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235)

주제 파악

청청의 보법은 바다를 닮아 있었다.

풍랑이 몰아칠 때는 거칠고 잔잔해질 때는 무엇보다 고요했다.

나가고 물러남에 어색함이 없고 선택의 속도와 방향도 매우 훌륭했다.

게다가 손속은 또 어떠한가.

장법과 조법. 지법을 번갈아 사용함에 어색함이 없었다.

능수능란하게 때에 맞는 수법을 차용하여 보법에 날개를 달았다.

하나와 하나가 더해져서 열의 힘을 발휘했다.

"이런 고수가 돈에 움직이는 건가?"

"세상살이 무공만으로 되는 건 아니라서."

갈지자로 접근해서 장권을 날리는 청청.

명한이 타구봉으로 궤적을 쳐내고 봉을 돌려 반격을 시도하자, 지법으로 면을 때리며 측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걸음이 날래고 부드럽기가 비단과 같았다.

양손이 순식간에 갈고리처럼 말려 옆구리를 할퀴니, 명한도 타구봉을 수세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짧은 마찰과 함께 같은 거리만큼 물러났다.

"좋은 수. 손속에 도가의 향이 짙군. 무당이나 청성은 아닌 거 같은데 어느 도문이지?"

"하! 아녀자의 신분을 파헤치라고 배웠나?"

이번에는 손끝에서 섬광처럼 튀어나오는 지법이었다.

기세는 강하지 않지만, 그 속도와 은밀함이 대단했다.

명한의 눈으로도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확인이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력을 무시하고 뛰어나가면 근접 거리에서 주먹이 날아왔다.

지법과는 다르게 주먹은 하나하나가 강맹했다.

주먹이 부딪칠 때마다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공 또한 출중하군. 심법에도 흔들림이 없어. 정종의 그것. 매우 뿌리가 깊고 무거운 심법이야. 이런 건 본류에서도 극소수만이 익힐 수 있을 텐데?"

"자꾸 캐내지 마. 그런 남자는 인기가 없다고!"

주먹이 여럿으로 나뉘더니 강기를 두른 채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소림의 백보신권을 보는 것 같았다.

피하자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명한이지만, 이번에는 선택을 달리했다.

다리를 땅에 깊이 박고 단순 내력만으로 탈응(脫應)의 권을 펼쳤다.

주먹에서 뻗어 나간 힘의 흐름이 강기의 권을 비틀었다.

회오리치듯 모든 강기 다발이 명한을 스쳐 뒤로 처박혔다.

"대체 무슨 무공이냐, 그건?"

"남자의 신분을 캐물으면 인기 없어."

"쯧."

말로 받으며 큰 걸음으로 거리를 좁혔다.

청청은 독특한 보법으로 거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 방향을 틀었다.

두 선이 한 점에서 서로 엇갈리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명한은 놓칠 생각이 없었다.

쩌엉―

왼손으로 허공을 탈형(脫形)으로 가격.

부서지는 형태의 반발력으로 몸을 회전.

어긋나는 청청의 걸음을 탈응의 힘으로 돌려세웠다.

"아악―!"

발목이 꺾이며 그대로 나자빠지는 청청.

그녀 정도의 고수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실수였다.

그만큼 거리를 좁힌 명한의 반응이 예상외였다는 의미.

황급히 바닥을 손으로 차며 몸을 일으키지만, 이미 발은 절뚝이고 있었다.

"그 다리로는 계속 피할 수 없을 거 같은데."

"……젠장.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백약문에 이런 고수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어."

"의뢰를 너무 대충 받는 거 아니냐? 관찰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알아야지."

"쯧. 누군데? 네가 뭐 천마라도 되는 거냐?"

"천마는 아니고 그 아들은 되는데."

"어?"

"소백이다."

청청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다가 급격히 커졌다.

‘어, 어……’ 혀끝에서 맴도는 말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최근에 신교를 떠났으니까. 설마 그것도 모르고 일을 받은 건가?"

"이런 썅! 어쩐지 일에 비해서 보수가 엄청나다 싶더니!"

"후회는 일절만 하자고. 일을 준 배후만 불면 적당히 봐줄 생각은 있어."

"큭! 다리 좀 다쳤다고 내가 진 거 같아? 아직 남은 기술이 많아!"

"……슬슬 분위기 읽지?"

드드드득.

명한이 극천일무기의 기운을 일으켰다.

순수한 파괴의 힘이 그의 전신을 붉게 물들여 패도적인 기세를 내뿜었다.

청청과의 싸움에서 명한이 지지부진했던 건 적당한 수준에서 어울려 주었기 때문.

단순히 죽이고자 했다면 이미 싸움은 끝났다.

"……"

그리고 청청도 이런 명한의 모습에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오금이 저리고 사지가 벌벌 떨릴 정도로 파괴적인 기운이었다.

‘저런 건 못 피해.’

자랑하는 보법도 다양한 무공도 마찬가지였다.

"항복."

합리적으로, 마지막 선택지를 골랐다.

#

당백천이 아연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봤다.

당문 전력의 팔 할 이상을 끌고 왔는데 멀쩡한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싸움이 된 것도 아니었다.

압도적인 패배.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위소홍의 모습만 봐도 현실은 명백했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거지?"

"독곡이 사라지고 난 뒤, 백약문은 오독문의 진전을 잇기 위해서 전심전력으로 노력했소. 그간 문에서 금기하던 것도 개방하고 새롭게 태어나고자 했지. 당문이라는 울타리에 박혀 세만 탐하던 그네들과는 다를 수밖에."

"우리 당문이 고작 이것밖에는 안 된다는 건가."

그래도 한때는 사천이면 당문이었다.

독곡의 부상으로 밀리긴 했지만, 그래도 자부심은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금 본래의 위치로 돌아갈 거라 확신했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아니, 이미 오래전에 차이는 벌어졌던 건가."

혈염마녀의 사건에서도 끝까지 싸우던 것은 백약문이었다.

독이라면 일가견 있는 당문이었지만, 세를 지키기 위해서 그저 숙이고만 있었다.

이런 태도의 차이가 알음알음 격차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명한이 개입하건 하지 않건 이미 두 세력은 같지 않았다.

"포기하고 돌아가서 십 년 봉문을 받아들이시오."

"……알겠소."

"아버님, 안 됩니다!! 이대로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문천아, 우리는 패배했다. 어쩌면 네 형의 말대로 은인자중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구나. 다 어리석은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야."

"크으으윽!!"

분에 못이긴 당문천이 땅을 쳤지만, 이미 승세는 기울었다.

당백천의 선언에 남은 당문인들도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사천의 패자를 칭하던 당문의 마지막치고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이곳의 정리도 끝난 모양이군."

"아, 문주님 오셨습니까."

그때였다.

청청을 정리하고 명한 일행이 돌아왔다.

주변을 쭉 훑으며 부상자가 적음을 확인한 명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생각보다 훨씬 잘해 주었어. 당문의 위세가 예전만 못한 건 알았어도, 조금은 피해를 감수했거든. 훈련을 제대로 시킨 모양이야."

"혈염마녀의 사변을 겪은 뒤, 백약문의 무인 모두가 생각을 고쳐먹었지요. 약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단련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습니다."

"좋군, 좋아."

애초에 백약문은 무공이 약한 집단이 아니다.

생각을 바꾸고 단련에 힘쓴 것만으로 이미 사천에는 이들과 겨룰 곳이 없다.

‘혈염마녀를 처리하며 백약문을 손에 넣은 건 생각보다 좋은 수확이었어.’

만독비전까지 더해졌으니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크윽! 그대가 백약문의 새로운 문주인가?"

"음? 아, 당문의 문주. 당백천인가."

"날 아는 건가?"

"적어도 상대하는 적이 누구인지는 파악하는 성격이라서. 사천의 강자는 전부 셋. 독곡, 백약문, 당문. 그중 독곡이 사라졌으니, 당문을 파악해 두는 건 기본이야."

"……"

"하지만 너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했군."

명한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그 앞에 섰다.

당문에 소식이 닿지 않았다는 건 의외로 명한이 신교를 벗어난 이야기가 많이 퍼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후계였던 그가 지위를 포기하고 떠난 거니 신교 입장에서 반갑지 않은 이야기.

게다가 밖에서는 흑점이 이야기를 통제하니, 크게 번질 수가 없었다.

"뭐, 지금 와서 중요한 건 아니지. 그보다 승자의 권리로 그대들에게 이런 사태를 종용한 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데."

"……우리가 받은 건 고작 서신 한 장이었을 뿐이다."

"서신 한 장?"

당백천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서 건넸다.

"하. 고작 이런 꾀임에 넘어왔다는 건가? 얼마나 눈이 멀었으면 눈앞에 불구덩이가 있는 것도 못 알아보지?"

"크윽……"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건가?"

"모른다. 우린 서신의 내용에만 응해서 너희를 공격했을 뿐."

내용을 전부 읽고 앞뒤를 뒤져봐도 특별한 건 없었다.

필체가 빼어난 것을 제외하면 말 그대로 ‘서신’ 한 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고작 이런 거 하나에 움직였다는 건가?’

아무리 멍청하고 아무리 욕심이 많아도 조금 이상하긴 했다.

명한이 다시 서신을 쥐고 반야의 힘을 움직였다.

"조심하세요!"

순간, 서신에서 팔 같은 것이 튀어나와 명한의 목을 노렸다.

"같잖은 수를 쓰고 있네."

하지만 이 손은 명한의 목 언저리에도 닿지 못했다.

반야는 철저하게 반응과 반격에 특화된 무공.

활성화시킨 상태에서는 어지간해서는 당하지 않는다.

팔은 순식간에 뭉개진 뒤 연기로 화해서 사라졌다.

"매우 적은 양의 미혼향에 술법을 섞어서 적용해 뒀네. 당문이 달랑 서신 하나에 움직인 것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미, 미혼향이라고?"

"먹에 녹아있는 냄새가 안 느껴져?"

"……"

당백천의 얼굴이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독으로 유명한 당문이 고작해야 미혼향 따위에 당해서 대사를 그르친 격이다.

조상 볼 낯이 없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꽤 치졸한 인간이야. 그럴듯한 미끼로 사람을 움직이면서 교묘하게 무언가를 섞어두고 있어. 차라리 혈교가 더 깨끗할 판이네."

"혀, 혈교? 여기서 혈교의 이름이 왜 나오는 거냐?"

"너희를 움직인 놈들이 혈교와 손을 잡고 있거든. 이런 싸구려 술법은 배운 건지 도움을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혈교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야!"

"하아. 하나하나 설명하기도 힘드니까, 그냥 돌아가. 가서 뭐 봉문을 하든 뭘 하든 마음대로 하고."

"우, 우리를 그렇게 보내준다는 거냐?"

"어차피 그쪽은 버림 패로 쓰인 거에 불과해. 서신에 적힌 대로 백약문을 비방하며 당문을 통한 혈사를 조작. 이를 빌미로 다른 세력을 끌어와서 분탕질을 치는 거지."

명한이 삼매를 일으켜서 서신을 태웠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법이라 굳이 복잡한 추론도 필요 없었다.

신교를 벗어나며 발생할 수십, 수백 가지의 가정 중에서 맨 윗단에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거기, 그쪽 소저도 그렇게 생각하지?"

"나, 나 말이냐?"

훅 들어온 질문에 청청이 당황했다.

"그쪽은 백약문에서 벌어질 혈사를 목격하기 위한 목격자로 고용된 거잖아. 즉, 확인된 정보를 전달할 곳도 방법도 정해져 있다는 의미. 어느 정도 신뢰도가 갖춰진 집단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방법이야."

"……"

"말을 아끼겠다? 좋을 대로. 어차피 시간은 많고 캐낼 방법은 더 많아. 다만, 내가 당문을 그냥 풀어준다고 유약한 인간이라고 판단하면 곤란해. 이들은 그렇게 해도 되니까 그럴 뿐이야. 반면, 그쪽은 아닐 가능성이 높고."

점점 어두워지는 청청의 얼굴을 보며 명한이 미소 지었다.

잘생긴 얼굴에 화사한 미소.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청청은 도무지 동의할 수 없었다.

"……"

저 웃음 너머의 공포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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