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의 변화
명한이 여섯 쌍둥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과 입은 없어도 시선은 느낄 수 있는지 귀 끝이 팔랑거렸다.
그때마다 희미하게 여섯 쌍둥이의 기운이 흔들렸다.
"뭐가 신기하네. 눈이 없는 대신에 다른 감각으로 대체된 건가?"
흔히 말하는 기감의 확장.
쌍둥이들의 감각은 영물 특유의 영기를 바탕으로 주변 기운과 소통했다.
귀로 들은 소리와 코로 맡은 냄새가 복합적으로 작동했다.
눈이 없어도 상대의 모습과 기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 우리 알 수 있다. 눈이 없어도 어떤 사람인지 안다.
― 청청이 말했다. 너는 믿어도 괜찮다고. 우릴 안 해칠 건가?
―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기쁘다. 근데 품 안에 있는 건 누구지?
쌍둥이들은 한 번에 말을 우르르 쏟아내고 답을 기다리는 습성이 있었다.
여섯의 의식이 어느 정도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
청청이 어릴 때부터 훈련하지 않았다면 대화가 안 될 정도로 두서없이 말이 오고 갔을 것이다.
명한이 차례대로 말을 곱씹고는 품 안의 쌍각사를 꺼냈다.
― 뱀이다!
― 용이다!
― 뱀용이다!
눈이 아닌 감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드물게 다른 답이 나왔다.
뱀의 형태이지만, 용의 자격을 얻은 쌍각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쌍각사는 길게 하품을 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쌍둥이들 주변으로 날아갔다.
호기심 어린 모습이었다.
― 주인, 아이다.
쌍각사는 이내 여섯 쌍둥이의 본질을 파악했다.
아직 세상에 난 지 얼마 안 되는, 보호해야 마땅한 새끼였다.
여섯 중 하나의 머리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쌍둥이들은 그 모습이 놀라운 듯 펄쩍 뛰면서도 어딘가 반가운 듯 그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반은 인간이지만 반은 영물.
격 높은 쌍각사 앞에서 영향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너는 저 신수하고도 얘기가 통하는 건가?"
그때, 청청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와는 마음이 통한 사이라서. 쌍아는 워낙 격이 높은 터라 내키면 너하고도 대화가 될 거다. 그렇지 않은 건 그냥 그럴 필요가 없어서겠지."
"하긴 신수니까. 이제 막 용이 돼 가는 신수라니. 태산에서도 이런 존재는 본 적이 없어."
"처음에 만났을 때는 아직 덜 여문 영물이었어. 나와 다니면서 신수로 진화한 거지."
"영물에서 신수가 됐다고? 그게 가능한가?"
놀란 얼굴의 청청을 흘겨보며 명한이 가볍게 웃었다.
살짝 들뜨는 말투에서 본심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순한 정의심에 쌍둥이들을 들고 도망친 건 아니야.’
타고난 영성만큼 그 존재에 대한 호기심도 강했다.
본능적인 끌림이라고 해야 할까.
태산이 아닌 귀문에 적을 올렸다면 엄청난 인물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은휘 사부와도 비슷한 면이 있군."
"응? 은휘라니?"
"너처럼 태어날 때부터 영성이 뜨인 사람. 물론, 그 정도는 훨씬 대단했지만."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거야?"
"여기 일이 대충 끝나면 그쪽으로 이동할 테니, 소개해 주지."
여섯 쌍둥이도 은휘가 보면 다른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
인간과 영물의 혼이 어떻게 섞였는지.
그 가능성이 어떠한지.
명한으로서도 궁금해지는 이야기였다.
― 용이다! 용이 우릴 지켜준다!
― 안 숨어도 괜찮다! 용은 엄청나게 세다!
― 엄청나게 크다! 커서 좋다!
― 시끄러워……
쌍각사가 조금 고생해야 하겠지만.
웅성거리는 여섯 쌍둥이에 쌍각사의 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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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판 위에 여러 개의 말이 놓여 있다.
서북쪽에 가장 커다란 것이 ‘천(天)’ 자로 적힌 천마의 것.
남쪽의 백(百) 자로 적힌 백약문.
그리고 동쪽으로 쭉 이어지는 수많은 문파의 말들이 놓여 있었다.
명한의 손은 이 말들 사이를 바쁘게 움직였다.
"백약문, 주검산장, 귀문, 무당. 그리고 소림 정도는 아마 배제해도 좋을 거야."
"꽤 굵직한 이름들이긴 하지만, 전체로 보면 극히 일부일 뿐이군요."
"말했다시피 신교에서 천마가 견제하는 건 암중세력. 실질적으로 이쪽은 별개의 판도로 분리해도 좋아. 실제로 싸움이 벌어질 곳은 중원 한복판. 그것도 무림맹을 중심에 둔 세력다툼이 되겠지."
"으음. 무림맹이라."
"일전의 소림사 사건 이후로 흐지부지된 안건이 다시금 수면으로 올라오고 있어. 이를 위한 사전작업도 시작될 거야. 가장 중요한 건 이 흐름에서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거지."
명한이 중원의 여러 패를 가운데로 모았다.
봉문에 들어간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이 명문입니다. 화산이나 곤륜 같은 유서 깊은 방파는 물론이거니와 남궁세가나 하북팽가 같은 명가도 섞여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판세에 휘말릴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이미 휘말렸어.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방관하는 자세로. 자신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판단하에 수용하고 있을 거야."
"으음. 믿기 어려운 얘기군요."
"정마대전이 벌어지고 난 뒤 공백이 길었어. 신교는 중원을 힘으로 지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걸음을 멈췄지. 후계 다툼이 큰 이유인 건 맞지만, 단순히 그것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가요?"
명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습작과는 궤가 다르지만, 천마의 선택은 같았다.
그는 정마대전이 끝나고 ‘화무천’이 저지른 살육을 수습하고 추가적인 공세를 멈췄다.
선택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겠지만, 핵심은 동일했다.
더 이상 살육이 벌어지면 안 된다는 판단.
"전쟁을 원하는 이들이 있어. 단순히 한두 명 죽고 마는 그런 국지전이 아닌, 중원 전체가 휘말리는 전화를 꿈꾸는 거야. 첫 단추는 분명 정마대전이었겠지. 하지만 화무천이 폭주를 멈추고 난 뒤, 천마는 이를 훌륭하게 수습했어. 그렇기에 정마대전 이후 한동안 중원 전체가 평화로워졌지."
"하지만 전쟁을 원하는 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겠군요."
"세력을 수습하고 다시 계획을 진행했어. 그 판도가 지금이야. 신교에서는 천마의 후예를 차지하고 중원에서는 무림맹을 주도하겠지."
"허허. 어마어마한 계획이군요."
위소홍이 혀를 찼다.
사천의 작은 땅에서도 하루 앞일을 파악하기 힘든 것이 사실.
중원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계획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무림맹 결성 전에 밑 작업을 끝내둬야 해."
"으음. 그럼, 다음 행선지는 어디가 되는 겁니까?"
"일단은 주검산장. 그쪽 가주가 내게 우호적인 건 맞지만, 계약은 도장을 찍어야 끝나는 일이거든. 오월도 불렀으니 정식으로 회담을 열어야지."
"그쪽에서 수락할까요?"
"내 예상대로라면 주검산장도 지금 곤란한 상황일 거야. 적당한 제안이라면 그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것에는 문제가 없겠지."
명한이 수많은 패들 중 하나를 주검산장 주변 산에 올려 두었다.
"광산."
"채굴권리로 마찰이 빚어지는 곳이지. 쏟아지는 주문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자체적인 광석 수급처는 필수야. 오월상단은 이미 오래전부터 철을 사들이고 있었지. 채굴권리만 해결해 준다면 발 벗고 우리를 도울 거다."
"그렇게 쉬이 권리를 넘길까요?"
"그건 내게 복안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
광산의 해답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주검산장에 대한 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되레 우려되는 건 이쪽이지.’
명한이 다시금 패를 움직여 주검산장 동쪽의 강 위로 올렸다.
"여긴 해룡방의 영역 아닙니까?"
"내 예상이 맞는다면 조만간 이쪽에서 움직일 거야. 뱃길을 막고 주검산장의 물건을 약탈하겠지."
"해룡방이 해적 무리임은 맞지만, 주요 방파 물건에 손을 댄 적은 없습니다."
"뒷배가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지."
"뒷배라면……?"
"남궁세가."
"남궁세가!? 안휘의 그들이 왜 이런 곳까지 손을 뻗는단 말입니까?"
깜짝 놀란 위소홍의 말대로 안휘와 사천 끝자락의 주검산장은 거리상으로 멀다.
실질적으로 접점이 없다.
"주검산장과 안휘의 남궁세가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 문파가 하나 있지."
"무당파 말입니까?"
"맞아. 호북의 무당과 안휘의 남궁세가는 각각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이지. 그만큼 교류도 많고 서로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어. 하지만 전대 무당 장문인 막천강의 치세에서는 관계가 상당히 틀어졌지. 상권을 두고 많은 다툼이 있었어."
"그러다가 이번에 무당의 장문이 교체됐군요."
"기회라 여긴 거지. 칼을 뽑기 위해서 보급을 끊는 건 병법의 기초. 주검산장의 물자를 해룡방으로 하여금 갈취. 이를 확인하고자 남궁세가의 병력이 물길을 타고 이동하면……"
"바로 무당산과 맞닿게 되는군요."
명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패를 겹쳤다.
좁게 보면 남궁세가와 무당파의 마찰.
하지만 넓게 보자면 전화의 불씨다.
아직은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끄응. 저도 책 꽤나 읽고 병법에는 능하다 여겼는데, 이 판세는 어지럽기만 하군요."
"시시각각 상황이 변하고 있으니 나도 버거운 건 마찬가지야. 이를 읽어 줄 능력의 소유자가 곁에 있다면 좋겠지만…… 마땅치 않군."
"능력의 부족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자네에게 뭐라 하는 건 아니야. 이미 백약문을 이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만 해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해 주고 있으니까."
"하하. 옆구리 찔러서 겨우 절 한번 받는군요."
위소홍이 가볍게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뒤섞인 판세는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턱턱 막힐 기분이었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야.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그때그때 판단해야겠지."
"그럼 전 그 선택이 정확하기를 기도해야겠군요."
"열심히 해달라고."
이를 안고 가는 명한은 어떤 심정일지.
위소홍은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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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이러세요?"
늦은 밤, 인적이 드문 산속 어딘가.
포대기에 아이를 안은 여인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상처가 많은 얼굴, 눈물로 얼룩진 뺨까지.
많은 고초를 겪으며 이곳까지 왔다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금기를 범한 대가를 받을 뿐이다."
"그, 금기라니요!? 전 모든 걸 약속대로 이행했어요!"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계집이 삿된 것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는 것은 태산의 율법에 어긋나는바. 정도의 이름으로 널 정화하겠다."
"우, 웃기지 마―! 날 안내한 건…… 컥!"
다급한 여인의 외침 사이로 굵고 억센 손이 끼어들었다.
입을 한 손으로 틀어쥐고 연약한 몸을 그대로 들어 올렸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밤을 밀어낼 만큼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태산이 금기라고 하면 금기다."
"끄…… 끄으으윽!"
"정도를 위한 걸음에 네 사사로움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죄는 벌로. 악은 불로 정화할 뿐이다."
"끄르르륵."
여인은 억센 손아귀 속에서 다른 말도 하지 못한 채 절명했다.
축 늘어지는 몸에 아이의 울음만 더욱 거세졌다.
"사형, 이 아이는 어찌할까요?"
남자와 함께 온 또 다른 인물이 아이를 여인의 품에서 건져왔다.
눈물로 범벅이 된, 야윈 모습의 아이였다.
"흔적이 있느냐?"
"……아뇨. 다행히 섞이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런가. 아이의 핏줄을 찾아서 노잣돈과 함께 건네주어라."
"네, 사형."
남자는 재빨리 아이의 얼굴을 천으로 덮으며 품으로 안았다.
적어도 오늘 죽을 사람이 둘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대사형."
그때, 밤의 정적 사이로 도포 차림의 인물이 나뭇가지를 밟으며 접근했다.
가슴에 박힌 ‘태(太)’ 자는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일 중에는 끼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급한 전갈입니다. 청청 사매의 위치를 찾았다고 합니다."
"……"
순간, 무시무시한 기운이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건 사람이 낼 수 있는 내공의 영역을 벗어난,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남자는 이내, 기운을 수습하며 자신을 찾은 인물에게 짧게 답했다.
"본산에 전해. 배신자를 처단하는 건 내 역할이라고."
목소리마저 이질적이었다.
그르렁거리는 짐승.
막군천이 던지고 간 돌이 거세게 구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