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내 부하 돼라.
산만큼 쌓인 서류 더미에 일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 정보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이를 처리하기 힘들었다.
흑점의 세력은 전성기만큼 늘었지만, 핵심은 아직 부족했다.
특히 정보의 처리와 분류에 능한 인물이 턱없이 모자랐다.
"호북 지방 자료를 좀 주겠어?"
"여기. 최근 들어 군소 방파의 움직임이 소란스럽더라."
"뒤에서 누가 움직이는 건가?"
"확실하지는 않아. 거대 문파가 봉문에 들어가며 공백을 노린 움직임일 가능성도 있고. 일단은 분타 쪽에 전서구를 보내 두었어."
덕분에 일월과 이월로 일이 집중됐다.
지금도 당문의 공격 이후 벌어진 주변 정세 파악에 사흘 밤을 잠도 못 자고 꼬박 일만 하고 있었다.
"저번에 당문에서 배포한 헛소문의 처리는 어떻게 됐어?"
"대부분 처리했지만, 전부는 무리. 행보를 비난하며 사천 연합 비슷한 걸 꾸리려는 움직임이 있어."
"맹주는?"
"어디더라? 내가 정리를 해 뒀는데……"
산같이 쌓인 서류 더미 어딘가.
이월이 난감한 얼굴로 자료를 뒤적였다.
워낙 자료가 많다 보니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었다.
"곤암문."
"그래, 곤암문. 응?"
답이 들려온 건 이월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이었다.
일월과 이월이 동시에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당과를 입에 문 묘아가 서 있었다.
"묘아? 네가 곤암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있어?"
"저번에 그거 정리하면서 말했잖아. 곤암문이라는 곳에서 연합을 꾸린다고."
"내가 그랬나? 그래 봐야 지나가면서 한 말일 텐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도둑질하려면 기억력이 좋아야 하거든."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하는 묘아.
그 모습에 일월과 이월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묘아야, 혹시 시간 좀 있어?"
"응? 무슨 시간? 나 소백 낭군님 보러 가야 하는데."
"낭군님이 많이 많이 좋아할 일이야. 묘아가 했다고 하면 깜짝 놀랄걸?"
"진짜? 뭔데?"
미끼를 문 물고기처럼 묘아가 다가왔다.
"이 자료를 읽으면서 관련 있는 것끼리 묶어서 분류하는 일이야. 굉장히 어려운 과정인데, 묘아가 할 수 있겠어?"
"응? 이게 어렵다고?"
"……어. 해본 적 있어?"
"사부님이랑 같이 살 때. 도둑질하려면 주변 정보를 모아서 분류해야 하거든. 이거 엄청 쉬운데. 대충 이렇게 죽 보면서……"
묘아가 서류를 대충 눈으로 훑으며 휙휙 던졌다.
얼핏 보기에는 두서없이 팽개치는 모습이었지만, 전부 관련 있는 묶음이었다.
서류 뭉치를 확인한 일월과 이월이 더없이 놀란 얼굴을 했다.
자신들이 정리한 서류들보다 훨씬 분류가 깔끔했다.
"묘아야, 좀 도와주라."
"으, 응?"
"이거 하면 은공이 엄청나게 좋아할 거야. 같이 열심히 해 보자. 응?"
"진짜로 낭군이 좋아할까?"
"그럼. 이거만 잘 처리해도 앞으로 은공이 할 선택의 폭이 절반으로 줄어들거든. 필요한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야."
귀찮아 보이는 일.
하지만 명한에게 도움 된다는 말에 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당과를 아드득 씹어 먹고 서류 더미 앞에 주저앉았다.
"줘."
일월과 이월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아졌다.
#
"흐음. 그러니까 태산문도라 이거지?"
당문의 침공 이후 이틀이 지난 시점.
청청은 버티는 걸 포기하고 자신이 아는 바를 모두 실토했다.
"……그래. 태산파에서 쫓겨난 망둥이 혜염선자가 나라고."
"혜염(慧廉)이라."
"웃지 마! 나도 안 어울리는 건 알고 있으니까."
어색한 도호에 청청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딘가 걸걸한 호걸 느낌의 그녀와는 맞지 않았다.
"그래, 태산파면 도가의 필두잖아. 지금에야 무당이 검으로 유명해졌다지만, 과거에는 무조건 태산파였지. 그런 명문의 제자가 이런 곳에서 뭘 하는 건데?"
"말했잖아, 쫓겨났다고. 내 방식을 태산파는 이해하지 못했어."
"네 방식?"
"너도 봤잖아. 여섯 쌍둥이."
"……설마 그들을 네가 만들었다는 건가?"
여섯 쌍둥이는 청청과 마찬가지로 잡혀 들어왔다.
다만, 명한이 아니면 구속이 어려울 정도로 행동이 은밀하여 사실상 머물고 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다.
"내가 무슨 수로 그런 일을 하겠어. 내가 한 건 불쌍한 놈들의 수명을 연장시켜 준 것뿐이야."
"자세하게 말해 봐. 내가 느끼기로 그 여섯 쌍둥이는 영물의 기척이 강했어. 관련 있나?"
"그걸 한눈에 꿰뚫어 보는 네가 더 대단하다는 건 아냐? 맞아. 여섯 쌍둥이는 모두 영물의 피를 잇고 있어."
"피를 잇다니? 무슨 소리지?"
"옛 신화나 전승에서 짐승의 씨를 밴 아낙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 거. 알지?"
"……설마."
"그 설마가 맞아. 태산파가 있는 태산은 영기가 짙고 영물이 많은 곳으로 유명했지. 그래서인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기현상이 드물게 벌어지곤 했어."
"그게 영물의 씨를 밴 아낙이라는 건가?"
"믿기 힘들지만 진실이야. 과거에는 이런 이들이 장군이 되어 전쟁을 평정한다는 이야기도 돌았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화된 이야기. 대부분은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못해."
명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설정. 내가 썼던 다른 글의 설정이야.’
영환기라는 이름으로 영물과 신화 등에 초점을 맞추고 글을 썼었다.
그 주인공이 영물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
청청의 말은 정확하게 이 설정을 따르고 있었다.
"그 여섯 쌍둥이도 그렇다는 건가?"
"응. 아비인 영물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태어나는 순간에는 나도 있었어."
"네가?"
"그런 이야기가 돌면 우선 태산파부터 찾곤 했거든. 괴상한 일을 뒤처리해주는 것도 우리의 일 중 하나였어. 당시 막 실전에 나서기 시작한 나도 동행했던 거야."
"꽤 충격적이었겠군."
"말도 마. 여섯 쌍둥이가 태어나는 것도 괴상했지만, 그 뒤가 더 가관이었어. 여섯 쌍둥이의 어머니. 그녀는 쌍둥이들이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부정하며 온갖 저주를 퍼부었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참혹한 이야기군."
"그곳에 있던 이들 대부분은 몰랐지만, 쌍둥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의 말을 이해하고 그들의 의사를 읽을 수 있었어. 즉, 탄생과 함께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은 거야."
청청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천적으로 영감이 강한 그녀는 그날 여섯 쌍둥이가 받았던 충격과 슬픔을 모두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난 그 아이들을 구하고자 했어. 도문의 후예로 가르침과 선행을 베풀면서."
"하지만 그걸 태산파의 높은 분들은 받아들이지 않았군."
"괴물은 죽여서 없애는 것이 정도라고 했지. 갓 태어난 아이들이 어떤 존재인지도 살피지 않고, 태어난 모습 그대로 죽이려고 했어."
"그때 도망친 건가?"
"응. 태산파의 비고를 털어버린 뒤에."
"그 와중에 비고를 털었다?"
"그냥 도망치기에는 억울하잖아. 먹고 살기도 빡빡한데 뭐라도 좀 있어야지. 중원에서 부대끼고 살기에는 내 실력도 변변치 않았고."
"하하하. 사막에 던져놔도 살 성격이군."
툴툴대고 늘어놓는 이야기에 명한이 크게 웃었다.
대범한 사고와 대범한 행동이었다.
뭇 사람이라면 동정을 가져도 쉽게 택하지 못할 선택을 청청은 단번에 해냈다.
그 호기에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럼 그 뒤로는 쭉 지금처럼 산 건가? 의뢰를 받아서 처리하며?"
"애들이 커가면서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알았거든.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돈 벌기에는 적당했지. 물론…… 몰래몰래 태산파의 이름도 팔았고."
"하하. 어쩐지 널 간판으로 삼았다 싶더니. 널 고용한 이들도 그 점은 몰랐겠네."
"태산파 내에서도 내 이야기는 비밀이거든."
청청이 백약문의 악행을 투고하는 눈이 되어도 그 신뢰성은 찾기 어렵다.
결과로만 보자면 모두를 속인 셈이다.
명한은 무릎을 치며 낄낄거렸다.
"꽤 재미있는 인간이네, 너."
"쯧. 재미 찾다가 이렇게 덜컥 잡혔으니 나는 재미 없다고. 설마하니 천마의 아들이 이런 곳에 와 있었을 줄이야. 운이 없으려니 이렇게도 걸리네."
"아니. 운이 없는 건 아니야."
"응?"
명한이 웃음을 더하며 가슴 부근을 툭툭 두드렸다.
조용히 잠들어 있던 쌍각사가 길게 하품을 하며 어깨 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 신수!?"
청청이 단번에 그 정체를 간파하며 놀란 얼굴을 했다.
"따라다니기 힘들어서 숨에 숨어있는 성성이라는 친구도 있지. 이래저래 나만큼 영물과 가까운 사람도 얼마 없을 거다."
"하지만 어떻게? 천마의 자식이 도문에 입적했을 리는 없잖아."
"꼭 도문이 아니더라도 영성에 눈뜨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
이번엔 묵혼공을 사용해서 영안을 열었다.
청청의 것이 태생적인 재능이라면 명한은 묵혼공을 통해서 개안했다.
푸른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에 청청의 입이 더욱 벌어졌다.
"말도 안 돼! 마도의 인물이 어떻게 이런 영기를 지니고 있지?"
"옳고 그름은 문파의 이름이 정하지 않아. 그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자, 대충 분위기 읽었으면 이 즈음해서 제안하지."
패를 깠으니 제안할 뿐이다.
"너, 내 밑으로 와라."
정면에서 왜곡 없이.
명한이 돌직구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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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툭.
탁자를 두드리는 손이 제법 거칠다.
앙다문 입술에 깊이 파인 주름.
불쾌한 심정이 고스란히 얼굴로 드러났다.
"도련님, 곤암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무래도 포기할 모양인가 봅니다."
"……쯧!"
마지막 수하의 말이 화룡점정.
막군천이 탁자를 손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백단목으로 만들어진 탁자가 단번에 절반으로 쪼개져서 바닥을 굴렀다.
"노여움을 거두시길. 어차피 무뢰배들이었습니다."
"무뢰배라는 건 이미 알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들을 쓰려 한 것은 백약문을 고립시키기 위함이었어. 이렇게 하나둘 엉덩이를 빼면 뭐가 남겠나?"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대응이 빨랐습니다."
수하의 고개가 더욱 깊이 내려갔다.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일치고 성과가 없었다.
당문을 통한 습격은 실패.
이를 목격해줄 태산파의 인물은 실종.
소문을 부풀려 백약문을 압박하려던 연합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버렸다.
"신교의 울타리 안에서 호의호식하는 인간이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셈이 빨라. 사람을 부리는 것에도 능하고. 주검산장의 일부터 지금까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거겠지."
"무공만이 아니라 머리도 있는 인물이라 이거군요."
"어르신께서 눈여겨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긴 호흡으로 막군천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속이 끓는다고 두서없이 날뛰는 성격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인간이었다면 부친인 막천강이 죽는 순간에 무당에서 산화했어야 옳다.
인내심을 가지고 시기를 볼 줄 아는 인간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끄는 건 의미가 없겠어. 어르신께 전갈을 보내. 곧 돌아간다고."
"저자는 그냥 내려두시는 겁니까?"
"당장은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냥 두고 가기에는 마음이 불편해. 사람을 써서 태산파 쪽으로 소문을 퍼뜨려라. 태산파에서 축출된 직전제자 하나가 백약문과 손을 잡았다고."
"……알겠습니다."
막군천은 이미 청청의 사연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쓴 것은 후에 빌미로 잡아 태산파와 백약문을 함께 압박하기 위함.
하지만 첫 번째 목적이 어그러졌으니, 이젠 굳이 아낄 이유가 없다.
가는 마당에 태산파라는 돌 하나를 집어 던질 셈이었다.
매우 거대한 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