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격차
당문의 현 문주, 당백천이 서신을 손으로 구겼다.
이른 새벽에 문패에 걸려 있던 서신이었다.
당문에게 전하는 어떤 은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소천아, 어찌 생각하느냐?"
"아버님. 소자 생각에는 함정 같습니다."
"함정이라?"
"백약문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음은 맞지만, 명분이 없습니다. 불화를 만들어 이득을 보려는 제삼 세력의 수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백천의 장자인 당소천의 의견이었다.
"흥! 나약한 소리입니다, 형님."
그리고 이건 둘째인 당문천이었다.
"본래 독곡이 사라지고 없는 영역은 우리 당문의 것이 됐어야 옳습니다. 오래전부터 사천의 패자는 당문이었죠. 백약문 따위가 갑자기 오독문의 후예를 자처하며 세력을 넓히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우. 그건 너무 근시안적인 판단이네. 백약문과 우리는 서로 견제와 협력을 하면서 성장할 사이지 무조건 각을 세워서는 안 되네."
"하! 그러니까 형님이 안 된다는 겁니다. 대체 우리 대당문이 뭐가 아쉬워서 백약문 따위와 협력을 합니까? 문의 힘은 이미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기회를 잡고 백약문을 밀어내면 사천 제일의 문파가 될 수 있습니다!"
"아우……"
"그만. 둘 다 그만하거라."
과열되는 대화를 당백천이 제지했다.
형제가 아무리 열을 내도 결국 결정권은 당백천의 것이었다.
"이 서신을 보낸 자의 의도는 뻔하다. 우리로 하여금 백약문을 공격하여 그 과정에서 득을 보려는 거겠지."
"아버님. 역시 혜안을……"
"허나."
반색하는 당소천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문천의 말대로 우리 당문의 힘은 포화 상태다. 정마대전에서 제대로 된 힘을 쓰지도 못한 채 후에는 독곡에 가려져 있었어. 대당문의 위세가 당대에 와서는 바닥까지 떨어진 셈이다."
"아버님, 허나 당문의 치세가 부족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부족하지 않아 머무르기만을 바라면 그건 사내가 아니다. 응당 당문의 사내라면 더욱더 높은 곳을 노리고 나아가기를 원해야지. 소천, 네게는 그 의기가 부족하구나."
"……"
"문천. 네가 문 내의 이들에게 전해라. 현 시간부로 당문은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백약문을 공격할 것이다. 명분이라면 이것으로 충분하겠지."
당백천은 말을 맺으며 구겨진 서신을 바닥으로 던졌다.
은밀한 제안과는 별도로 백약문에 대한 몇 가지 소문을 상소와 같은 형태로 첨삭해 두었다.
아는 이들이라면 이것이 거짓임을 알겠지만, 당백천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명분은 어차피 구실.
"당문을 사천제일로 만들겠다."
본심은 욕망이었다.
#
사방에서 약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명한이 백약문이 기거하는 동안 약황비전과 만독비전을 위소홍과 연구한 결과였다.
확실히 시스템을 통해서 칠채향을 얻은 명한과는 깊이가 달랐다.
약과 독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경험은 그때마다 새로웠다.
"같은 독이라 해도 쓰임에 따라 방식이 달라진다 이거군."
"맞습니다. 문주님의 칠채향이라면 그 성질의 변화를 손쉽게 할 수 있을 터. 몸 안에 최대한 많은 약기와 독기를 보관해 두다가 상황에 맞춰 배합하시면 됩니다."
"서로 상충하는 기운은 어찌하는가?"
"하하. 그럴 때는 중화제를 사용하면 되지요. 상생과 조화의 이치는 독과 약에도 존재한답니다. 최근에야 깨달은 방법인데……"
명한은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웠다.
같은 쓰임이라도 알고 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건 다른 법.
칠채향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다른 성질을 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드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 담론이 깊어지려는 찰나.
밖에서 흑점의 연락책이 다급하게 난입했다.
"무슨 일이지? 급한 일이 아니라면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일월 분타주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문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당문이? 생각보다 빠르군."
명한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연락책에게 손짓했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달했다.
당문의 움직임은 예상했던바.
그에 대한 대책도 이미 구상해 두었다.
"이해했겠지?"
"네. 최대한 빠르게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혈교의 움직임을 피해서 백약문에 눌러앉았을 때 예상한 상황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앞선 것과 같은 암살자를 통한 공격.
하지만 이건 이미 터를 잡고 백약문의 보호를 받는 이상 효력이 없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다른 세력을 움직여서 백약문을 흔드는 이독지독의 계.
사천에는 이미 백약문과 힘을 겨루고 있는 당문이 있으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주님 예상대로 당문이 칼을 빼 들었군요."
"어차피 기회만 보던 이들이다. 내 움직임에 맞춰서 다른 세력이 준동하고 있으니, 여러 가지 제안을 받았겠지. 현명한 이라면 제안을 무르고 살길을 도모하겠지만……"
"현 당문의 문주 당백천은 그 기질이 거칠고 난폭한 자입니다."
"미끼를 덥석 문 거지. 셈이 있다 해도 그보다 욕심이 앞선 거야. 어쩌면 백약문의 힘이 자신들보다 훨씬 약하다고 여기는 걸지도."
"하하. 어리석은 얘기군요."
위소홍의 눈에서 정광이 쏟아졌다.
예전 혈염마녀의 사건 때, 피하기 급급하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만이 아닌, 백약문 전체가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당문이 싸움을 걸어온다고 피할 이유가 없었다.
"걸어오는 싸움이라면 받아주면 그만. 당문은 백약문이 왜 사천제일로 불리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겁니다."
"믿음직스럽네. 그럼 당문에 대한 건 그 쪽에게 일임하지."
"허면 문주님께서는?"
"부추긴 이들이 맨입으로 당문을 움직였겠어? 그쪽도 사람을 투입할 거야. 어떤 놈들이 뒤에서 수작인지 덜미를 잡아봐야지."
우선 적으로 떠오르는 건 혈교.
하지만 현 상황에서 확정은 금물이다.
최대한 많은 것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앞으로의 행보를 위한 최선.
명한은 사소한 것도 놓칠 생각이 없었다.
"향아야, 소소를 불러와라."
바둑판 위의 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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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문의 무력부대, 흑매.
야심한 밤의 어둠을 틈타 산길을 기어 올라갔다.
이들의 목표는 백약문으로 통하는 산길 입구의 확보.
추가적인 병력 유동이나 민간인의 휘말림 등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정지. 이곳부터는 신중하게 움직인다."
흑매의 대장, 당순철의 명령에 부대가 정지했다.
"대장. 어차피 약이나 만지는 의원 나부랭입니다. 만나는 족족 죽이면 그만인데, 굳이 서행할 이유가 있습니까?"
"흥. 나라고 의원 따위에게 신중하고 싶은 줄 아냐? 다른 부대와 간격을 맞추기 위해서 속도를 조절할 뿐이다."
"흐흐. 그럼 이참에 우리가 속도를 올려서 공을 선점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우리끼리?"
"어차피 본대가 가는 길 아니면 잔바리 아닙니까. 후위를 흔들어서 병력을 분산시키면 그것으로 충분한 공입니다."
부하의 제안에 당순철의 눈이 흔들렸다.
사천하면 당문. 당문하면 사천제일.
백약문이 세를 넓혀도 한 번도 두려워한 적이 없다.
‘그래. 끽해봐야 의원 놈들이잖아.’
미리 공격해서 공적을 쌓는 것도 좋아 보였다.
"좋아. 백약문 뒷길에서 창고 쪽으로 이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 시간이면 보초도 몇 놈 없겠지. 수를 줄이고 본대가 들어오기 쉽게 만든다."
"흐흐. 좋은 계획입니다, 대장."
"그러게. 별동대치고는 꽤 과감한 계획이야."
"암. 그렇고말고 우리 대장이…… 응?"
"누구냐!?"
대화에 끼어든 낯선 목소리에 당순철이 빠르게 반응했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은침을 던지고 소매에서 단검을 뽑아 겹쳐서 쥐었다.
하지만 침이 박히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이게 당문의 무력부대 수준인가. 확실히 잘 훈련되어 있기는 하네. 하지만……"
"큭!!"
되레, 어둠 속에서 날 선 검기가 날아와서 백순철을 밀어냈다.
다급히 단검으로 막았지만, 손해가 적지 않았다.
날이 갈려 단검이 부러지고 손속이 말려서 내상도 입었다.
"누구냐!?"
"하. 공격을 나서면서 적이 누구인지도 몰라?"
"백약문에 검을 쓰는 자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다."
"정보가 그렇게 느려서야 밥벌이를 어떻게 할까."
어둠 속에서 검을 쓴 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몸의 윤곽은 여자임이 확실했다.
"……흑점?"
"그래도 눈썰미는 있네."
가리지 않은 문양은 흑점의 것.
당순철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어째서 흑점이 백약문을 돕고 있는 거지?"
"이래서 휘둘리기만 하는 놈들은 상대가 어렵다니까. 일일이 다 설명을 해 줘야 하니."
"무슨 소리냐!?"
"애초에 백약문과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어. 이걸 모르고 공세를 취한 너희의 어리석음을 탓해야 하지 않나?"
"……"
당문의 정보망에는 들어있지 않은 내용.
최근에 백약문으로 일단의 무리가 진입했음은 알지만, 그들은 그저 뜨내기 상인으로 보고됐다.
‘전부 계획된 함정인가?’
불쑥 의문이 들지만, 이미 빼든 칼.
"흥. 그래 봐야 정보상 나부랭이. 의원들과 힘을 합친다고 우리를 이길 것 같나?"
"한심하기는."
"뭐?"
스슥. 슥. 슥.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칼들.
순식간에 흑매의 일원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적의 위치도 쓰는 수법도 알지 못한 채, 전부 절명했다.
"무, 무슨 짓을……!?"
"죽기 전에 알려줄게. 이건 흑뇌진결이라고 해. 태사님께서 찾아오신 우리 흑점의 독문 무공이야. 그동안은 힘이 없어서 괄시를 받았지만, 이제는 아니거든. 그동안 당문이 은인자중하며 갈아왔다는 칼……"
"컥!"
어둠 속에서 날아와 목에 박히는 검 한 자루.
"무뎌."
당순철이 비적비적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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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백천은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지금 즈음이면 별동대에서 신호가 왔어야 옳다.
다른 진입로를 장악하고 퇴로를 끊어서 적을 한 번에 몰아서 소탕하는 법.
구상한 계획 중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것이었다.
"안 되겠다. 소천아 네가 애들을 데리고 별동대를 확인하고 와라."
"아버님. 제가 빠지면 전력이 약화됩니다."
"하지만 별동대의 신호가 없으면 본대도 움직일 수 없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네가 직접 확인해라."
"……알겠습니다."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명령은 명령.
당소천이 병력을 일부 떼어서 산길로 들어섰다.
백약문의 영역은 길이 험한 터라 왕복에 족히 한 시진은 필요했다.
그 시간 동안 본대는 꼼짝없이 발이 묶여 버렸다.
‘협력하기 위해서 온다는 이들은 왜 보이지 않는 거지?’
서신을 보낸 자가 약속한 병력.
도착했어도 이미 도착했어야 할 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역시 함정이었던 건가."
뒤늦게 후회해 봤지만, 이미 뽑아 든 칼.
어떻게든 백약문을 무너뜨리고 깃발을 꽂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
그 순간.
선두에서 본대를 끌던 당문천이 다급하게 외쳤다.
은밀함을 유지해야 했음에도 소리를 죽일 수 없는,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연등?"
백약문 영역 곳곳에 떠오르는 붉은색 연등.
단오절에 소원을 적어 하늘에 띄우는 그 연등이었다.
얼추 헤아려도 수백 개.
하늘이 순식간에 연등으로 가득 찼다.
"……피해!!"
그리고 그때, 당백천은 알아차렸다.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 있어서는 안 될 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그 사실은 이미 정황이 어긋났다는 증거였다.
퍼퍼퍼펑!!
폭음과 함께 사방의 연등이 동시에 폭발.
붉은색 가루가 사방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