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말로
군로. 아니, 군로의 모습을 한 괴물이 포효했다.
서릿발 치는 증오와 가학적 욕망이 가득 찬 포효였다.
용이 되지 못한 뒤틀림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크아아아!!"
이윽고 이 뒤틀린 감정은 명한을 목표로 했다.
증오라는 건 쏟아낼 대상이 있어야 성립하는 감정.
행보를 막고 용혼을 무력화한 명한은 무엇보다 뚜렷한 대상이었다.
양손이 바닥을 짚으며 네발짐승처럼 밀었다.
아득할 정도의 속도로 거리가 줄어들었다.
드드득.
맞서는 건 명한의 주먹.
탈응의 요령이 속도의 방향을 비틀어 땅으로 처박았다.
군로의 머리부터 목 언저리까지 흙더미를 밀고 들어갔다.
보통이라면 죽어 마땅한 충격.
하지만 용이 되지 못한 괴물에게 이 정도는 찰과상이었다.
몸이 기형적으로 뒤집히며 허리가 반대로 회전.
다리가 빙글 돌아서 명한을 쳤다.
"……완전히 인간을 벗어났군."
인간의 구조에서 나올 수 없는 자세였다.
두 걸음 물러나 다시 자세를 잡고 타구봉을 쥐어서 횡으로 그었다.
허리부터 반으로 갈라버리기 위한 공격.
하지만 이 또한 군로는 몸을 측회전 하는 것으로 피했다.
허리가 빙글빙글 감겨서 몸을 다시 정상 자세로 회복시켰다.
곡예에서도 볼 수 없는 동작.
명한이 저도 모르게 감탄성을 터뜨렸다.
"크아아아!!!"
순간, 군로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강대한 기운을 전면으로 뱉어냈다.
놀랍게도 강기로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신수도 되지 못하고 인간도 되지 못한 괴물이 강기를 다루고 있었다.
황급히 타구봉을 회수한 명한이 강기를 쳐내며 거리를 벌렸다.
손끝이 저릿거릴 정도로 응축된 기운이 만만치 않았다.
‘괴물이 되면서 내공의 수발이 더 자연스러워졌다는 건가?’
신수라면 자연지기를 다루나 그 경지에는 닿지 못했다.
다만, 어색하게 흉내 내던 전의 군로보다는 이쪽이 더 자연스러울 뿐.
우연이든 아니든 이쪽이 더 강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도 좀 생각을 바꿔야겠어."
툭툭, 손을 털어내는 명한.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군로의 형상을 털어내기 위함이었다.
인간과 짐승을 상대하는 법이 다른 건 당연한 일.
규격을 바꿔 싸움의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나를 잊는다. 기존의 지식도 잊는다. 모든 걸 잊고 무의식 속의 길을 찾는다.’
망(忘)의 경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도.
"크르르르…… 크아아!!"
네발로 방향을 이리저리 틀며 달리는 군로.
인간이라면 보법(步法)이라는 규칙이 있으나 짐승에게는 없다.
본능에 의한 걸음을 이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받아치는 건 본능이 닿는 방위.
쩌엉.
머리에서 터지는 충격에 타구봉이 부르르 떨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군로가 바닥을 굴렀다.
무인이라면 나려타곤이라 꺼리겠지만, 짐승에게는 없다.
그리고 반격의 시점 역시 무인의 것과는 거리가 멀다.
바닥을 굴러 고개만 치켜든 채 강기를 입으로 뱉어냈다.
콰콰쾅―!!
손끝으로 펼친 탈응에 빗겨 나가는 강기.
땅이 터지고 토사가 치솟았지만, 충격은 닿지 않았다.
‘좋아. 조금씩 익숙해지는군.’
조금만 더.
손에 익힌 경지가 군로를 끝내기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 크라라라라!!
하지만 그런 여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명한의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
쌍각사와 대치하며 잠시 정신을 찾았던 용이었다.
거대한 몸을 똬리처럼 말아 군로의 곁을 보호하며 명한 쪽으로 입을 벌렸다.
새하얀 빛이 그 끝에서 명멸했다.
#
새하얀 빛이 숲을 관통했다.
궤적에 걸리는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소멸했다.
천년 고목도 단단한 암벽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원통 형태로 공간이 갈라졌다.
"위험해!"
그리고 그 궤적에 청청도 놓여 있었다.
하얀빛에 깜짝 놀라 몸을 피해 보지만, 너무 빨랐다.
순식간에 휩쓸렸다.
"……어?"
하지만 고목이나 암석처럼 쓸려나가는 일은 없었다.
"뺘악!!"
한 뼘 밖에 떠 있는 불사조 때문이었다.
놈은 사방을 집어삼키던 광망을 작은 부리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파괴적이던 빛이 작은 불사조의 입으로 다 빨려 들어가는 데는 촌각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픽,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꺽." 배부른 불사조의 트림 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그거 네가 한 거야?"
"뺙!"
"하지만 어떻게? 무슨 수로?"
이해 안 된 청청이 눈으로 물었지만, 불사조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되레 이 물음이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아니, 됐다. 이 마당에 이해가 뭐가 중요하겠어. 빛이 온 쪽에 용이 있을 거야."
"뺙!"
불사조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용이 힘을 쓰기 시작했다는 건 상황이 다급하다는 의미.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불사조를 품에 안고 두 다리에 힘을 쏟았다.
‘죽으면 안 돼, 고용주.’
아직 돈도 받지 못했다.
전력으로 달렸다.
#
"후우. 후우."
왼팔에서 흘러내리는 핏물.
제대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왼쪽 다리.
속은 매스꺼워 당장이라도 속의 것을 토해내고 싶다.
이 모든 건 용의 섬광을 빗겨낸 대가였다.
"크르르르……"
"웃지 마라, 짐승아."
용의 위세를 업고 비릿하게 웃는 군로.
인간을 포기하고 짐승이 되었음에도 본능적으로 자신의 우세를 느끼고 있었다.
명한이 흔들리는 왼팔을 억지로 당겨서 천으로 묶었다.
‘놀라서 제대로 망(忘)의 경지를 활용하지 못했어.’
잊지 못한 한계는 벽이 되고 용의 섬광을 다 빗겨내지 못했다.
왼쪽 팔과 다리는 대가치고는 작은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주물은 보호하겠다, 이거군."
군로와 용이 보호하는 영역 뒤편에 항아리가 있다.
억지로라도 부수기 힘든 위치.
파괴하려면 둘의 공격을 어떻게든 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쯧. 어떻게든.’
군로와 철천지원수인 건 아니니 도망가려면 도망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야 고용주의 얼굴이 안 선다.
소백이라는 이름과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후우. 이 동네 최초로 드래곤슬레이어가 되는 한이 있어도 한다."
"크르르르……"
"그래. 짐승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 하겠지."
"크아아아!!"
이해는 못 해도 기색은 기가 막히게 읽는다.
군로가 땅을 박차며 뛰어오고 용이 다시금 새하얀 광구를 머금었다.
용의 공격을 생각하면 군로는 나서지 않는 편이 낫지만, 주물을 고려하면 이편이 낫다.
군로가 죽는 것 따위는 주물의 입장에서는 상관없는 이야기.
즉, 쓰고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이래서 남의 것에 목매면 안 된다고."
망가진 좌반신에 화륜을 불러와서 태웠다.
임시변통이지만,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달려오는 군로의 앞에서 불꽃을 터뜨리고 그 충격으로 몸을 회전.
극천일무기의 기운을 다리에 담아서 머리를 후려쳤다.
펑, 소리와 함께 주저앉는 군로.
그와 동시에 용의 입에서 흰빛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는 뇌격이었다.
― 경계는 잊는다.
이에 명한은 온전한 오른팔로 원을 그렸다.
전신의 내공이 손끝을 타고 타올라 화륜에 덧씌워졌다.
불로 이루어진 막.
아니, 막이면 안 된다.
막이라는 건 결국 불과 명한이 경계가 존재한다는 의미.
순수한 망아(忘我)의 경지라는 건 그조차 잊어 스스로를 무(無)로 만드는 것.
불이면 불이고 물이면 물이다.
안의 것으로 밖을 다스리는 현경마저 뛰어넘는.
순수한 자연으로의 회귀였다.
콰콰쾅―!!
"크으으윽!!"
하지만 그게 쉬웠으면 누구나 고수가 됐을 것이다.
화륜으로 만든 불꽃이 일그러지며 그 틈으로 광망이 쏟아졌다.
어깨부터 허리 부근까지가 뇌기에 침식당했다.
균형을 잡지 못해서 무너지는 명한.
정신마저 아득해서 그대로 기절해 버릴 것 같았다.
"크아아아아!"
한술 더 떠서 군로마저 살아있었다.
갈려버린 토사 더미에서 튀어나와 명한의 목덜미를 물었다.
다급히 기로 막을 쳐서 방어하지만, 군로의 힘은 만만치 않았다.
막이 부서지고 순식간에 살점이 뜯겨나갔다.
붉은 피가 아지랑이처럼 피었다.
"소백―!!"
그 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명한의 귀를 강타했다.
조금씩 멀어지던 의식이 한 번에 바로 서고, 화끈한 열기가 몸을 휘감았다.
"크르르!?"
"뭐야, 저건!? 군로!?"
다급히 난입한 청청은 짐승의 모습을 한 군로를 발견했다.
아무리 겉모습이 바뀌어도 평생을 억압해 오던 인간의 기질은 모르기가 힘들었다.
침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힘내라, 멍청아.’
하지만 그래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주저앉은 명한의 모습이 망막 가득 담겼기 때문이다.
그는 고작 ‘고용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런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그 의리를 저버리면 군로와 다를 바가 없다.
짐승의 형태를 한 군로에게 다가가 태산압정의 초식으로 그를 날려 버렸다.
"괜찮아? 움직일 수 있겠어?"
"……젠장. 혼자서 해결할까 했는데, 창피하네."
"흰소리는 그만둬. 이건 애초에 네 싸움이 아니었잖아."
"거두기로 했으면, 그때부터 내 싸움이야.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명한이 부축을 받아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조금 전부터 화륜의 기운이 살아나서 그나마 거동이 쉬웠다.
"어떻게, 도망칠까?"
"여기서 튀면 주물을 파괴하지 못해. 그러면 용은 다시 속박될 테고, 여기 이 뺙뺙거리는 놈도 부모 잃은 꼴이 되겠지."
"그럼 방법은 있어?"
"뒤에 저 항아리 보이지? 저걸 파괴해야 해. 문제는……"
"용이네."
명한이 똬리를 틀고 앉은 용을 보며 끄덕였다.
화륜 같은 신기와 현경의 무공이 있어도 용은 용이었다.
정상적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뺙―!"
그때, 청청의 품 안에서 불사조가 날아올랐다.
"위험해!"
"잠깐! 아까 용이 쏜 빛도 불사조가 먹어치웠어. 이번에도 뭔가 있지 않을까?"
"빛을 먹어치웠다고?"
명한의 시선이 불사조를 따라서 움직였다.
용을 관조할 때 세웠던 가정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불사조가 뇌기를 삼키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그렇다고 화기가 거짓말은 아니지.’
가능한 조건이라면 하나뿐이다.
"용과 불사조의 새끼라는 건가."
신화적인 신수의 새끼.
양쪽의 특성을 모두 물려받은 모습이 그 증거였다.
불사조는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상승.
용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쏟아지는 뇌기를 향해서 입을 벌렸다.
콰콰콰콰―!!
"효과가 있어!"
번개는 전보다 훨씬 약하며, 그마저도 불사조에 의해서 흡수되었다.
사방으로 튀는 여파 정도는 충분히 받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명한과 청청이 눈빛을 주고받은 뒤, 동시에 뛰어나갔다.
"크아아아아!!"
방해하기 위해서 튀어나오는 것은 군로.
하지만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청청이 그 앞을 막았다.
두려움 같은 건 이미 떨쳐내고 없었다.
군로가 그토록 무시하던 태산파의 무공으로 발을 묶었다.
"깨져라―!"
주물까지 당도한 명한이 전력으로 주먹을 뻗었다.
물결 모양의 막이 주물 주변으로 번지며 파괴력을 상쇄했다.
예상되던 마지막 보호막이었다.
‘잠깐이면 된다.’
용에게 받은 작은 파편.
그리고 계속된 실패로 얻은 실낱같은 감각.
천분의 일 초.
아니, 만분의 일 초라도 충분했다.
[무아지경(無我之境)]
모든 걸 잊고 지워야 도달하는 찰나의 순간.
주물을 보호하던 힘이 씻은 듯 지워졌다.
― 아……아아아아! 드디어 속박에서 벗어났도다!
그리고 용을 묶던 속박.
"……어? 이, 이건 있을 수 없어."
군로를 휘감던 기운 역시 사라졌다.
"이제야 동등하네, 대사형."
용혼 없이 비루한 몸으로 흔들리는 군로 앞에 청청이 바로 섰다.
예전의 위압감도 사람을 찍어 누르던 패기도 더 이상은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건 그저 ‘군로’라는 한 인간.
태산파의 무공을 멸시하고 용의 힘을 탐한 패배자 한 명이었다.
"이,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아니. 이게 현실이야, 대사형. 용혼이 없는 네 진짜 모습. 그게 전부야."
"웃기지 마! 나는 용의 힘을 얻었다! 용의 힘으로 태산파를 중원 제일로 만들었어! 나는……쿨럭! 쿨럭!?"
피를 쏟아내는 군로.
주물에 의한 힘이 풀렸다고 아무렇지 않게 보통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미 한 번 뒤틀렸던 몸.
죽음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어리석은 인간. 태산파의 힘을 믿지 않고 용에 기댄 순간부터 끝은 뻔했어."
"쿨럭! 쿨럭!! 쿨럭!! 태산파는…… 태산파는 너무 약했어! 쿨럭! 너무 약해서 나는 기댈 수밖에 없었던 거다! 커어억!! 나는 죄가 없어!! 죄가 없다고!! 크아악!!"
"……"
"난 그저……강해지고 싶었을 뿐이야."
잿빛으로 물들어 바스러지는 군로.
청청은 그 모습을 두 눈에 담은 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쏟아내고 싶은 말은 수없이 많았으나, 하지 않았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약했네, 대사형."
그럴 가치가 없는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