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235)

새롭지 않은 적

기습은 상당히 날카로웠지만, 흑점의 반응도 기민했다.

즉시, 병력을 집결하여 암살자의 접근 경로를 차단.

화살을 쉼 없이 날리며 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안쪽에 있다! 목표부터 처리해라!!"

"모든 것은 대업을 위하여!"

그럼에도 화망을 피해서 파고드는 암살자들이 있었다.

몸에 상처가 나는 걸 도외시하며 접근하여 명한이 머무는 가옥의 문을 걷어찼다.

닫혀있던 시야가 확 넓어지고……

펑!

육중한 장력에 십수 장을 날아가서 처박혔다.

"커르륵!"

단번에 절명.

일격은 내공의 보호를 뚫고 심장을 부술 만큼 강력했다.

"쯧. 이건 아직 조절이 어렵군."

"그게 대전의 보상으로 얻은 무공?"

"초대 천마의 심득이야. 명칭은 멸아. 지금 단계는 고작 탈(脫)의 수준이겠네."

"하. 그게 고작이라는 말을 붙일 수준이야?"

"뭐, 초대 천마와 비교하면."

명한이 손을 툭툭 털며 밖으로 나왔다.

실전에서 써본 멸아의 힘은 생각보다 다루기 어려웠다.

각 단계에 새겨진 초식이 아닌, 단순한 내공 운영임에도 그러했다.

‘극천일무기의 기운과는 궤가 너무 달라.’

한쪽이 거칠기 짝이 없는 폭포라면 다른 한쪽은 심유한 동굴의 호수다.

성질이 극과 극이라 운용이 쉽지 않았다.

"크, 크으으윽!! 대업의 적!!"

"저자를 죽여라! 모든 것을 대업을 위하여!!"

"세상을 붉게 물들여 새롭게 하리라!"

한 놈이 죽자, 남은 놈들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전신이 한 배 반으로 부풀고 핏대가 서서 기괴한 형태를 이루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익숙한 수법이었다.

"혈교?"

"벌레를 개량했네. 쓰고 버리는 도구들이야."

"하! 그럼 이들도 그냥 이용당하는 건가?"

"아니. 이지를 제압당한 이들에게서 이 정도의 생기를 느끼기는 어렵지. 이들은 모두 자의로 목숨을 던진 거야. 아마도 신교 밖으로 나온 우리의 전력을 가늠하려는 수겠지."

명한이 썩은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신교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이지만, 입맛이 좋진 않았다.

"흥. 그런 거라면 넌 빠져, 소백. 고작 이런 놈들에게 네 힘을 보여줄 이유는 없겠지."

"맞아요, 도련님. 여긴 저희가 맡을게요."

그런 명한의 앞으로 은소소와 향아가 섰다.

"……그래. 부탁하지."

명한은 잠시 망설이다, 두 사람의 선택을 존중해 줬다.

직접 싸우는 편이 훨씬 더 간단하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는 없다.

전쟁에서는 병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도 중요한 능력 중 하나.

인력을 씀에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비켜!! 대업을 위해서 그자를 죽이겠다!"

"흥. 소백을 죽이려면 나부터 넘어야 한다!"

"그 전에 저도 있어요!"

두 사람이 혈교의 술법으로 강화된 암살자들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검과 권이 교차하고 위험한 기운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암살자들의 힘은 순간적으로 절정급에 달할 만큼 강했지만, 두 사람은 그보다 윗줄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암살자를 처리했다.

"크르륵. 크륵……!"

"모든 것은 대업을 위해……! 커어억!!"

무력화된 암살자들은 저마다의 말을 토하며 절명했다.

애초에 힘을 증폭하는 대가가 목숨이었다.

"으으. 지독한 놈들. 목숨을 도외시하면서까지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뭐야?"

"광신에게 이유를 묻지 마. 저들에게는 이것이 정의이며 사명이니까."

명한이 죽은 암살자들의 곁에서 금환을 꺼냈다.

딱히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옛 황제와 일부는 들어있지 않은가 보네.’

단순히 혈교의 술법과 병력이었을 뿐이다.

"은공, 저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소각해. 그리고 짐을 꾸려서 바로 이동한다. 마을의 인력도 전부 빼. 거처가 발각된 이상 굳이 머무르고 있을 이유는 없지."

"네, 은공. 바로 조치할게요."

시작은 혈교뿐이나, 다른 적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

명한은 사천 지방을 통과해서 백약문의 터까지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다섯 번의 암습을 당했지만, 피해는 없었다.

일행을 흠집 내기에는 암습의 수준이 낮았다.

"드디어 오셨군요, 문주님."

도착한 백약문 산문에서 전임 문주 위소홍이 마중을 나왔다.

이미 흑점을 통해서 대강의 상황을 전해 들은 터라 완전히 무장한 상태였다.

"신수가 훤해졌군. 소득이 있었던 모양이지?"

"만독비전을 연구하니 제 약황비전의 경지가 절로 깊어지더군요. 무엇이 약이고 무엇이 독인지. 이제야 겨우 갈피가 잡히는 기분입니다."

"좋군. 두 가지가 모두 경지에 이른다면 칠채향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 거야."

"하하. 아직 소원한 일이지요."

적당히 덕담을 주고받으며 백약문으로 들어섰다.

독곡이 완전히 사라지며 그 진전을 흡수.

이제는 오독문이라는 본류로의 회귀를 진행 중인 장소였다.

"과연. 그동안 시간을 소홀히 쓰지 않고 있었군."

"오독문의 영광을 다시금 되살리려면 그만큼의 노력의 필요한 법이지요."

"좋군. 좋아."

문 내에는 짙은 약향과 독향이 함께 어울렸다.

본래 약만을 다루던 백약문의 문도들도 독을 연구함에 있어서 거리낌이 없었다.

곳곳에서 그 흔적이 여실하게 읽히고 있었다.

평생을 바친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바뀐 걸 생각하면 훌륭한 적응이었다.

물론, 이 바탕에는 위소홍의 역량이 있음이 분명했다.

"천산 깊은 곳에서 약초와 독물을 챙겨왔으니, 이쪽에서 쓰도록."

"오오. 천산에서 말입니까?"

명한이 신교를 떠나면서 챙긴 물건을 백약문에 풀었다.

지하 미로에서 잡은 영물과 한껏 들고 튄 약초 등이 마차 한가득이었다.

위소홍은 입을 떡하니 벌리며 놀랐다.

"신교를 털기라도 하신 겁니까?"

"반쯤은. 그보다 귀의는 만나 봤어? 은거촌으로 가는 길에 여기를 들렀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 신산귀의 말이군요. 만나 봤습니다. 오래전에 문에서 축출된 제자를 다시 본다는 건 조금 복잡한 심경이더군요. 하물며 문의 방식이 그가 추구하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변한 마당에는……"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는 마. 모든 일에는 적당한 시기라는 게 있는 법이야."

"하하. 귀의와 같은 말을 하는군요. 그도 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원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저 어울리는 시기와 그렇지 못한 시기가 있었을 뿐이라면서."

그래도 큰 불화 없이 풀린 모양이다.

귀의의 항렬을 따지지만 위소홍과 반 급 차이.

둘 사이가 틀어지면 이래저래 문 내의 서열 정리가 어렵다.

수장은 명한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 움직여야 하는 건 위소홍과 귀의.

둘의 관계는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잘 풀렸다니 다행이네. 그럼 귀의를 이쪽으로 보내서 일을 맡겨도 괜찮은 거겠지?"

"일이라고 하시면……?"

"고에 대한 거야."

명한이 오는 길에서 챙긴 고를 위소홍에게 보여주었다.

만났던 모든 암살자들이 몸에 가지고 있었다.

"호오. 이건 좀 독특하군요. 남만 화족이 사용하는 습생고와도 다르고 백적고와도 형태가 같지 않네요.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를 개량한 것 같은데, 어디서 구한 겁니까?"

"오늘 길에서 만난 암살자들 몸에 기생하고 있더군. 혈교의 수작인 거 같긴 한데…… 이렇게 다량의 고를 빠르게 배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어딘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충사들이 있을 거야. 흔적을 좀 찾아 주었으면 해."

"충사를 알려면 쓰는 벌레의 특성부터 파악해야겠군요. 이해했습니다. 귀의가 온다면 힘을 모아서 문주님께서 원하는 답을 찾아내겠습니다."

"가능하면 역제어의 방법과 추적 수단도."

"후후. 맡겨만 주십시오."

칠채향을 얻은 명한이지만, 이런 부분은 경험의 영역이다.

위소홍과 귀의라면 압도적으로 경험치가 높다.

둘에게 맡긴다면 실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일단 대충 지시할 건 다 했네. 백약문에 좋은 차가 있다고 하던데…… 한잔할까?"

"하하. 한잔이 문제일까요. 백약문이 자랑하는 약탕을 올리겠습니다."

"아니, 쓴 건 됐고……"

"다들 약탕기에 물을 올려라!!"

"……"

백약문 곳곳에 불이 들어왔다.

#

"……드디어 신교를 떠났다는 건가."

누군가의 무덤 앞.

무른 도포 차림의 한 남자가 술을 올리고 있다.

동작 하나하나에 정성이 가득했다.

"네. 이제 막 사천지역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목적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이전 행적으로 추측해 보건데 백약문을 거쳐서 귀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귀문이라. 아버지가 죽은 곳이군."

주르르륵.

남을 순을 부으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비석 한가운데 적힌 ‘막천강’ 이름 석 자가 그림자 밖으로 드러났다.

무당의 전대 장문묘였다.

"어르신의 반응은?"

"아직은 방관일색입니다. 저희보다 먼저 움직인 이들이 있는 터라,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죠."

"혈교인가. 그 어리석은 광신도들 따위가 뭘 할 수 있다고."

"세력은 약하나 수의 독함으로는 혼천(混天)의 누구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래도 한때 몸담았던 곳이라는 건가?"

"죄송합니다."

"됐다. 어차피 혈교가 설쳐 봐야 현경에 이른 고수를 처리할 수는 없겠지."

남자가 푸른 도포를 내리고 품에서 이름 없는 명패를 꺼냈다.

"그자를 죽여 아버님 무덤 앞에 공양하는 건 어디까지나 내 몫이다. 소백, 은소소, 은영영, 막천우. 이름을 모조리 새겨서 그 피로 아버님의 넋을 위로하겠다."

"……"

스산한 목소리의 주인.

막천강의 아들이자, 중원 칠룡 중 한 명인 무당등룡 막군천이었다.

막천강이 죽고 막천우가 장문인으로 등극하면서 그는 모든 지위를 버리고 무당에서 나왔다.

그때, 그를 거둔 것이 ‘어르신’이라고 불리는 인물.

낙담한 그에게 엄청난 무공과 세력을 선물하며 후일을 도모할 힘을 주었다.

"지금 병력을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힘으로 상대하는 건 하책이다. 놈은 이미 화경에 이른 데다가 신기마저 가졌다. 놈을 제거하려면 우리 역시 그만한 전력을 움직여야겠지. 아쉽지만 어르신의 계획이 준동하는 상황에서 그 정도의 여유는 무리야."

"허면 다른 방책이라도?"

"정도의 허영만 가득한 인간들을 이용한다."

"……당문 말이군요."

"훗. 이해가 빠르군."

막군천이 손짓으로 바닥으로 그림을 그렸다.

사천을 중심에 둔 몇 개의 구획이었다.

"독곡이 무너지며 가장 득세한 세력은 현재의 백약문. 오독문의 부활을 기치에 걸고 세력을 규합하고 있어. 하지만 본래라면 이들이 아닌 다른 쪽이 득세를 해야 옳다."

"독과 암기의 명문, 당문이지요."

"그래. 그간은 독곡의 득세로 기를 펴지 못했으나, 당문은 결코 세가 약한 것이 아니다. 어찌 됐든 정마대전에서는 전장 밖이었거든. 그동안 분출하지 못한 힘이 가득 쌓여 있어."

"백약문은 좋은 대상이 되겠군요."

"작은 불씨 하나만 던져주면."

막군천의 선에 선을 덧대었다.

‘백(百)’ 자 주변으로 겹치는 몇 개의 선이었다.

"신교의 울타리를 벗어난 호랑이 새끼가 어디까지 자립할 수 있는지 지켜보자고. 제아무리 현경의 고수라 해도 이 넓은 중원 땅을 독야청청할 수는 없어. 괴롭히고 괴롭혀서 절망 끝에서 무너지게 해 주지."

콰득.

이윽고 그 선마저 뭉개지며 바닥이 내려앉았다.

막군천이 그리는 그림의 마지막.

복수의 종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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