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235)

우연한 휘말림

"그럼 은공께서는 언제 돌아오시는 건가요?"

용의 사변 이후 며칠 뒤.

명한은 짐을 꾸려 떠날 채비를 끝냈다.

"급한 볼일 끝내고 이쪽 일도 마무리 지어야지. 해룡방 건도 그때 같이 처리할 테니까, 그 동안 생각해 봐."

"네, 은공. 명심하겠습니다."

주검산장은 아직 길을 정하지 못한 상태.

시간을 들여서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명한은 일단 그런 그들을 내버려 둔 채 귀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휘가 돌아오라는 전언을 남길 정도라면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네. 현재 귀문 상태는 어떻지?"

흑점에서 제공한 마차로 이동하는 길에 명한이 물었다.

"은공께서 지원해 주신 덕분에 터는 다시 닦았어요. 오래된 집을 보수하고 담을 다시 쌓았죠. 귀문이라는 현패를 보고 문하가 찾아오는 날도 머지않았어요."

"귀문의 특성상 문하가 많을 것 같진 않지만…… 뭐, 그건 차차 해결하자고."

"후후. 문하가 없다 해도 은공께서 계신다면 맥은 충분히 이어질 거라 믿어요. 무상은가와 은공의 혈통이라면 분명 빼어나겠죠."

"……너, 뭔가 좀 음흉한데?"

"어머, 어머. 제가 흰소리를 했네요."

손사래 치며 도망치는 은영영.

무상은가의 혈통이라면 은소소를 말하는 거니, 의미는 뻔하다.

‘주책이네.’ 명한이 툴툴거리며 마차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

"……"

그리고 마부석에서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은소소와 눈이 마주쳤다.

바람 쐰다며 밖으로 나가더니 이러고 있었다.

확, 붉어지는 얼굴에 명한마저 괜히 민망해질 정도였다.

"저기, 그……"

"앞에 연기입니다!"

그 민망함을 대화로 풀려는 순간.

마부가 전면의 연기를 발견하고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뭉게구름 같던 분위기가 단번에 깨어지고 날 선 긴장감이 그 위로 덧씌워졌다.

"저 깃발은…… 남궁세가입니다!"

안휘의 남궁가.

뜻하지 않은 조우였다.

#

부서진 마차를 사이에 두고 두 무리가 대치하고 있다.

한쪽은 두서없이 옷을 차려입은, 어딘가 거친 외관의 무리.

다른 한쪽은 흰 바탕에 검은색이 가미된 정갈한 의복 차림의 무리.

어딘가 대비되는 두 무리가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남궁세가 이 비열한 놈들! 우리를 이용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검을 들이대는 거냐!"

"하하하. 우습기 짝이 없군. 우리 남궁세가가 대체 언제 너희 같은 도적 무리와 손을 잡았다는 거지?"

"남궁윤!"

"닥쳐라, 도적놈. 너 따위가 감히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남궁윤이라 불린 인물이 검을 곧추세웠다.

정기 가득한 얼굴에 정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눈빛 깊숙한 곳에 깃들어 있는 욕심은 차마 지우지를 못했다.

"당장 네놈들이 가지고 있는 장보도를 내놔라. 그리하면 남궁세가의 자비심으로 목숨은 살려주지."

"미친 새끼! 그런 장보도가 있었다면 우리가 먼저 찾았다! 없는 걸 어떻게 내놓으라는 거냐!"

"흥. 도적놈들이 하는 말은 뻔하지. 몰래 검성의 무덤을 찾아서 독식할 요량 아닌가!?"

"닥쳐! 네놈들이야말로 헛소문 따위를 퍼뜨려서 주검산장의 물건을 독식할 생각이지!"

대화는 갈수록 원초적으로 변해갔다.

서로를 쏘아보는 눈빛 역시 탐욕으로 물들었다.

"역시 그런 식으로 나오는군. 좋아, 좋아. 친우의 말마따나 도적놈들은 소탕하고 물건을 뺏으면 그만."

"큭. 대체 어디서 무슨 헛소문을 듣고 설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해룡방이 만만한 곳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하! 주제를 알아라, 도적놈아."

순식간에 양쪽 무리가 충돌했다.

검광이 난무하고 피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숫자는 해룡방 쪽이 우세했으나, 개개인의 무력은 남궁세가 쪽이 압도적이었다.

팽팽한 것은 잠시.

순식간에 해룡방이 도륙당하기 시작했다.

"이, 이…… 비열한 놈들!!"

"큭큭. 마음껏 지껄여봐라. 도적놈들의 헛소리를 들어 줄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여기 있는데?"

"……!?"

어디선가 튀어나온 낯선 목소리.

그림자 여럿이 번개처럼 끼어들어 해룡방과 마찰 중인 남궁세가를 밀어냈다.

하나하나가 엄청난 고수라 일반 무인은 감히 겨룰 수 없었다.

"누구냐!?"

"지나가는 무림인."

팔짱을 딱 끼고 해룡방 앞에 서는 건 당연하게도 명한.

주변 공간을 확보한 은소소 향아 등도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뭐 하는 놈들인데 감히 남궁세가의 행사를 방해하는 거냐!?"

"하. 안휘에서나 노는 놈들이 왜 이곳까지 와서 난리를 피우는 거지?"

"감히!"

"감히 뭐?"

발끈하는 낭궁세가 무인 앞으로 명한이 봉을 내밀었다.

묵직하게 피어오르는 기세에 놈이 움찔하며 물러났다.

그래도 격차를 알 정도의 눈은 있었다.

"그래서 뭔데? 안휘의 남궁세가가 이런 먼 곳까지 와서 노상 강도질을 하는 이유가."

"크윽! 그자들은 일대에서 활동하는 수적 무리다! 해룡방이란 말이다! 우린 저 수적 놈들을 잡아서 정의의……"

"해룡방? 뱃길 통해서 주검산장을 털어먹던 그 해룡방?"

말을 끊고 돌아보는 시선에 이번엔 해룡방 무리가 움찔했다.

주검산장이라는 명칭 앞에서는 당당할 수 없었다.

"하하! 그래, 그 해룡방이다! 이제 알았겠지? 너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어디까지나 명문정파의 활동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안휘의 남궁세가가 주검산장을 괴롭히는 해룡방을 잡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 그래!"

명한이 팔짱을 낀 채 두 무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럼 뭐…… 하던 일 마저 해."

"뭐? 자, 잠깐!"

"잘 선택했다!"

해룡방과 남궁세가의 반응이 순간적으로 갈리고.

검을 고쳐잡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우, 우리에게 검성의 무덤 위치가 적힌 장보도가 있다! 저 남궁세가 놈들은 그걸 뺏으러 온 거다!"

"응? 뭐라고?"

"장보도가 있다고! 검성이다, 검성! 남궁세가 놈들은 그걸 뺏으러 온 거라고!"

"검성이라."

검성의 무덤 위치라면 신기자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다.

‘이것도 그놈 수작인가?’

갑자기 안휘의 남궁세가와 해룡방이 엮이는 건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여기 이 해룡방 무리는 이렇게 말하는데. 우리 남궁세가분들은 어찌 생각하시나?"

"거짓말이다! 고작 수적 무리의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그러니까 해룡방이 거짓말을 하는 거다?"

"그렇다!"

"그럼, 이 수적 무리 처리를 우리가 해도 되겠지? 찾는 물건 없으면 도적만 처리하면 되는 일이니까. 안 그래?"

"그, 그건……"

움찔거리는 남궁윤.

정말로 해룡방을 처리하기 위해서 온 거라면 맞지 않는 모습이다.

‘진실이든 아니든 장보도 이야기가 퍼진 건 사실인가 보네.’

명한은 짧은 사고로 상황을 정리했다.

"남궁세가분들.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아 있나?"

"그놈들은 우리가 잡았다! 이제 와서 공을 뺏어가는 건 너무하지 않는가!?"

"그럼 처리하고 난 뒤 남궁세가의 작품이라고 소문을 내주지. 모든 공로를 그쪽으로 돌려줄게. 그럼 되나?"

"우, 웃기지 마! 우리 남궁가가 남의 손을 빌릴 것 같나!? 그자들을 우리에게 넘기고 물러가라!"

"하. 거참 말귀를 못 알아듣네. 내가 지금 부탁하는 거 같아?"

우우웅. 웅.

명한의 봉 끝이 거칠게 울었다.

"지금 남궁세가와 척을 지겠다는 건가?"

"반대로 물어야지. 남궁세가는 나와 척을 지고 싶어?"

"대체 네가 누군데!"

"소백."

쿵. 바닥을 깊이 파고드는 타구봉.

항거할 수 없는 기운이 그 점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약한 이들은 무릎을 꿇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그야말로 제왕의 패기.

"천하제일이 될 사람이다."

허풍 반 진심 반.

선언했다.

#

남궁세가에서 나온 이들은 일단 물러났다.

아무리 자존심이 높아도 실력 차이가 눈에 보이는데 목을 들이밀 수는 없었다.

본가에서 나온 정예와 합치기 위해서 한 발 뺐다.

"자, 그럼 남은 일을 얘기해 보실까?"

남은 건 명한 일행과 해룡방 무리.

"나, 남은 일이라니?"

"사내가 되어서 한 입으로 두말하면 쓰나. 검성의 장보도가 있다면서."

"내가 그랬나? 헉!"

해룡방 무리 턱 끝에 닿는 타구봉.

날이 없는 봉이지만, 끝에 서린 기운은 날붙이만큼 날카로웠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 잠깐만 진정해 보라고. 장보도 얘기는 아까 그 남궁세가 놈들이 한 거야. 사실 우리한테는 그런 보물이 없어."

"보물이 없는데 남궁세가가 그쪽을 노릴 이유가 있을까?"

"진짜라고! 진짜야! 우리도 답답해 미칠 노릇이라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배를 타던 놈들이 갑자기 보물을 내놓으라면서 저런 패악질을 부린 거야!"

"한배라. 자세하게 듣고 싶은데."

"아! 그, 그건……"

움찔하는 해룡방 무리.

명한이 미소를 더욱 진하게 그리며 말을 더했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그 이야기를 안 했네. 우리가 온 곳은 주검산장이야. 그쪽 장주하고 내가 아주 막역한 사이라고. 듣자 하니 최근 들어 뱃길에 말썽이 잦다고 하던데. 혹시 들어는 봤나?"

"허, 허억!! 주, 주검산장에서 왔다고!?"

"우리 어린 장주 얼굴이 얼마나 근심으로 시들었던지. 내가 다 가슴이 아플 지경이야. 장주 속을 썩인 놈이 있으면 아주 머리통을 박살 내고 싶었다니까. 혹시 해룡방은 이 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나?"

"우, 우린 아니야! 우리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고!"

"일? 무슨 일?"

따닥. 따닥 부딪치는 이빨들.

명한은 고작 약관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 외관.

하지만 그럼에도 해룡방의 무인은 지독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밑바닥을 구르며 경험해본 ‘피 맛’을 아는 인간의 분위기.

거스르면 목 위의 물건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부…… 전부 남궁세가의 지시였어! 주검산장의 물건을 훔쳐서 자신들과 거래하자고 했어! 동선도 거래 물량도 전부 그놈들이 알려줬다고!"

"남궁세가의 지시로 주검산장의 물건을 훔쳤다는 거냐?"

"그, 그렇다고! 우리같이 수적질이나 하는 놈들이 무슨 수로 그 많은 물량을 소화하겠어! 절대로 무리라고!"

"그래. 그 말 그대로 적어줘야겠어."

명한이 양피지를 꺼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 시대의 증거라면 누가 뭐래도 수결이 가장 확실하다.

검성의 장보도는 둘째 치더라도 이번 기회에 주검산장의 문제 하나를 처리해 두면 일석이조.

지나가다 채인 돌멩이에 운 좋게 새 둘이 걸린 격이다.

"그, 그럼 이거만 쓰면 우리는 놔 주는 거냐?"

"그럴 리가. 그동안 먹어치운 주검산장 재산도 토해내야지. 해룡방 통째로 수장당하기 싫으면 고분고분 말을 듣는 편이 나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다 가져가면……"

콰르르릉.

명한이 타구봉을 휘둘러서 숲의 일부를 날려버렸다.

둥글게 벌목된 현장에 해룡방 무인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뱃길에서 수적질하는 놈이 이런 수준의 무인과 언제 또 만나 봤겠는가.

"고분고분."

마른침만 꼴딱 삼키고는 죽어라 머리를 끄덕였다.

제물도 숨이 붙어 있고 난 뒤에야 가치가 있는 법.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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