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235)

천기의 어긋남 속에서

용이 똬리를 틀고 불사조를 그 안에 안았다.

화기와 뇌기가 휘몰아쳐서 어마어마한 폭풍을 만들었다.

인간이 바라보는 천재지변이 이런 모습일까 싶은 광경이었다.

― 됐다, 인간. 저 아이는 이제 스스로 설 수 있다.

그러기를 몇 시진.

용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모두를 향해서 의식을 열었다.

"용. 저 불사조는 그대와 다른 불사조의 자식이 맞는 건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하지만 그 모습에 대뜸 질문을 던질 만한 사람은 명한뿐이었다.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거는 그에게 용이 고개를 살짝 숙여 주었다.

― 언젠가 세상의 흐름이 뒤바뀐 적이 있다. 모든 이치가 흩어지고 다른 무언가를 통해서 재정립되었다. 저 아이가 생긴 것도 그 무렵이지.

"모든 것이 재정립되었다고? 그럼 의도한 자식이 아니라는 건가?"

― 이치의 비틀림에 의해서 태어났다고 해도 내 자식인 것은 변함이 없다.

"……"

말하자면 어느 순간 자식이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

보통이라면 이를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용 정도 되는 격이니 이를 인지한 것이다.

현실의 재정립.

현실개변에 가까운 일이라면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다.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온 순간.’

소백 대신 명한이 세상에 쓰였다.

습작에 불과했던 글에 생명이 부여되고 비어 있던 설정의 틈에 새로운 사실이 덧씌워졌다.

어떤 아득한 존재에 의한 현실의 변화.

― 그대는 무언가를 아는 눈치로군

용은 명한의 기색을 알아채고 그에게만 사념을 보냈다.

"어쩌면.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어."

― 인지의 밖에서 이루어진 세상의 변화라. 신이로군.

"……다른 설명은 불가능하지."

― 그럼 됐다. 신의 놀음에 피조물인 내가 이치를 논하기는 그렇지.

"의도하지 않은 자식의 탄생이라도?"

― 설사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내게 이 아이는 기쁨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겠지.

용은 더없이 자애로운 얼굴로 불사조의 깃털을 핥았다.

시작이 무엇이든, 주어진 존재를 사랑하는 것에는 한 점의 거짓도 없었다.

용이기에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이 세계의 존재이기 때문일까.

명한은 다른 이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민으로 잠시 침묵했다.

― 인간. 그대가 개변의 중심에 선 자라면 한 가지 부탁하도록 하지.

침묵을 깬 건 용의 뿔에서 흘러나온 뇌기의 정수 때문.

― 저 아이는 화기와 뇌기가 뒤섞인 존재. 현세에 존재하지 않던 기운을 품고 있다. 이를 곁에서 다스려줄 사람이 필요하겠지. 그대가 품은 불에 내 뇌기라면 가능할 것이다.

"직접은 불가능한 건가?"

― 이미 저 아이가 인간에게 부모의 연을 이었다. 용과는 다른 불사조 특유의 방식이지. 한 번 이어진 연을 내가 끊을 수는 없다.

"그렇군."

부모가 있음에도 청청에게 이어진 불사조의 연은 끊을 수 없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어이없는 모습이지만, 대상은 인간이 아닌 신수.

명한은 납득하며 용이 건넨 뇌기를 받아들였다.

"……큭."

짜릿함과 함께 온몸의 단말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뇌정지기이나 다행히도 용이 조치는 취해 두었다.

한바탕의 소동을 끝으로 천천히 가라앉아 화륜의 옆에 안착했다.

두 기운은 숨을 쉬듯 천천히 공명하며 기운을 나누었다.

뇌기와 화기로 이루어진 띠가 단전 주변을 돌았다.

‘묘하군. 이 흐름은 망(忘)의 경지에서 느낀 흔적과 닮았어.’

인간임을 잊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흐름에 몸을 맡겼을 때.

아주 찰나의 순간에 봤던 그 무언가를 뇌기와 화기는 따르고 있었다.

― 그럼 내 아이를 잘 부탁한다, 인간.

명한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용이 날아올랐다.

하늘 가득 채운 먹구름 사이로 천천히 승천하여 빛무리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그야말로 신화 속에 등장하는 용의 모습.

"뺙!!"

이건 배웅일까.

세상은 이내 잠잠해졌다.

#

"그래서 용에게 술법을 걸었던 인간은 누구라는 거야?"

태산파의 잔당마저 처리하고 난 뒤.

하늘이 진노하여 용이 강림했다라는 민간전승이 퍼질 무렵.

명한 일행은 다시 주검산장으로 돌아왔다.

"태산파 무리도 모르더라. 들어보니 군로가 혼자서 일을 추진했던 거 같아."

"혼자서?"

"군로는 자신의 비밀을 남과 공유하지 않았거든. 태산파 내에서도 그런 독선적인 행동에 반감을 가진 사람이 많았어. 문주나 장로 등하고도 자주 마찰을 빚었다고 해."

용혼이 사라지고 난 뒤, 태산파 무리는 순한 양이 되었다.

완전히 용혼 때문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기운에 영향을 받았던 것은 사실.

힘이 빠지고 쪼그라든 풍선은 전처럼 날 수 없는 법이었다.

"언제부터 그런 행동을 시작한 거지?"

"글쎄. 들어보니 군로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가 봐. 예전에는 다정다감한 성격에 인망도 좋았던 거 같아. 사람이 확 바뀌기 시작한 건 벽도문의 난 이후."

"벽도문? 사파?"

"응. 태산파의 영역에서 벽도문이 위세를 떨친 적이 있어. 몇 개의 마을이 쓸려나가고 사람이 다수 죽었지. 그때 태산파는 이 벽도문에 맞서서 검을 들었어. 당시 입문제자 나이였던 군로도 이래저래 끌려다녔지."

"전쟁이 사람을 바꿨다?"

"당시 대열에서 낙오되어 벽도문에 잡힌 적이 있다나 봐. 몰살된 마을 주민들 시체 더미에서 발견됐다고 해. 그 경험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든지……"

"그걸 누군가 보고 접근을 했다?"

명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기억에서 본 인물은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어딘가 강유와 닮았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도구로 쓰는 차가운 시선.

"하아.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네. 그러니까 괜한 사람을 주워와서는."

"누구? 아, 청청?"

"……"

"질투냐?"

"질투는, 누가! 하여튼 군소리만 많아서!"

은소소가 씩씩거리며 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번 사건에서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던 터라, 꽤 속상한 상태였다.

"어머, 나가니?"

"흥."

교차해서 들어오는 건 은영영.

괜한 부끄러움에 은소소의 발걸음만 더 빨라졌다.

‘어머 어머.’ 그 모습에 은영영이 볼을 발그레 붉히며 명한 앞에 앉았다.

‘무슨 일?’이라는 시선은 어딘가 드라마 시청자스러운 느낌이었다.

"부산스럽게 굴지 말고 무슨 일인지나 말해."

"후후, 은공도 부끄러운가 보네요."

"하여튼 헛소리는. 할 말 없으면 나가지?"

"아뇨, 아뇨. 은휘 조사님의 전언이에요."

축객령에 은영영이 황급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영석을 넘기며 전하고 싶었던 말.

"귀문으로 최대한 빨리 돌아오시래요."

귀환령이었다.

#

잿더미가 된 숲속을 한 남자가 걸었다.

흑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사박사박 무너지는 잿더미를 끌며, 한 자리에 우뚝 섰다.

한때 사람이었던 군로가 짐승으로 죽어간 장소였다.

무릎을 꿇고 흔적을 더듬으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인간의 발버둥은 결국 하늘에 닿지 못하는 것인가."

손으로 재를 훔쳐 바람에 날렸다.

어딘가 깊은 회한이 묻어나 있는 목소리였다.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것인가, 흑면?"

"……"

그 옆에 소리 없이 내려와 서는 한 남자.

흑색 가면의 인물과는 다르게 백색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건데 인사라도 함이 어떤가?"

"너와 내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군. 우리가 같은 목적을 두었다고, 같은 길을 가는 건 아니다."

"하하. 고결하기 짝이 없군. 그것이 바로 강남대협, 강유옥의 철학인가?"

"……"

흑색 가면, 강유옥이라 불린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후후. 솜털이 곤두설 정도의 기세로군. 여기서 날 죽이기라도 할 셈인가?"

"무영살, 탁발귀. 네 관할은 신교다. 왜 밖으로 나와서 설치는 거지?"

"그야 그쪽의 움직임이 더디니 그런 것 아니겠어? 태산파 따위로 지지부진 시간을 끌고 있으니 그분께서 답답해하신다고."

"흥. 답답한 건 네놈이겠지. 태산파를 통한 신수의 통제는 필요한 실험이었다."

"결과는 실패로 보이는데."

"아니, 성공이다. 올바른 방식으로 올바른 술식을 사용한다면 신수라도 제어할 수 있다. 그 말인즉슨……"

"천기마저 움직일 수 있다."

"세상의 법칙이 우리를 막아선다면 그 법칙마저 무너뜨리면 된다."

강유옥의 손짓에 주변 바람이 멎었다.

세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법칙을 그는 완전하게 제어하고 있었다.

"아름답군, 아름다워. 배신자 가문의 혈통만 아니었어도 진심으로 존경해 주었을 거네."

"……"

제어는 이내 소멸하여 본래의 것으로 돌아갔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 강유옥의 눈이 가늘어졌다.

"후후. 또 날카로워지는군. 역시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역린인가?"

"나는 이미 오래전에 가문을 떠났다. 그들과 나를 엮지 마라."

"호오. 아들과 아내를 버리면서까지 진리를 추구한 무인의 이야기인가?"

콰드득.

탁발귀의 백색 가면이 반으로 쪼개졌다.

얼굴의 반이 드러나고 쪼개진 파편이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렸다.

드러난 반쪽의 탁발귀는 웃고 있었다.

"쿡쿡쿡. 재미있는 인간이야. 지고의 경지에 닿기 위해 모든 걸 버렸음에도 아직도 후회와 번뇌가 남아 있어. 인간을 버리면서까지 강함을 추구했으면서 결국 인간에 발목을 잡힌다라. 우습기 짝이 없군."

"조심해라, 탁발귀. 인적 드문 곳에서 혼천(混天)의 면(面) 하나가 사라진다고 해도 세상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하하하. 오물이 두려워 몸을 흑색으로 물들인 네놈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

"해볼까, 백(白)?"

스산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에서 맴돌았다.

단순한 내공의 격돌을 넘어선, 이치에 대한 간섭이었다.

바람이 멎고 풀이 마르고 나무가 썩어갔다.

"그만해라."

그 대치는 제삼의 목소리가 개입하며 깨어졌다.

무릎 아래로 길게 뻗은 머리카락에 호리호리한 체형을 가진 여성이었다.

무게가 없는 듯 풀잎을 밟으며 둘 사이로 섰다.

"호오, 이게 누군가. 적(赤) 아니신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쪽까지 움직이다니. 이번 일을 꽤나 중요하게 보는가 보군."

"우습게 입을 열지 마라, 백. 내가 이곳까지 온 것은 열쇠를 사용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열쇠를……드디어 정해진 건가?"

"슬슬 모든 걸 본궤도에 올릴 때가 된 것이지. 당분간은 모든 실험을 멈추고 무덤의 공략에 집중하라는 지시다."

적이라 불린 여성이 허공에 손을 그었다.

공간이 붉은색으로 갈라지며 낡은 양피지를 토해냈다.

피로 쓴 듯, 음울한 색의 글자가 어지러이 적혀 있었다.

"과연. 무덤이 허유도(虛有島)에 있다면 그들도 있겠군."

"배신자들 따위 두렵지 않다."

"그들을 우습게 보지 마라. 밖을 유람하는 신기자 정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과거, 태상노군과의 싸움에서 몇이나 죽은 건지 기억 못 하는 건 아니겠지?"

"……흥."

코웃음 치는 탁발귀.

하지만 적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과거부터 끈질기게 마찰을 이어온 이 집단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림을 암중에서 흔드는 자신들과 비교해도.

"아, 그리고 흑. 네게는 한 가지 명령이 더 있다."

"말해라."

"소문을 만들어라. 해룡방이 검성 무덤의 위치가 적힌 장보도를 지니고 있다고."

"그런 일이라면 능한 아이가 한 명 있다."

강유옥은 곧바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최근에도 비슷한 공작을 시도한 인물.

"막군천. 그 아이라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거다."

질긴 악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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