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235)

짐승에 대한 용기

인간은 격이 낮기에 서로의 생각을 말로 전한다.

하지만 신수 수준에 오른 존재들은 생각을 그 자체로 전할 수 있었다.

한 점의 거짓도 기만도 없이, 오롯하게 생각 전체가 투영되는 것이다.

명한 역시 영석의 힘을 빌려 이를 가능하게 했다.

― 용이여, 내게 그대의 자식이 있다.

주검산장에서 찾은 알.

불사조의 모습을 한 존재에서 다시금 알로 돌아가, 지금은 청청의 품에서 새끼의 모습으로 일어난 그 존재가 있었다.

한 점의 거짓 없이 모든 것이 용에게 전해졌다.

― 아아. 업화(業火)의 아이가 살아있었구나.

용. 아니, 정확하게는 용의 의지가 그 생각을 명한에게 전달했다.

안도와 슬픔이 묻어나오는 의지였다.

― 용이여. 너는 더 이상 인간을 위해 싸울 필요가 없다.

― 날 위해 그렇게 해 준다는 것인가? 내 벼락이 그대를 해쳤음에도?

― 네 기억을 봤다. 인간에 의해서 채워진 억압의 굴레. 분노는 온당한 것이었지.

― 인간이라는 테두리 안에는 벌레와 용이 모두 존재하는구나.

용의 의지가 금색으로 물들어 명한의 눈앞에 나타났다.

뚜렷한 용의 행태.

하지만 몸의 곳곳이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 인간에 의한 속박인가?

― 내 혼을 묶고 나로 하여금 영성을 먹어치우게 했다. 영겁을 살아온 나조차 헤아리기 어려운 고등의 속박이었다.

― 푸는 방법은?

― 속박의 주물을 파괴하면 된다. 내가 있던 곳, 그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것이다.

낡은 도자기와 닮은 무언가.

용을 속박하여 그 영성을 담아 둔 주물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쌍둥이들을 잡아 두었던 그 공간.

명한은 위치와 모습을 특정했다.

― 가져가거라. 용혼과 맞선 너라면 반드시 깨뜨릴 수 있을 거다.

용은 자신의 일부를 떼어 명한에게 건넸다.

금색의 기운은 순식간에 의지를 타고 명한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신이 멍해지고 쉼 없이 무언가가 흘러들어왔다.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정보의 홍수였다.

― 하여간, 용이라는 것들은.

― 사부님?

그 순간에 은휘의 의식이 스쳐 가고.

무섭게 짓누르던 압박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홍수의 진원지에서 한 걸음 물러난 느낌이었다.

― 일이 끝나면 날 찾아오거라.

― 사……

더 부르기 전에 은휘의 존재감은 그대로 사라졌다.

아마도 은영영이 던진 영석의 효과.

추측은 하지만, 이 신묘함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 부탁한다, 인간이여.

그리고 그 즈음해서 용과의 연결도 끝났다.

주변 공간이 물결처럼 출렁거리며 닫혀 있던 시간도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딘가 화난 듯 보이는 군로, 쌍각사와 마주친 용, 걱정과 불안으로 바라보는 은소소 등.

명한이 숨으로 ‘현실’을 자각하고 입을 열었다.

"주물을 파괴해야 해."

굴레에 갇힌 용이 다시금 분노하기 전에.

#

상황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 빠르고 정확해야 한다.

용이 언급한 주물을 깨기 위해서는 힘을 나눠 받은 명한이 필수적.

하지만 그가 자리를 뜨면 현장의 군로를 상대할 전력이 없다.

쌍각사와 대치 중인 용은 둘째 치더라도.

‘끌고 와야 한다.’

필요한 건 약간의 연기력.

"일단 흩어져! 후에 산장에서 다시 만난다!"

외치는 것과 동시에 명한은 숲을 가로지르며 뛰었다.

은소소 등은 잠시 움찔하기는 했으나, 일단은 그 말을 따르며 움직였다.

순식간에 일행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네놈이 감히 어디서 도망치려고!!"

군로의 선택은 명한이었다.

찾아온 것은 청청이었지만, 감정적으로 분노한 건 명한이었다.

전력으로 그를 쫓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젠장! 용을 부리는 인간 따위는 계획에 없었다고!"

"큭큭! 후회해도 늦었다! 용혼의 힘은 인간을 아득하게 초월해 있다! 네놈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아!"

군로는 명한의 뒤를 쫓으며 연달아 벼락을 쏟아냈다.

새하얗게 명멸하는 빛과 함께 숲이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자리 잡고 받아칠 때야 쉬웠지, 도망치며 벼락과 맞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한도 꽤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 부근인가?’

하지만 충분히 감수할 만한 손해였다.

"……쌍아의 흔적."

희미하게 남아있는 쌍각사의 냄새였다.

한층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으로 그 방향과 움직임마저 모조리 읽혔다.

숲의 한쪽을 지나 은밀한 동굴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용을 묶은 주물이 있다면 그 안.

"네놈,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

뒤늦게 군로도 명한의 속셈을 눈치챘다.

신나서 쫓아오고 나니, 자신들이 거처였다.

우연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알아차리는 게 늦네. 그래서야 그 꼴이 우습지 않나?"

"닥쳐라! 이곳에서 네놈을 없애면 그만이다!"

군로의 뿔이 조금 더 길어졌다.

새파란 빛을 내며 집적하는 뇌기 역시 마찬가지.

용의 형태를 취할수록 그 힘이 더 증가하는 모습이었다.

"……이 반응."

그리고 그 힘에 동굴 안의 무언가가 반응했다.

수면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공간에 진한 파문을 새기고 있었다.

멀리서는 몰랐지만, 이 거리에서는 뚜렷했다.

‘용을 구속한 주물을 통해서 영성을 갈취하고 있어.’

그렇기에 인간의 탈 위에 영물의 기운이 덧씌워진 것이다.

용을 잡은 건 둘째 치더라도 이런 술법은 그야말로 초월적인 수준이었다.

"죽어라!!!"

힘만 쓰는 군로에게 이건 불가능한 이야기.

‘그 가면을 쓴 남자. 그가 배후인가?’

몸을 숙여 벼락을 피하며 사고를 가속했다.

"감히!! 인간 주제에 용의 힘에 대항하지 마라!"

또 쏟아지는 벼락.

하나하나가 대기를 가로지르며 선명한 상처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뚜렷한 궤적은 기묘할 정도로 느리고 분명했다.

탈응의 요령으로 몸 주변의 점과 점을 비틀었다.

콰콰콰쾅!!

반 족장 반경으로 쏟아지는 벼락.

땅을 박살 나고 열기에 흙은 타들어 가지만 명한은 한 점의 타격도 없었다.

‘용이 준 힘 덕분인가?’

사고와 행동의 제약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불가능해!"

"가능해. 그리고 자신의 힘도 아닌 것으로 뽐내지 마."

땅을 밟아 힘의 파편을 띄운 뒤 탈형으로 무너뜨렸다.

잘게 부서지는 공간은 마치 금이 간 유리처럼 어지러우며 아름다웠다.

‘이건 마치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듯한 감각. 내가 인간인 것조차 잊는……’

손아귀에 부서진 파편이 잡히며 길게 늘어졌다.

"컥―!"

무형의 파편에 얻어맞고 날아가는 군로.

용의 육체라 자랑하던 팔의 비늘이 잘게 부서져 있었다.

"그래. 이게 망(忘)의 경지구나."

초대 천마가 남긴 멸아의 삼 단계 중 두 번째.

명한은 부식 간에 자신도 모르게 한 단계를 뛰어넘었다.

한계라는 의식 자체를 잊어 구속됨이 없는 경지였다.

명한은 주먹을 움켜쥐며 낯선 이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불가하다. 불가해! 어찌, 인간 따위가 용의 힘을 받은 날 이길 수 있는가!"

"……그야, 그 힘이 네 것이 아니니까."

"닥쳐! 이 힘은 내 것이다! 용의 힘을 얻으며 나는 태산의 정점에 섰다! 누구도 내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우드득. 우득.

군로의 몸이 잘게 갈라지며 점차 인간의 형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용의 형태.

‘하지만 저건 용이 아니야.’

본질을 보는 명한에게는 뒤틀림이 여실히 보였다.

격을 갖추지 않은 자에게 용의 힘은 그야말로 독.

"어리석네."

한 손으로 기운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 그것을 당겼다.

극천일무기에서 파생된 파괴의 힘이었다.

망아의 상태에 들어선 명한에게는 이런 재주도 가능했다.

기운이 거대한 활의 형태로 손아귀에 영글어져 어딘가를 겨냥했다.

‘아마도 이쪽이 주물.’

아까 전부터 요동치고 있는 기운의 발원지였다.

동굴 안쪽의 정확한 위치가 감각적으로 파악.

손에 쥔 활을 그대로 튕겼다.

쩌어엉―!!!

동굴 안쪽에서 거대한 충격파가 퍼지고 항아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낡고 삭은 평범한 항아리였다.

하지만 파괴의 힘으로 날린 화살로 깨지지 않았다는 건, 도무지 평범함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크, 크아아아!! 이건 뭐야!? 으아아아!!"

그리고 그 항아리의 등장과 함께 군로가 비명을 토하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가 어긋나고 용 특유의 기운이 폭증했다.

그의 말마따나 용의 힘을 받아서 용이 되는 과정.

언뜻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다.

‘아니. 차라리 그것이었다면 다행이지. 저건……’

항아리에 남긴 술법이었다.

"결국, 네놈도 이용당했다는 건가."

항아리가 깨질 위험에 처하면 발동하는 최후의 안전장치였다.

구속한 용의 힘을 억지로 빨아와 이를 지킬 수호자로 만들었다.

말이 좋아 수호자지, 결국에는 노예였다.

인간이라는 존엄마저 박탈당한 짐승.

"크르르르……"

용이 되지 못한 비참한 모습의 군로.

각화된 육체에 흘러넘치는 힘.

버틸 수 있는 한계를 아득하게 벗어나 일회용으로 쓰고 버릴 병기를 만들어냈다.

"그게 다른 누군가를 억압한 결과인가? 초라하군."

일말의 동정 따위도 없다.

명한이 손아귀에 죽음을 거머쥐었다.

#

"허억. 헉."

청청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명한의 신호를 받고 일단 달리고 본 터라 방향을 잡기 어려웠다.

고개를 들고 살핀 주변은 낯선 장소였다.

"갑자기 용이라니. 정말 군로 그 인간이 용의 힘을 받았다는 건가?"

그게 사실이라면 너무 끔찍하다.

남을 짓밟고 강제하는 것으로 군림의 도를 보여주는 군로에게 용의 힘까지 주어진다면?

이젠 태산파만이 아니라 무림 전체의 위기였다.

‘……나도 끌려갈지 몰라.’

예전처럼.

작은 방 안에 갇혀 군로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입는 옷 먹는 음식 배우는 무공까지.

모두가 그의 통제를 따르는 것이다.

지독한 두려움이었다.

"뺙―!"

"어?"

순간, 익숙한 울음과 함께 머리 위가 따뜻해졌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불사조가 머리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분명 주검산장에 두고 나왔을 텐데.

"너……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뺙!! 뺙!"

"날 걱정해서 왔다고?"

주억거리는 불사조의 머리에 청청이 울컥했다.

고작 손바닥만 한 새의 위로라도 지금처럼 두려움 가득한 상황에서는 컸다.

두 손으로 쥐고 꼭 안았다.

온기가 흘러들어와 불안을 씻어 주었다.

"후우. 고마워. 네 덕에 용기가 나는 거 같아."

"뺙!"

"응? 이 근처라고?"

다독임에 한마디 덧붙이는 불사조.

정확하게 말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그 의사는 어렴풋하게 이해가 됐다.

그리움을 느끼는 대상이 하나.

적대감을 느끼는 대상이 또 하나.

두 점이 하나로 모이고 있었다.

"용을 구했으면 하는 거야?"

"뺙!!"

"지금 느껴지는 다른 기운 쪽에 해답이 있는 거고?"

"뺘뱍!"

이해는 부족했지만, 가슴으로는 알았다.

지금 불사조를 통해서 느껴지는 어떤 지점에 문제의 해답이 있었다.

물론, 그곳에는 두려움의 원천인 군로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직접 가서 마주치든가, 아니면 이곳에서 일의 끝을 기다리든가.

선택은 청청의 손아귀에 있었다.

"뺙!"

"……응."

머리는 복잡했지만, 선택은 의외로 빨랐다.

지금 아니라면 영영 풀지 못하리란 예감.

뺙뺙거리는 불사조를 품에 안고 청청이 불길함이 느껴지는 곳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큰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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