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
치열한 싸움이 이어졌다.
일격에 산이 무너지고 이격에 바다가 갈라질 것 같은 싸움이었다.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상처와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힘 자체의 규격에서는 군로가 위.
하지만 힘의 쓰임에서는 명한이 앞서 있었다.
몇 번의 부딪침에서도 승부는 쉬이 나지 않았다.
"얄팍한 놈. 그런 잔재주로 얼마나 피할 수 있을까?"
"글쎄. 조금만 더 이해하면 네 기운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은데."
"흥. 인간인 네놈의 기준으로 용혼을 이해하려 하지 마라."
다시 쏟아지는 군로의 공격.
명한은 밖의 영성을 걷어내며 안의 힘을 멸아의 공능으로 흘렸다.
바닥이 무너지고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힘이 좀처럼 줄지를 않는군.’
쏟아낸 힘을 고려하면 바닥나고도 남을 정도.
하지만 군로는 여전히 쌩쌩했다.
"내 힘을 소진시킬 생각인가? 어림도 없다. 용혼은 무한하다. 네놈의 알량한 수작으로는 이 힘의 한계를 알 수 없어."
"거, 용혼 대변인 나셨네. 그렇게 잘났으면 날 꺾어 보든가."
"건방진 놈!"
발끈한 일격.
명한이 물 흐르듯 궤적을 흘리며 탈응의 요령으로 힘을 되돌렸다.
역류하는 하수처럼 힘이 파도치며 군로를 덮쳤다.
부채꼴 모양으로 지변이 가라앉았다.
‘……음?’
그리고 그 순간, 명한은 무언가 기묘한 걸 감지했다.
"너. 대체 뭐 하는 인간이냐?"
폭심지 한가운데 반쯤 주저앉은 군로.
오른팔을 들어 충격을 막아선 자세였는데, 찢긴 소매 안쪽의 피부가 이상했다.
빛을 반사시키는 반들반들한 비늘.
파충류에게서나 볼 법한 그런 비늘이 팔을 다 덮고 있었다.
"하찮은 속세의 인간 따위가 내게 대적하려 하다니."
팔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눈도 황금색으로 물들어 세로로 갈라지고 송곳니가 길어져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다.
얼굴 절반 가령을 덮는 비늘과 이마 쪽으로 튀어나오는 뿔은 점입가경이었다.
명한이 한마디로 이 모습을 총평했다.
"용?"
"크크크. 설마하니 인간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네놈이 용이라고? 아니…… 그럴 리는 없지. 격이 높은 용이 인간을 흉내 냈다면 특유의 영성이 있어야 해."
"닥쳐라. 내가 바로 용이다. 태산에서 태어난 금색의 용. 감히 네놈 따위가 내 존재를 부정하느냐?"
군로의 몸에서 금색 서기가 풍겨 나왔다.
사물을 파괴하는 힘이 아닌, 군림을 위한 왕의 기운이었다.
용이라면 상서로운 영물임과 동시에 짐승의 왕으로 군림하는 절대적인 존재.
금색 서기에는 본질을 찍어 누르는 힘이 있었다.
‘극천일무기의 파괴와는 다른 방향으로 강렬하군.’
마음을 풀면 그대로 무릎을 꿇고 싶을 정도였다.
"……감히 아직도 두 발로 서 있어?"
"개짓거리는 일절만 하지. 네가 용이면 난 해태다. 어설프게 흉내 낸다고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아."
"천벌이 두렵지도 않은가 보군!"
번쩍―!
순간, 하늘이 하얗게 물들더니 번개가 명한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야말로 천벌과 같은 광경.
"뭐?"
하지만 명한은 이 번개를 피하지 않고 잡아냈다.
손끝에 잡힌 새파란 번개에 군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우리 쪽 쌍아의 번개도 이 정도는 하거든. 다만, 좀 이상하네. 내공을 통한 외기에 대한 접근이 아닌, 순수 자연지기를 쓰는 걸 보니 영물의 방식은 맞는데…… 아무래도 넌 용이 아니야."
"네놈이……!"
"영물은 저마다의 격이 있어. 오랜 세월 수행하면서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시간의 계단이지. 하지만 네게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아. 마치 타인의 것을 가져다가 함부로 쓰는 듯한. 흉내 내기 바쁜 연극으로 보일 뿐이야."
"닥쳐라!!"
다시금 하늘이 새하얗게 물들고 수십 발의 번개가 내려쳤다.
용의 분노, 그렇게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군로는 인간이 이 공격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말했을 텐데? 내게 이런 건 익숙해."
"불가능하다!!"
하지만 명한은 일점의 타격조차 보이지 않았다.
연기를 뿜어내는 건 타구봉뿐.
‘파괴불가 피뢰침이라. 좋네.’
상식과 요령의 합치였다.
"그 가죽을 벗겨내면 정체를 알 수 있을까?"
"……"
한풀 꺾인 기세.
명한이 타구봉을 쥐고 군로를 겨냥했다.
용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손으로 물어볼 요량이었다.
"소백, 피해!!!"
"조심해요, 도련님!!"
하지만 그때.
계획하지 않은 조우가 이루어졌다.
인질을 구하기 위해서 갈라졌던 은소소와 향아였다.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다급하게 도망치고 있었다.
― 크라라라라라라라!!
그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굉음과 함께 그림자로 숲을 덮는 한 존재에 명한의 고개가 위로 꺾였다.
"용?"
이번에는 진짜 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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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전해지는 민간 신앙의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용이다.
신성한 존재이며, 화와 복을 함께 내리는 천재(天災)의 일부로 평가받는 상징.
황제의 상징조차 용이니 그 격이 얼마나 높은지는 두 말이 필요 없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용이 실재할 거라고는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두 눈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조심해, 소백!"
"도망쳐요, 도련님! 저 용은 정상이 아니에요!"
은소소와 향아가 날듯이 명한의 옆으로 내려왔다.
"쌍둥이들!!"
다만, 둘만이 아닌 다섯과 함께였다.
인질로 잡혔던 쌍둥이들 다섯이 둘과 같이 있었다.
조금 창백한 얼굴에 상처가 여럿이었지만, 생명에는 이상이 없었다.
"어서 데려가!"
"어디에서 찾은 거지?"
"저 용과 함께 있었어! 일단 데리고 먼저 도망쳐! 저 용은 이 쌍둥이들을 노리고 있으니까!"
"용이 쌍둥이들을?"
콰르르르릉!!
대꾸가 채 나오기도 전.
하늘이 검게 물들더니 벼락이 떨어졌다.
이건 군로가 사용하던 벼락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순수한 자연지기로 이루어진 압도적인 파괴력의 현현이었다.
명한이 청청 등을 밖으로 밀어내며 탈응의 요령으로 벼락을 받아쳤다.
"크으으윽―!!"
손과 발이 떨리고 내장이 타들어 갔다.
탈응은 분명 초대 천마의 무공인 만큼 그 현묘함이 하늘에 닿았다.
하지만 용이 내리는 벼락은 그야말로 천재.
인간이 자연의 재앙을 정면에서 받아내기란 요원했다.
두 무릎이 자연스럽게 땅으로 박혔다.
"소백!!"
"도련님!!"
다급하게 외치며 달려오는 은소소와 향아.
콰르르릉―!!
하지만 그보다 두 번째 벼락이 먼저였다.
수 장 너비의 새하얀 벼락이 그대로 명한의 몸을 강타했다.
이번에는 탈응을 쓸 기회조차 없었다.
전신이 벼락에 휩쓸려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인간이라면 죽어야 마땅한 충격이었다.
"커억! 컥!"
명한에게 화륜이 없었다면.
륜(輪)의 형태를 한 불꽃이 그의 주변으로 둥글게 말려 용의 벼락을 막아냈다.
주인의 위기에 자연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명한 주변의 땅이 불에 녹고 번개에 타버렸다.
지글지글 끓는 대지는 지옥의 그곳처럼 인간의 접근을 불허했다.
― 크라라라라라!!
용은 그런 명한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거칠게 포효했다.
양 관자놀이 부근에서 돋아난 뿔에 뇌기를 모으더니 다시금 쏟아냈다.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쓸려갔다.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공격이었다.
― 캬아아아아!!
이 순간.
은소소의 품에서 쌍각사가 튀어나와 번개 앞으로 달려들었다.
이마에 튀어나온 작은 뿔은 턱없이 작은 번개를 뿜어 뇌기의 해일에 맞섰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 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턱없이 부족한 도전이었다.
콰르르릉!!
하지만 무엇 때문일까.
갑자기 용이 뇌기의 방향을 바꿔서 하늘로 쏟아냈다.
명한과는 고작 한 뼘 떨어진 거리.
기운이 그 옆을 훑고 하늘에 구멍을 뚫었다.
맞았다면 그야말로 절명밖에는 답이 없는 파괴력이었다.
"뭐 하는 거냐!? 당장 저 인간을 죽여!!"
그 모습에 군로가 외쳤다.
용의 힘이라면 제아무리 명한이라도 일격에 없앨 수 있다.
상황의 어지러움은 둘째 치고 일단은 그를 죽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 크르르르
용은 그 말을 뒷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쌍각사와 눈을 마주치더니 천천히 똬리를 틀었다.
조심스럽게, 혹여나 쌍각사를 강하게 조를까 걱정되는 동작이었다.
"소백, 괜찮아?"
"후우. 후우. 일단 목숨은 건진 모양이다."
그 사이에 은소소와 향아가 재빨리 달려가 명한을 끄집어냈다.
한 번은 우연으로 살아도 두 번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용이 쌍아한테 저러고 있지?"
"……쌍아는 신수의 자격을 가졌어. 뱀에서 용으로 탈피한 존재지. 저 용의 눈으로 보자면 새끼지. 아주 어린 새끼."
"그럼 자기랑 같은 용이라서 저런다는 거야?"
"아니."
명한이 부들거리는 몸을 겨우 세워 용을 바라봤다.
신수 중에서도 제왕이라 불리는 용은 절대로 인간에게 사역당하지 않는다.
인과의 굴레 밖에 존재하며 필요에 의해서만 등장하는 것이 용이다.
용이 군로가 준비한 공간에서 머문다는 건 상식 밖.
‘뭔가 있다.’
그걸 알아내야만 했다.
지이잉.
"크으으윽!!"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이 이어졌다.
용과 같이 격 높은 대상을 관조한다는 건, 복잡한 수식을 강제로 머리에 때려 넣는 격이다.
감당하지 못하면 눈이 뽑히고 머리가 터지고 만다.
아찔함에 몸이 벌벌 떨렸다.
‘이건 좀 위험한데……’
명한이 입술을 피나게 물었다.
생각보다 용의 격이 훨씬 높았다.
게다가 벼락을 맞아 몸이 넝마가 된 터라 집중이 쉽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수준에서 몸이 버티고 있었다.
― 크르르르?
한술 더 떠, 용이 명한의 시선을 눈치챘다.
지금이라면 작은 번개 줄기도 피하지 못한다.
명한이 순간적으로 ‘죽음’을 각오했다.
"이걸 받으세요, 은공!"
그 순간이었다.
긴박한 상황을 뚫으며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부서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밟으며 뛰어오는 흰 무복 차림의 여성.
"은영영?"
놀람도 잠시.
그녀가 던진 작은 구슬이 명한의 손아귀로 빨려들었다.
은휘가 천기를 셈하다, 만약을 대비하여 은영영의 편으로 보낸 영석이었다.
본래라면 흑점을 통해서 전달할 물건이었으나, 보다시피 상황이 이랬다.
화아악―!!
명한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간 영석이 새하얀 빛을 토해냈다.
명한을 짓누르던 격의 압박이 순식간에 풀리고, 용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세하게 꿰뚫었다.
은휘의 작은 파편 하나가 용의 격을 이겨내게 한 것이다.
― 인간들이여 내 아이를 건드리지 말거라!
― 오래된 용. 네가 순순히 술법을 받아들이면 네 아이는 살려주지.
― 간악한 인간. 옛것을 숭배하는 네 더러움이 파멸을 불러올 것이다.
― 하하하. 용의 저주라면 영광으로 여기고 받아주지. 하지만 오래된 용. 우리의 더러움은 네 시간보다 깊고 무겁다.
― 아아, 비참하구나. 비참해. 천년의 자유가 이렇게 끝나다니.
수많은 장면과 말들이 머리를 스쳐 갔다.
용의 영혼에 깊이 새겨진 가장 뚜렷한 기억이었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이 뻗은 봉우리와 그 위에 구속된 용.
그리고 그런 용을 보며 금이 간 알로 협박하는 흑색 가면의 인물.
"크으윽!"
명한이 묵은 피를 토하며 관조에서 벗어났다.
"불사조가 아니었어."
관조의 흐름 속에서 무언가를 깨우친 명한.
용이 왜 인간의 속박 속에서 분노하는지.
쌍각사를 보면서 그 분노를 누그러뜨렸는지.
"용이여―!!!"
모든 걸 담아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