃들 것들부터 정리하거라."
"제게 깃들 것들이요?"
"용의 숨결이 똬리를 틀지 않았느냐. 화륜이 짝을 지어 고리를 만들었으나, 그건 온전히 네 것이 아니다. 이를 먼저 다스려라."
"용의 뇌기와 화륜의 화기."
"더불어 여기 아이들도 조금은 도움이 필요하겠구나."
은휘의 시선이 은소소, 향아.
그리고 청청에게까지 닿았다.
왠지 모를 한기에 몸을 움츠렸다.
"영영아, 자리를 마련하거라."
"네, 조사님."
다가올 미래에 대한 한기였다.
#
인간이 내공을 쌓고 심법으로 이를 운용하는 건 단순한 이유다.
자연의 기운 자체를 그대로 쓸 수 없기 때문.
여러 영양분을 다양한 형태로 조리하여 섭취하는 것과 같다.
가공으로 인한 손실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지기를 그대로 쓸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화기를 이용하는 열염신공이나 냉기를 쓰는 빙공도 필요 없다.
불을 불로 쓰고 냉기를 냉기로 쓰면 그만.
기운 자체의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떠한 손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네 몸의 뇌기와 화기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 가깝다. 하지만 이를 사용하는 방식은 아직도 인간의 방법을 따르고 있지."
"내공의 운용과 마찬가지군요."
"그래. 기본적으로 인간은 손에서 불을 뿜을 수 없고, 전기를 내뿜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심법으로 기운을 이용하여 자연에 간섭하지."
"안에서 쌓은 것을 밖으로 잇는 경지. 현경이군요."
은휘가 손끝에 작은 구체 하나를 만들었다.
영(靈)의 기운으로 뭉친 것이었다.
"인간이 경지를 나누고 그 단계를 밟는 건 결국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해진 길을 차례대로 밟으며 성장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사부님은 이미 기운 그 자체. 영혼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죠."
"맞다. 내가 바라보는 영혼은 순수한 기운의 결정체. 자연의 여러 기운과 마찬가지로 영혼 역시 정제되지 않은 힘의 일부다."
영의 구체는 은휘의 손짓에 따라 그 형태를 이리저리 바꿨다.
긴 침이 되기도 하고, 날카로운 칼이 되기도 하며, 투박한 상자가 되기도 했다.
본질을 다루기 때문에 형태를 바꾸는 건 쉬웠다.
"속성으로 치자면 무(無) 속성이라고 해야겠지."
"인간의 영혼이 말인가요?"
"어찌 보면 가장 혼탁하며 순수한 것. 완전한 뒤섞임을 뒤섞이지 않은 순수함으로 표현할 수도 있으니, 이를 직관으로 무(無)라 칭한 것이다."
"가장 혼탁하여 순수하다."
"그래. 그러니 다른 자연지기들과는 다르게 섞이는 것이 가능하다."
은휘의 손끝에 불꽃이 맺혔다.
앞서 가지고 놀던 영의 구체가 불의 형태를 담아서 일렁이고 있었다.
본질은 여전히 영혼이었지만, 그 안에 불의 기운이 섞인 것이다.
명한은 짧게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단과 같은 이치로군요."
"이해가 빠르군."
이미 비슷한 것을 다루고 있는 명한이다.
영단이 그렇고 칠채향이 그렇다.
좌정을 하고 앉아 몸 안의 기운을 움직였다.
고리를 이어 순환하고 있는 뇌기와 화기 안에 묵혼공으로 쌓은 영혼을 밀어 넣었다.
"큭―!"
머리가 흔들리는 고통에 명한이 휘청거렸다.
코에서 피가 흐르고 손끝과 머리카락이 불에 그슬렸다.
‘섞임’과 함께 나타난 강렬한 반발이었다.
"그리 쉬웠다면 세상에 신선이 가득했겠지. 자연은 그 자체로 머물기를 원한다. 이를 혼에 섞어 쓰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욕심. 욕망하되 욕망하지 않는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거라."
"……어려운 말이네요."
"이미 넌 그 지극함을 알고 있다."
"지극함을 제가 알고 있다고요?"
"가장 난폭한 마음을 이해하고 있지 않더냐? 보고 느끼고 새롭게 헤아려라."
극천일무기.
명한은 은휘가 말하는 가장 난폭한 마음이 ‘파괴’임을 이해했다.
가장 순수하며 가장 지극한 감정이었다.
남을 파괴하고 자신마저 파괴하는 지독한 감정의 힘.
‘이를 이해하고 이를 다스린다면……’
욕망하되 욕망하지 않는 선을 알 수 있다.
"아."
이것은 마치 무일과 무월의 이치와도 같다.
음 안에 양이 있고, 양 안에 음이 있는.
혼태극의 이치는 결국 섞임과 정돈의 표리일체였다.
명한의 고개가 덜컥, 하며 뒤로 젖혀졌다.
"고놈 참. 왕년의 나를 보는 것 같군."
끌끌하며 웃는 은휘.
남은 건 이제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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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한과 별개로 남은 이들도 수련에 들어갔다.
은소소의 검, 향아의 보법, 청청의 권장법이 그랬다.
은휘는 셋 모두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초월적으로 뛰어났다.
바로 영혼을 꿰뚫어 보는 눈이었다.
"검에 망설임이 있군."
"내 검에 망설임이 있다고요?"
은소소의 검에서 느껴지는 건 망설임.
"확신이 없다. 검사가 검으로 뿜어내는 건 단순히 검기만이 아니다. 마음이 반영되어 검에 투영됐을 때, 그제야 제대로 된 힘이 나온다. 망설임이 있는 검은 물도 가르지 못하지."
"난 무엇도 망설이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뿐이지. 예전처럼 순수하게 검 하나에 매몰되기 힘들지 않더냐?"
"……"
사실은 은소소의 입을 다물게 했다.
한때, 광검이라 불리며 검 하나에 매진했던 것이 은소소.
하지만 지금은 검 하나로 헤쳐나가기에는 닥친 환경이 만만치 않다.
신기를 쓰는 파운이나 강유 같은 이들은 둘째 치더라도 혈교를 포함한 괴물들은 벽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과연 검으로 될까.
영혼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의문이었다.
"그래. 그런 마음이구나."
"조사님은 이해해요?"
"아니, 난 이해하지 못한다. 태어날 때부터 천재였고, 세상에는 내 적수가 없었으니까. 한 번도 망설인 적이 없지."
"그건 조언이 아닌데요?"
"어차피 몇 마디 조언 따위로 바뀔 것도 아니다."
은휘의 몸이 은빛으로 물들더니 조금씩 형태를 바꿔갔다.
큰 키에 굵고 긴 팔다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외모의 남자였다.
"당대에 나와 맞서던 유일한 검수다. 그와 상대를 해라."
"조사님과 맞서던 검수와 싸우라고요?"
"넌 철저하게 두드려서 깨우쳐야 한다. 좋은 검은 언제나 그런 노력 끝에 태어나지. 죽음마저 밟고 올라설 때, 검에 깃든 망설임은 지워질 것이다."
"……죽음마저."
"두려우냐?"
"네. 하지만……"
은소소가 검을 움켜쥐었다.
검성의 무덤이 있다고 해도 이런 미적지근한 상태로는 무엇도 얻지 못한다.
더 이상은 짐이 되는 것도 보호받는 것도 싫다.
검 하나에 매달려 광검이라 불리던 자신을 되찾는다.
그것이 약속을 위한 길.
"해볼게요."
광검, 은소소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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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뺙―!"
불사조의 울음소리에 청청이 고개를 돌렸다.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나름의 비행을 하고 있었다.
"오. 이젠 제법 날 수 있게 됐는데?"
"뺙!"
힘찬 울음에 붉은 깃털을 쓰다듬었다.
그때마다 불사조는 볼을 손끝에 비비며 애정을 드러냈다.
"이거 참. 네가 이렇게 열심히 하면 내가 좀 그런데."
"뺙?"
"조금 갈피를 못 잡아서."
희미하게 갈등이 섞여 있는 웃음이었다.
"어디까지나 난 고용돼서 여기 있는 거잖아. 애초에 돈 받고 감시 역할을 맡은 거기도 하고."
"뺘아악."
"근데 너무 과한 걸 받아버렸어. 군로와 태산파의 일은 내 일생의 전환점이었다고. 그걸 그렇게 손수 나서서 해결해주면, 나도 고용인으로 그치기는 힘들다고. 사람이 의리가 있지 마냥 그렇게 먹고 모른 척하기는 힘들잖아."
손으로 불사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토로했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이었을 뿐이다.
영물에 대해서 잘 알고 쌍둥이들을 낯설게 대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태산파의 군로가 엮인 시점에서 그 경계는 흐려졌다.
돈으로 묶인 고용주면 그냥 선을 끊고 돌아서면 그만.
자신의 사람이라며 나서준 순간에 더는 돈으로 묶인 관계라고만 말하기가 어려웠다.
"신교의 적이니 암중세력이니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아주 오랜만에 어딘가에 속해 있는 기분이 좋았다.
태산파를 나와서는 언제나 떠돌기만 했으니까.
쌍둥이들이 있었다고는 해도, 조금 다른 유대가 필요했었다.
"하지만……끄응."
문제라면 이 망설임.
명한과 그 주변의 이들은 너무나 잘 뭉쳐 있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인연에 생사를 넘은 경험까지 더해졌다.
갑자기 불쑥 들어온 사람이 끼어들 관계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청청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발정기 망아지처럼 여기서 뭐 하는 게냐?"
"그러니까 발정기 망아지가……헉! 뭐, 뭐야!?"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청청이 기겁했다.
뒤로 풀쩍 뛰어 반격 자세를 취하며 앞을 바라봤다.
"으, 은휘 어르신?"
"경망스럽게 날뛰기는. 앉아라."
그곳에 있는 건 은휘였다.
청청이 입술만 달싹이다, 침묵하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무어라 대꾸하기는 은휘가 너무 무서웠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녀의 눈에는 은휘가 산보다 크고 바다보다 깊었다.
"영안이 트인 아이라 몇 가지 일러줄까 했더니, 이리 구석에서 궁상을 떨고 있구나."
"구, 궁상은 아니고……그냥 고민이에요."
"고민은 무슨. 이른 나이에 집 떠난 아이가 쑥스러워하는 것이 훤히 보인다."
"윽!"
붉어지는 얼굴은 막기 어려웠다.
"뭐가 그렇게 부끄럽다고. 여물지도 못한 것이 집에서 쫓겨나 험한 중원 바닥을 굴렀으면 정이 고픈 것이 당연하다. 저 소백 아이들이라고 뭐가 달랐을까? 다들 부족한 것이 있으니까 뭉치고 기대는 거다."
"……제가 끼어들어도 될까요?"
"사람이 사람에게 기대겠다는데, 누가 뭐라 할까. 가서 부대끼고 사람답게 굴어라. 영안이 트였어도 너는 나와 다르게 사람의 삶을 살 수 있으니까."
은휘가 어딘가 쓸쓸한 눈빛을 한 채, 청청의 앞에 내려와 머리를 다독였다.
완전히 영안이 뚫려 인간과 동떨어지게 살수밖에 없었던 은휘에게 청청은 아직 갈라서지 않은 싹으로 보일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공치사는 됐다. 앞으로 너는 새벽과 저녁에 두 번 나를 찾아와라."
"두 번을요?"
"그래. 네가 뜬 눈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그리고 그 신수 놈을 어찌 키워야 하는지 알려주마."
"아! 불사조를……"
"불사조? 아직 이름도 안 붙인 거냐?"
청청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름을 붙여도 괜찮은지에 대한 망설임이 있었다.
이에 은휘가 혀를 차며 가볍게 대꾸했다.
"저 아이가 널 따르는 건 자연의 법칙이다. 싫어서 버릴 것이 아니라면 이름을 붙이고 애정을 주거라."
"……제가 붙여도 될까요?"
"그래. 그것을 저 아이도 기뻐할 거다."
"뺙!"
답 같은 울음에 청청이 불사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불현듯 스친 단어를 뱉었다.
"금홍. 금홍으로 하자."
"뺘악!"
기쁜 울음소리에 함께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