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235)

각자의 입장에서

그르르릉.

거친 마찰음과 함께 돌로 된 문이 옆으로 밀렸다.

천마각 안쪽, 교주인 천마만이 왕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초대 천마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관하는 장소이며, 일종의 연공실이기도 하다.

"얻어갈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천마대전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상품.

역대 천마의 비고에서 하나의 심득을 얻어갈 수 있는 기회였다.

무림삼분에 대한 계획만큼이나 이것도 명한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역대 천마의 기록."

"신중하게 택해라. 선대의 심득은 하나하나가 초절한 기예이나, 자격이 없는 자에게는 되레 독일 뿐이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감회에 젖는 건 잠시뿐.

명한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에서 얻을 거라면 이미 정해두었다.

[초대 천마, 화무운]

가장 오래된 기록.

초대 천마의 방이었다.

명한은 머뭇거림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옛것의 냄새가 훅, 풍겨오고 단출한 방의 전경이 눈에 잡혔다.

"이게 초대 천마의 기록인가."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작은 방 한 칸을 다 채우지도 못했다.

책장 반 칸을 채우는 사본 기록과 생전에 남겼다고 표시된 몇 개의 물품이 전부였다.

초대에 대한 기록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겠지.’

신교의 초대라는 건 일월교의 마지막과도 맞물리는 일.

당시의 기록을 온전히 보전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가."

그렇게 잠시 방 안을 둘러보던 명한이 노리던 물건을 찾아냈다.

방구석, 대수롭지 않게 방치되어 있는 돌 비석이었다.

움푹 파인 흔적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다.

[이름 : 현철비석(玄鐵碑石)]

[분류 : 유물]

[등급 : 외(外)]

[설명 : 초대 천마가 연마에 사용했다고 알려진 비석. 하늘에서 떨어진 돌을 주먹으로 조각하여 자신의 비석을 세웠다. 그 안에는 초대 천마의 무공 진수가 담겨 있다]

타구봉을 중심으로 한 극천일무기의 운용은 분명 중거리에 이점이 있다.

거리를 두고 상대를 제압하는 것에 특화된 방식.

하지만 거리가 좁혀지고 근접전이 벌어지면 이런 이점은 되레 단점이 된다.

극천일무기는 극단적인 파괴력 중심의 무공이기 때문에 이걸 ‘파괴불가’ 속성의 타구봉이 아닌 육체로 구현하면 되레 피해만 커진다.

그렇기에 단점을 상쇄할 무공이 필수적이었다.

"멸아(滅我)."

이름마저 독특한 초대 천마의 무공이었다.

명한이 짧게 숨을 몰아쉬고 비석에 손을 얹었다.

세상이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느낌이 들고,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피부의 감촉도 후각도 시각도 청각도 모두.

심지어 숨을 쉬는 방법이나 사고하는 이치 또한 지워졌다.

명한은 찰나의 순간 동안 삶에서 벗어나 죽음 너머, 무(無)의 공간에 도달했다.

그곳에서는 상리가 존재하지 않고 이치에서 벗어난 무언가가 가득 찬 공간이었다.

아니, 공간이라는 개념조차 어울리지 않았다.

"……큭!"

깨어난 것은 그야말로 촌각.

조금 전의 아득함이 사실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마치 꿈이라도 꾼 듯 멍하고 현실의 모든 감각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무아(無我)의 경지인가.’

진정으로 자신을 초월했을 때 도달하는 지고의 경지.

명한은 자신이 본 그 아득함이 초대 천마의 무공을 통해 체득한 순간의 무아라고 확신했다.

존재하는 모든 이치를 의심하고 의심하여 천기에서마저 탈각하였다고 알려진 경지.

"그런 걸 인간이 견딜 수 있나?"

숨 쉬고, 피부로 느끼고, 코로 향을 맡고, 눈으로 사물을 보는.

모든 감각에 대한 초월적인 의문과 부정.

인간이라는 종에서 아예 벗어난 새로운 무언가로의 도전이었다.

이치로는 알지만, 명한은 이것을 체득할 수 있으리란 자신이 들지 않았다.

[이름 : 멸아(滅我)]

[분류 : 무공]

[등급 : 외(外)]

[습득 제한 : 無]

[설명 : 초대 천마의 독문무공. 모든 쓰임에 대한 의혹에서 시작된 무공. 기초 심, 기, 체 수치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 탈(脫), 망(忘), 무(無)의 삼 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계마다 모든 능력을 배수로 획득한다]

지금은 이것이면 충분했다.

무아로 가기 위해 초대 천마가 갈고 닦았던 무공.

삼 단계 각 삼 초식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성이지만, 익히기만 한다면 당대에 적수가 존재하지 않을 천고의 기예였다.

명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

"초대의 무공이라."

천마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천마와 명한이 대화를 나눴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취했을 뿐이야."

"초대의 것은 초대가 아니면 누구도 소화하지 못했다. 너무 광활하여 잡아먹히기에 십상이지. 네게 그것을 감당할 그릇이 있겠느냐?"

"각오는 돼 있어. 그리고 그 정도 할 배짱이 없으면 앞으로의 일도 어렵겠지."

"무림삼분인가."

천마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섞였다.

그로서도 명한의 제안은 상식 밖의 것이었다.

"상세한 계획은 정리해서 보내주지. 네가 이곳에서 준동을 억제하는 동안 나도 밖에서 할 일이 있으니까."

"그들은 크고 강하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온전히 나와 신교 때문. 밖으로 나간다면 너를 내버려 두지 않을 터. 각오는 돼 있는 거냐?"

"이미 몇 번이나 상대해 봤어. 넌 이곳의 일이나 잘 처리해. 내가 사라지면 이래저래 말들이 많을 테니까."

"못난 아들의 일탈이면 족하다."

"쯧."

아들 운운이 마음에 안 든 명한이지만, 혀를 한 번 차는 것으로 넘겼다.

어찌 됐든 신교의 천마가 없으면 모든 계획은 진행이 불가능하다.

"그럼, 난 이 정도에서 물러나지. 서로 할 일이 많은 처지이니."

"잠깐. 가기 전에 이걸 가져가라."

그렇게 대화를 수습하고 떠나려는 찰나.

천마가 무언가를 명한 쪽으로 던졌다.

손바닥 정도 크기의 비수였다.

"네 어미가 고려에서 오던 길에 날 찔렀던 비수다."

"……그걸 간직하고 있었어? 네놈도 꽤 악취미네."

"그만한 여자도 없었으니까. 필요에 의해서 수십 수백의 계집을 품었지만, 내 몸에 상처를 새긴 건 설혜가 처음이었다."

"그런 건 칭찬이 아니야."

"네게 이해를 바라는 건 아니다. 내 위치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평생토록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녀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니다."

"……"

명한은 문득 육마완이 말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비정하지만 무정한 것은 아니다.

지금 이것이 천마의 몇 없는 인간적인 면모일지도 몰랐다.

"가져가라. 그리고……"

팡. 천마의 손끝에서 기운이 튕겨 명한을 관통했다.

공격인가 싶어서 움찔했지만, 그런 종류는 아니었다.

"이것도 어쩌면."

입마 상태에 빠져있던 경맥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일 수에 모든 기의 흐름을 정돈하고 잔존하던 극천일무기의 기운을 씻어낸 것이다.

그야말로 천하제일다운 힘.

그리고 어쩌면 아들을 대하는 천마의 모습일 수도 있었다.

"……죽지나 마라, 천마."

뭔가 미묘한 느낌.

명한이 한마디를 쏘아붙이며 몸을 돌렸다.

가슴 언저리가 간질거렸다.

#

툭.

바둑판 위로 흑돌이 내려앉았다.

정세를 뒤흔드는 매우 중요한 수였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인상을 팍 구기며 고개를 기울였다.

"에잉. 고얀 것이 수만 늘었구나."

"어르신의 지도를 받은 덕분이죠."

볼멘소리로 타박하자, 맞은편 흑의 차림의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노인이 바둑돌을 휙 던지며 다시 한번 타박했다.

"속세에 나갔으면 속세의 법대로 살 것이지. 또 무슨 볼일이 있다고 이 깊은 곳까지 찾아왔더냐."

"속세의 구분이 어찌 사람 손짓 하나로 정해지겠습니까. 천기가 요동치고 있으니 어르신께 조언을 받을까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에잉. 산문을 등지고 나서더니 아주 혓바닥만 길어졌어."

연거푸 이어지는 타박에도 남자는 화내지 않았다.

되레 가볍게 웃으며 술독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풍겨오는 주향에 노인의 코가 벌름거렸다.

"오. 오오오. 이건 해동백주 아닌가? 이 귀한 걸 어디에서 구해왔을꼬."

"동해의 선인께서 예전 일의 대가로 두 동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두 동이라고?"

"도와주신다면 두 동 모두 어르신께 드리지요."

노인의 수염이 파르르 떨었다.

해동백주라면 중원 땅을 탈탈 털어도 한 잔 구하기 힘든 명기.

두 동이면 등선한 선인이라도 버선발로 달려올 물건이었다.

"에, 에잉!! 이번만이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가는 노인.

남자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호오. 호오. 이 냄새하며 영글어진 영기하며. 과연 천하의 걸작이로다."

"천천히 음미하시지요. 절색은 시간으로 빚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클클. 네놈이 그래도 풍류는 좀 아는구나. 옳다, 옳아. 이 좋은 물건을 물처럼 후루룩 넘길 수야 없지. 암. 암."

노인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로 술독을 품에 넣었다.

그러자 밖에서 보는 부피와는 다르게 술독이 노인의 품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요술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노인도 남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이것아. 산문을 박차고 나갔던 놈이 무슨 일로 찾아온 게냐?"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회색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제 미력한 수준으로는 천기를 읽기 어려우니 도움을 주십시오."

"회색이라. 백도 흑도 아닌 것이, 판세에 깊이 박혀 뺄 수 없다 하였지?"

"네. 그동안 시간을 들여 앞을 읽고 행보에 슬쩍 관여해 보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우군이나 다시 보면 적이 될 수도 있는…… 모호한 인물입니다."

남자의 답에 노인이 수염을 손끝으로 다듬었다.

세상을 읽고 천기를 내다보는 선인이었지만, 지금 말한 회색만큼은 쉽지 않았다.

"……흐음. 이거 재미있구나."

"무엇이 보이십니까?"

"요동치는 천기를 내다보는 것이 우리만이 아니구나."

"옛것입니까?"

"아니. 다른 존재다."

노인이 눈을 반짝이며 허공의 한곳으로 손가락으로 눌렀다.

빛이 잠시 명멸하더니 손끝 위로 흩어졌다.

"호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존재라. 그래, 과거에 귀문에서 태어난 천재가 있었다고 했지. 그 아이가 눈을 뜨고 세상을 보고 있구나."

"귀문의 천재라면 은휘 말입니까?"

"그런 이름이었지. 세상의 흐름에 그대로 매몰된 줄 알았더니 깨어난 모양이다. 우리와 같은 선을 읽고 있다."

"그가 회색을 지원하는 존재인가요?"

"흐음. 확답은 어려우나 가능성은 있다."

노인이 손을 떼고 물러나 허리를 두드렸다.

장시간 들여다보기에는 부담이 컸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어르신."

"내버려 두어라."

"내버려 두어요? 그자를 말인가요?"

"그래. 색을 읽음에 사심이 없고 탁함은 더더욱 없다. 네 생각과 일치하든 안 하든 속세의 법에 어긋날 사람은 아닐 터. 네가 지금 쫓을 인물은 아니다."

"그렇습니까……"

남자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노인을 찾은 건 확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럼, 쫓아야 할 대상은 역시 백(白)인 겁니까?"

"백을 쫓는다는 건 네 사형과 다툰다는 의미다. 알고 있겠지?"

"네, 어르신.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산문을 나선 놈들은 하나같이 저 잘났다고 날뛰는 건지. 에잉. 네 마음대로 하거라. 어차피 밖으로 나간 이상 모든 건 너희의 선택이니."

노인은 짜증 난다는 듯 소매를 휘휘 저었다.

그러자 짙은 안개가 밀려와 남자와 노인 사이를 뒤덮었다.

이는 순식간에 짙어져 순식간에 코앞도 알아보기 힘들어졌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그리고 그 안개가 다시 사라졌을 때.

조금 전까지 있던 노인과 바둑판 등은 모조리 사라지고 난 뒤였다.

마치 신기루와 같은 모습이었다.

해서 세간에서 이를 빗대어 부르기를 환상루(幻像樓).

"이번에는 질 수 없습니다."

속세를 등진 선인들의 모임이자 세상을 관조하는 기인들의 거처였다.

지금의 이 남자 역시.

고개를 드는 남자의 얼굴은 다름 아닌 신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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