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235)

떠나다

바람이 불어와 뺨을 간질였다.

신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산의 중턱이었다.

명한이 천을 끌어 얼굴을 가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가려니 두려운 건가?"

한숨을 받은 건 흑창을 두른 육마완이었다.

"두렵다기보다는 아쉬운 거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생을 살아온 공간이야. 이제 떠나면 또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어. 미련이 남는 건 당연한 이치겠지."

"곁에 남아 신교를 지키는 것은 선택지에 없는 건가?"

"아쉽지만."

"그런가. 네게 기대를 걸었던 만큼 실망도 크다. 하지만, 교주께서 승인하고 확고한 마음으로 떠나는 거라면…… 그 길을 응원해 주지."

"하하. 고마운 말이네."

천마대전의 승자이나, 명한은 신교를 떠나기로 선택했다.

멀리 떨어져야 보이는 것이 있듯이, 지금은 신교 밖에서 적을 대비할 때였다.

후계의 길을 기대하던 몇몇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것이 명한의 선택이었다.

"마차는 산 아래에 당도해 있다. 천산의 영역까지는 우리가 보호하겠다. 하지만 그 너머부터는 너 혼자서 살아남아야 한다."

"알아. 정식으로 신교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 그동안 숨죽이던 것들까지 전부 달려들겠지. 밖에서 악연을 쌓은 이들도 좀 있고."

"죽지 않을 자신은 있는 거냐?"

신교의 소궁주라는 간판.

비록 전까지는 ‘사십팔궁의 망나니’라는 허울이었지만, 그래도 그것 나름대로 무게가 있었다.

적어도 신교라는 배경이 있는 거니까.

하지만 이제부터는 중원 무림에 명한 홀로 서는 것이다.

모든 행동에 대한 결과를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뭐, 최선을 다해봐야지.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그래. 이 인간을 혼자서 죽게 하지는 않아. 걱정하지 마, 마창."

"저도 열심히 할게요!"

"……"

그다지 믿음은 안 가지만.

"살아남아라."

덕담은 건넸다.

#

흑점에서 준비한 마차를 타고 신교를 벗어났다.

이미 천마와 모든 교섭을 끝낸 터라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천산의 끝자락, 이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굳이 마중까지 나온 거냐?"

"도망치는 거냐?"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남자.

파운이었다.

"도망치긴 뭘 도망쳐. 얻을 건 다 얻었으니까 내 갈 길 가는 거지."

"천마대전에서 승리한 자가 신교의 후계자가 된다. 이 말을 잊은 거냐?"

"일방적으로 건 조건을 따라줄 생각은 없어. 신계의 후계자는 내가 바라는 길이 아니야."

"날 이겨놓고 그런 식으로 도망친다고!"

쾅. 파운의 발 구름에 땅이 요동쳤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대충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파운은 진심으로 화내고 있었다.

"내가 떠나는 길은 신기자가 알려줬겠지?"

"……그게 왜!?"

"알잖아. 그도 너도 나름의 속내가 있다는 거. 서로가 모든 걸 터놓고 진심으로 덤빈 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매도하는 건 옳지 않아."

"큭! 하지만 대전에 대한 것만은 진심이었다! 난 전력으로 싸웠다, 소백!"

"나도 전력이었어. 그 점에는 거짓이 없어."

"그럼 왜 이겨놓고 도망치는 거냐!?"

"……"

조금은 아이의 투정 같은 말투.

하지만 그런 면모가 신교에서는 찾기 어려운 순수함이기도 했다.

난폭하고 거칠지만, 그렇다고 이중적인 인간은 아닌.

신기자가 그를 따르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내가 떠나면 후계자는 공석으로 남는다. 강유도 이번만큼은 그냥 포기하지 않겠지. 얻고 말고는 네 역량에 달렸다, 파운."

"네놈이 버린 자리를 주워 먹으라는 건가!?"

"나는 내 나름의 자리가 있어. 신교에 있는 건 내 자리가 아니야. 하지만 그 자리에 적어도 어울리는 사람이 앉아 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뭐?"

"천마가 바란 건 너나 내가 아닌 강유였다. 여러 가지 수 싸움에서 유리한 패. 하지만 그건 신교의 기치와는 맞지 않아. 그 인간의 후계를 자처하려면 스스로의 강함으로 자격을 증명해야지. 안 그런가?"

천마는 강유를 안전한 패로 여겼지만, 명한은 아니다.

습작의 내용에서도 그렇고 직접 만나본 느낌도 그랬다.

그는 어딘가 불온한 기운을 감추고 있다.

"내가 밖에서 나의 자리를 찾는 동안, 너는 네 자리를 찾아라."

"……"

"설마 강유가 무서워서 꼬리를 마는 건 아니겠지?"

"닥쳐, 멍청이. 강유, 그깟 놈이 대수로울 것 같아? 열이건 백이건 죄다 쓰러뜨릴 수 있어."

"그럼 됐네. 그렇게 해서 네가 천마의 후계가 돼 봐. 그러면 그때, 나는 다른 자리에서 너와 겨루러 올 테니까."

넌지시 던진 도발에 대뜸 불타올랐다.

확실히 단순한 면이 있는 인간이었다.

"빌어먹을 놈."

"그 말은 내가 너한테 해야지. 줄곧 무시해 온 사람이 어디의 누구인데."

"……큭. 그건 네 진면모를 몰랐을 때다! 적어도 너는 나와 맞설 만큼의 자격을 가진 인간이다. 어디 가서 엄한 놈에게 당하지나 마!"

"츤츤거리기는."

"츤……뭐?"

"아무것도 아니야. 그만 열 내고 돌아가라고."

휘휘 젓는 손짓에 파운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냥 돌아가기에는 뭔가 자존심이 상하는 듯 한참을 서성이다, 겨우 걸음을 올렸다.

그런 와중에도 한마디 더 하는 것은 또 잊지 않았다.

"은소소, 그 계집도 잘 지켜! 언젠가 내가 데려갈 테니까."

"그러다가 언젠가 소소한테 칼 맞는다, 너."

"흥!"

그제야 훌쩍 뛰어 사라지는 파운.

그가 천마의 아래에서 후계자가 될지 아닐지는 미지수.

하지만 명한은 바람을 숨기지 않았다.

"후계자가 돼라, 파운."

복잡한 세상에 한 줄 단순함을 더했으면 하는 바람.

멀어지는 파운의 뒷모습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

하루하고 반나절을 마차로 이동했다.

이윽고 천산을 벗어나 산 중턱에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거주하는 사람 전원이 흑점으로 채워진 임시 거주구였다.

마을 입구에서 일월과 이월이 버선발로 마중 나왔다.

"은공! 드디어 오셨군요."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은공."

오랜만에 본 두 사람의 얼굴은 전보다 훨씬 밝았다.

흑점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오월상단도 거침이 없는 상황.

고민이 없으니 얼굴은 계속해서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고생했어. 조직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저희야 대수로울 것이 있나요. 은공께서 큰 위기를 여러 번 넘겼다고 들었습니다. 상처는 없으신지요?"

"신교로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었습니다. 은공의 옥체에 상처라도 생기면 어찌할까. 몇 날 밤을 뜬눈으로 새우기도 했지요."

일월과 이월이 사근사근 붙어왔다.

짙은 분향이 훅 풍겨서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야릇해졌다.

"좀 떨어져라."

그 사이를 은소소가 검으로 베었다.

향기가 검에 잘려서 한 번에 사라졌다.

눈 동그랗게 뜬 일월과 이월이 쳐다보자 쌍심지를 켜고 응수했다.

둘은 감히 암사자의 기세를 이기지 못해, 깽 하고 꼬리를 말았다.

"사이가 좋네."

"사이가 좋긴!"

"뭐, 그건 차차 이야기하고 그간의 행적을 보고받고 싶은데. 오월은 아직 상행에 나가 있나?"

"네, 네! 오월 그 아이는 상행에 맛 들였는지, 중원 천지를 아주 제집처럼 돌아다니고 있답니다."

"내가 전달했던 것들은?"

"후후. 전부 처리해 두었지요. 은공의 말씀대로 한동안 철과 목재의 가격이 급격하게 치솟았습니다. 덕분에 오월상단의 입지가 훌쩍 뛰었지요."

"뭐든 일을 벌이기 전에는 원재료가 많이 소모되기 마련이지."

명한은 그간의 행적이 담긴 보고서를 넘겨받으며 자리를 옮겼다.

몇 가지 지침을 제외하고는 방임에 가까웠던 흑점과 오월상단인데, 의외로 실적은 뛰어났다.

흑점은 이미 옛 세력을 모두 회복하고 새로운 곳까지 손을 뻗었다.

오월상단 역시 천하 4대 상단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주검 산장은?"

"아. 그쪽 장주와 지속적으로 교류를 하면서 살피고 있어요. 엄청난 숫자의 무기 의뢰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나 봐요."

"다른 곳도 비슷한 처지겠지. 일단은 계속 눈여겨보고 있어. 주검 산장 쪽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얘기하고."

"네, 은공."

명한은 남은 보고서도 빠르게 넘기며 살폈다.

신교 내부에서 천마대전이 일어나고 있을 때, 밖에서 굵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은……

"봉문(封門)이라."

"동시다발적으로 수십 개의 문파가 봉문에게 들어갔어요."

"주요하게 봐야 할 곳은?"

"아미파와 곤륜파. 그리고 화산파가 있어요."

"아미, 곤륜, 화산이 동시다발적으로 봉문을 했다. 우연은 아니겠지?"

"네. 이미 내주 첩자의 움직임이 흑점을 통해서 파악해 두었어요."

이미 한 차례 짚었던 부분.

신교에서 천마대전이라는 큰 행사로 세력이 암약하고 있을 무렵, 밖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임이 있었다.

‘본래라면 무당도 포함돼야 하는데, 장문이 바뀐 덕인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살펴도 그 숫자가 상당했다.

"이 모두가 한 세력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거냐?"

"아마도. 확신은 힘들어."

"신교 내부에서 암약했던 것도 이들이고?"

"비슷할 거야. 다만, 이들이 통일된 명령체계를 따르는 것 같지는 않아. 일정 부분은 협력하고 일정 부분은 배척하면서 군집의 형태로 움직이는 거지."

습작 기준으로는 ‘구무림’을 복권하기 위한 강경세력과 그 안에서 이득을 보기 위한 여러 파벌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작금의 흐름으로 습작을 설명하기는 요원한 일.

이제는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내 예상으로 두드러진 세력은 혈교와 팔반의 협력자. 특히 위험한 건 팔반의 인물이겠지."

"신교의 기둥이 다른 세력과 암약하고 있다라. 확실한 거야?"

"나형을 지원한 건 종리운이야. 그는 나형을 대전의 일축으로 만들기 위해서 여덟 부족의 신기중 하나를 가져와서 그에게 사용했어.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종리운이 여덟 부족 중 하나일 가능성은?"

"없어. 나형은 종리운의 친아들이야. 그가 신기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는 건 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지. 즉, 누군가에게 신기를 받았을 가능성이 커."

"그게 여덟 부족의 사람 중 하나다?"

명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가 등장하기 시작한 이상 과거는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다.

"신교는 일월교의 몰락과 함께 등장했어. 그리고 이 과정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지.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어?"

"세월에 의해서 사라졌다……라는 건 답이 아니겠네. 지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건가?"

"맞아. 당시 일월교에서 탄생한 초월적인 천재. 즉, 초대 천마는 일월교의 방침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어. 그 방법의 하나가 여덟 부족의 몰살이야."

"몰살……?"

일월교는 옛 황제의 온상.

초대 천마는 이를 부정하여 그 증거인 여덟 부족을 몰살했다.

이게 숨겨진 역사.

"대외적으로는. 일월교와의 연을 끊기 위해서 그렇게 공표를 했어. 하지만 일부는 죽지 않고 살아서 명맥을 이어갔지. 대표적으로 우리가 아는 사람이 있잖아."

"파운."

"맞아. 파운의 가계는 모종의 이유로 몰살을 피했고, 후대에 다시금 복권됐어. 이유는 당대의 천마만이 알겠지만, 그런 식으로 신교는 일월교의 여덟 부족과 복잡하게 얽혀 있어."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여덟 부족의 후손이 모든 일의 배후다?"

"……확신은 아니야. 다만,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는 건 분명해."

명한이 끝을 살짝 얼버무렸다.

이 너머의 내용은 그로서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정황과 추측의 영역이었다.

"복잡하네. 신교도 천마도. 천마의 자식이라는 우리도."

"그렇지 뭐. 애초에 신교의 자식이라는 우리 역시……"

계획의 일부.

명한이 뒷말을 덧붙이려는 찰나.

"기습이다!!"

날 선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기척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신교를 벗어나 이제 겨우 하루.

"시작됐군."

목을 노린 검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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