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235)

잘못된 선택

연등 가득 채워져 있던 건 독이었다.

주변이 순식간에 독에 휩싸여 피부와 폐부로 스며들었다.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이들이 다수였다.

"해독환을 먹어라! 내공으로 독을 눌러!"

"건방진! 감히 누구 앞에서 독을 쓰는 것이냐!?"

다급한 처치와 동시에 당백천이 불같이 화를 냈다.

당문 하면 독의 대명사.

그런 자신들에게 독으로 응수하는 백약문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당문을 뭐로 보고!’

내공으로 독을 해소.

주변의 독연을 한 손으로 빨아들였다.

"당문 앞에서 독을 쓰려거든 천년은 이르다!"

빨아들인 독은 순식간에 당백천의 몸에서 중화되었다.

철저하게 독으로 연마된 그의 몸은 만 가지의 독에 면역이라는 ‘만독불침’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허덕이던 다른 문도들도 그의 곁으로 모여들어 숨을 골랐다.

"과연 당문은 당문이라 이건가."

그런 그들 앞으로 위소홍이 내려왔다.

생각보다 강한 당백천의 독공에 살짝 감탄한 눈치였다.

"위소홍! 숨어 있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 배짱 하나는 대단하구나!"

"하하. 당 문주, 우리가 왜 숨어야 하오? 야밤에 타문을 습격한 그대들의 야비함이 무공이라면 한발 물러나야 하겠지만."

"닥쳐라. 당문이 사천에 터를 잡고 산 것이 벌써 수백 년이다. 독곡의 위세에 절절매던 네놈들이 이제 와서 기세등등하게 세를 펼치는 꼴을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건 당문도 마찬가지 아니오? 독곡에 숨도 못 쉬던 이들이 이제는 패자를 자청하는구려. 그 꼴이 문도들 보기 부끄럽지 않소?"

"감히 어디서!"

듣고 있던 당문천이 불같이 화를 내며 뛰어올랐다.

손아귀에 잡힌 은침의 숫자는 모두 여섯.

일거에 위소홍을 향해서 뿌리니 그 속도와 은밀함이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하하하하!’ 하지만 위소홍은 한 점의 당황도 보이지 않았다.

소매를 강하게 휘둘러 은침을 한 번에 쳐내고, 당문천을 향해서 장력을 뿜었다.

수비와 공세가 거의 동시였다.

당문천은 뛰어올랐던 기세 그대로 뒤로 튕겨 나갔다.

"쿨럭!! 쿨럭!"

"문천아!"

황급히 당문천을 챙기는 당백천.

장력 한 번에 속이 진탕되고 경맥에 상처를 입었다.

‘위소홍의 내공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그가 파악하던 위소홍의 경지와는 격차가 컸다.

"어리석은 인간. 이미 이 백약문은 문주님을 따르며 몇 걸음이나 발전했다. 쥐새끼처럼 숨죽이고 있다가 이제야 살길 찾아서 고개를 내민 너희와는 달라."

"문주? 위소홍 네가 문주가 아니라는 거냐?"

"우리를 습격하란 제안을 받았으면서 아무런 조사도 안 한 건가? 욕심에 눈이 멀었구나."

"……"

내막이 있으리란 건 당백천도 예상했다.

하지만 그래도 백약문을 무너뜨린 후의 보상이 훨씬 컸다.

아무리 용을 빼는 재주가 있어도 백약문은 백약문.

독곡이 없는 이상 당문이 질 이유는 없었다.

‘그게 아니란 말인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상황이 어긋나 있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십 년간 봉문을 해라. 그리하면 목숨을 붙여주지."

"……뭐? 십 년이면 사천에서 당문의 이름이 지워지고 말 거다!"

"그러니까 일 벌이기 전에 조심했어야지. 당문 정도 되는 곳의 수장이 사후약방문이 무슨 일인가."

"……"

당백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직 당문의 전력이 전부 꺾인 건 아니지만, 흐름이 좋지 않다.

게다가 품 안의 아들 또한 상처가 깊다.

‘내 대에서 당문이 치욕을 받는 건가.’

이가 갈리고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아, 아버님……"

"아! 문천아!"

"아직 아닙니다. 아직……우리에게는 패가 있습니다. 서신을 전한 이들이 거짓이 아니라면 기회는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당문천은 피를 토하며 종용했다.

한번 칼을 뽑아 든 이상 결과를 내지 못하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문주인 당백천은 둘째 치더라도 결정에 손을 얹은 그 자신은 피할 수 없다.

어떻게 해서는 끝을 봐야 했다.

"……그래. 당문의 아이들이 고작 이렇게 꺾일 수는 없지."

그 집념이 당백천에게 다시금 불을 붙였다.

부상입은 당문천을 뒤로 돌리며 남은 당문의 문도를 향해 외쳤다.

"우리는 당문이다! 모두 물러나지 않고 싸운다!"

"어리석은."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싸움은 격화되었다.

#

한창 싸움이 격렬해지는 순간.

명한은 당백천이 믿고 있는 지원군을 찾기 위해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왔다.

나무 끝자락에서 내려다보이는 산의 전경 속에서 이질적인 기운을 찾아 헤맸다.

‘조금 더 넓게. 조금 더 자세하게.’

반야를 통한 눈이 목혼공의 이치를 타고 퍼져나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혼이 있고, 그 혼에는 저마다의 색이 존재한다.

명한의 눈에는 이 색들이 제각각 나뉘어 구별되었다.

보통이라면 미쳐버리고 말 정도의 압도적인 정보량.

하지만 몇 차례의 경험과 멸아(滅我)의 특성이 이를 막아 주었다.

"……찾았다."

나를 잊고 세상에 잠식되어 바라본 시야.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이질적인 색을 찾아냈다.

백약문도 당문의 것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독특한 기질의 존재였다.

"날 따라서 움직여 줘."

은소소와 향아에게 말을 남기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나뭇가지를 밟고, 절벽의 턱을 디디며, 경사의 면을 차면서 가속했다.

어마어마한 속도감에 주변 경물이 휙휙 밀려나고, 이질적인 색의 공간까지 당도했다.

숲의 어두운 그림자 안.

날리는 낙엽과 부서지는 달빛만이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다.’라는 단편적인 말로 이 자리를 묘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명한이 본 것은 허상이 될 수 없었다.

"내 앞에서 숨을 수는 없다."

주먹을 움켜쥐고 멸아의 첫 번째 초식 ‘탈형(脫形)’을 사용했다.

주먹이 닿은 지점을 중심으로 금이 퍼지더니 차례대로 무너졌다.

순간적이나마 세상을 깨고 그 이면으로 힘을 전달할 수 있는 초식이었다.

방사형의 금 너머로 바삐 움직이는 기척이 감지되었다.

"도망칠 수도 없다."

흩어지는 기척으로 손을 당겼다.

멸아의 첫 번째 경지 탈(脫)의 두 번째 초식 ‘탈응(脫應)’이었다.

힘의 흐름을 비틀어서 모든 행동에 대한 반대급부를 먼저 당겨왔다.

도망치던 기척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명한 쪽으로 모였다.

"답해라. 너흰 누구지?"

질문에 주변 기척들이 굉장히 크게 흔들렸다.

경악에 대한 극적인 반응.

하지만 그럼에도 주변에서는 단 하나의 변화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건 은형술의 수준을 넘어선 기교였다.

"도련님, 그림자 속에 숨어 있어요!"

해답은 뒤따라온 향아의 입에서 나왔다.

명한이 그대로 손을 바닥에 박고 탈형의 초식으로 그림자를 쳤다.

그림자가 크게 요동치더니 사람들을 뱉어냈다.

그 숫자가 여섯에 모두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악! 이것들은 뭐야! 전부 눈과 입이 없잖아!"

모습을 확인한 은소소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여섯 쌍둥이의 얼굴에는 본래 있어야 할 눈과 입이 존재하지 않았다.

큰 귀와 벌름거리는 코가 전부.

후천적으로 눈과 입이 제거된 것이 아닌, 선천적인 기형이었다.

― 위험! 도망친다!

― 어떻게 우리 위치를 알았지?

― 이 인간. 보통이 아니다! 위험하다!

여섯 쌍둥이 사이로 오가는 눈빛과 희미하게 전해지는 의식.

명한에게는 어딘가 익숙한 방식이었다.

"네놈들 전심통을 쓰는군."

전음은 기본적으로 ‘말’ 자체를 내공으로 흘려서 진동으로 전하는 것.

입이 없다면 전음 자체는 불가능하다.

이들의 방식은 확실히 영물이 사용하는 전심통이었다.

― 어, 어떻게 우리 대화를 엿들을 수 있지!?

― 도망치자!

귀로는 말을 듣고 대화는 전심통으로 나누고 있었다.

명한이 그 전심통을 주워듣자 매우 놀라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말이 아닌 의식의 나눔이라 그런지, 행동이 매우 기민했다.

"도망치지 못한다고 했을 텐데?"

하지만 명한이 그런 걸 그대로 내버려 둘 리 없다.

탈응의 초식으로 도망치던 놈들을 거꾸로 당겨와서 한곳으로 처박았다.

놈들은 자신들이 왜 도망치지 않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는지가 이해 안 되는 듯, 귀만 쫑긋거렸다.

"자. 남은 귀마저 다 뜯어내기 전에 답하는 것이 좋을 거야. 너흰 뭐지? 누가 보내서 온 거냐?"

"……"

"방금 봐서 알 텐데? 나는 너희 전심통을 엿들을 수 있어. 허튼수작을 벌일 거라면 포기하는 편이 나아."

"아니, 허튼수작은 아니다."

"……!"

마지막 말은 여섯 쌍둥이의 것이 아니었다.

명한의 기감을 뚫고 나타난 묘령의 여인.

나뭇가지를 밟고 쌍둥이들 앞에 내려서서, 명한과 대치했다.

"설마하니 이곳에 전심통을 엿들을 수 있는 능력자가 있을 줄이야. 역시 제대로 된 정보를 준 건 아니었나. 빌어먹을 놈들."

나이를 추측하기 어려운 외모에 목소리는 조금 걸걸했다.

낭인에 가까운 복장에 허리춤에는 낡은 피리가 하나.

호리병만 쥐여주면 차라리 개방의 인물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개방과는 사뭇 달랐다.

‘차라리 도문.’

유유자적 떠도는 도사 느낌이었다.

"그쪽은 누구지?"

"청청. 보다시피 우리 못난이들을 보호하고 있는 사람."

"그 여섯을 네가 부린다는 건가?"

"부리는 건 아니고. 그냥 서로 상부상조하는 거로 생각해 줘."

말과는 다르게 여섯 쌍둥이는 청청의 뒤로 딱 달라붙었다.

어머 새를 쫓는 아기 새의 모습 같기도 했다.

"여기서는 대체 뭘 하고 있던 거지?"

"뭐…… 노동이지. 우리 의뢰인께서 그쪽 나으리들을 좀 관찰해 달라고 했거든. 들키지 말고. 은밀하게. 근데, 이런 식으로 단번에 간파할 줄이야…… 솔직히 많이 놀랐어."

"누가 의뢰했지?"

"사업의 특성상 그걸 밝히는 건 곤란해."

"곤란한 수준에서 멈추는 편이 낫지 않을까?"

명한이 기세를 끌어 올렸다.

사업이든 뭐든 뒷배를 밝혀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아, 너무 열 내지 말자고. 그쪽 같은 고수와 싸우는 건 수지타산이 안 맞아."

"그럼 순순히 의뢰인을 부는 편이 어때?"

"그건 또 좀…… 이래 봐도 직업윤리가 탄탄한 편이라서. 이번만 못 본 척하고 넘어가 주면 안 될까? 다음에 기회가 생긴다면 내가 특별히 할인해 줄게. 어때?"

"구미가 당기네. 하지만 안 돼."

"……돈 안 되는 싸움을 꼭 해야겠어?"

"돈이 전부가 아니라서."

흐름으로 봐서 배후는 혈교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배후를 알아내야 한다.

명한은 청청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어쩔 수 없네. 난 분명 완만한 해결을 위해서 노력했다고. 결과는 내 책임이 아니야."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어. 어떤 결과가 나와도 네게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 배포로 우리도 좀 놔주지 그래."

"배후만 밝힌다면."

"쯧. 나이도 젊은 분이 꽉 막혀서는."

화아악!!

청청의 몸에서 강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하늘이나 바다를 닮은, 넓고 깊은 기운이었다.

이것만 봐도 청청은 혈교와는 관계가 없는 인물이었다.

‘도가계열의 내공.’

그것도 어설픈 것이 아닌 정종의 기운이었다.

"맞고 나서 울어도 안 봐줘."

새파란 파도와 함께 청청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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