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235)

중원삼분지계

명한이 두 눈을 깜빡이며 깨어났다.

낯선 천장이 시야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곳은 어디일까.

아니, 어떻게 된 일일까.

천금처럼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아! 도련님, 깨어나셨군요!"

반가운 목소리가 뒤를 이어서 따라왔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향아였다.

"향아? 어떻게 된 거지? 여기는 어디야?"

"신궁(神宮), 안쪽의 약당이에요."

"신궁 안쪽이라고?"

"네."

천마궁에서도 신궁은 특별한 장소.

소궁주라고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대전의 결과는 어떻게 됐지?"

"그건……"

"이겼으니까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어?"

의문의 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커다란 약탕기를 들고 들어오는 은소소였다.

그녀 역시 꽤나 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소."

"꼬박 사흘이다. 사흘간 쓰러져서 깨어나지 않았어. 신교의 모든 약당 의원들이 동원돼서 널 치료했어. 결국, 그것도 부족해서 신궁 안쪽까지 자리를 옮겼지만."

"내가 이겼다는 건가."

"사흘간 기절했다는 건 귀에 안 들어오냐? 아주 죽기 직전까지 몰려서 겨우 이겼다고. 그렇게 무리를 해야 했어?"

타박과 함께 약탕기를 거세게 내려놓았다.

지난 사흘간 마음고생 한 건 결국 기절하지 않은 은소소와 향아였다.

"……아. 계속 곁에서 돌봐준 거구나. 두 사람 모두 고마워."

"흥."

"도련님이 무사하시니 괜찮아요."

반응은 각기 다르지만, 마음은 같다.

명한이 민망함에 볼을 긁적였다.

"소란스럽다 싶더니 깨어난 모양이군."

그때, 한 사람이 더 안으로 들어왔다.

대전을 주관하던 마창, 육마완이었다.

"마창. 내가 대전에서 승리했다면 파운은 어떻게 됐지?"

"생사를 두고 겨루던 적수를 걱정하는 건가? 네 봉에 넝마가 되도록 두들겨 맞았지만, 숨은 붙어 있다. 그쪽도 자리를 옮겨서 치료하는 중이야."

"그런가. 그나마 다행이군."

"아직 다행이라고 말하기에는 이르다."

"……큭!"

갑자기 손을 쑥 뻗어서 명한의 어깨를 움켜쥐는 육마완.

폭풍 같은 기운이 명한을 훑고 빠져나왔다.

"역시. 약당에서도 확인해 주었던 바대로군. 네 상태가 썩 좋지 않다."

"내 상태? 무슨 소리야?"

"파운의 신기 때문에 돌려받은 충격이지. 경맥이 심하게 상했다."

"경맥이?"

명한이 재빨리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단전에서 기운이 일어나 자연스럽게 경맥을 돌았다.

"큭."

하지만 일정 부분에 도착하자 고통과 함께 기운의 운행이 거칠어졌다.

마치 산길을 달리는 마차처럼 기운이 이리저리 요동쳤다.

경맥을 상한 탓에 이어짐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상처를 입어도 내 몸이라면 바로 회복해야 정상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건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는 의미.

"이해했나? 입마(入魔) 상태다."

"불가능해. 내 모든 무공은 철저하게 제어되어 있어."

"깨어있었다면 그랬겠지. 사흘간 완전하게 기절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나? 기운이 미쳐서 날뛰던 것을 내각의 고수가 총동원돼서 눌렀다."

"……"

"어리석어. 네 무공은 화무천 전대 교주조차 완전히 다루지 못했다. 입마 상태에서 멈춘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알고 있었던 건가?"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육마완은 전대 교주부터 지금의 천마까지 모두를 곁에서 모셨다.

아무리 명한이 쓰임을 달리한다고 해도 극천일무기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다만, 신교의 기치상 그 무공이 무엇이든 관여하지 않았을 뿐.

"입마라. 상황이 반가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절망적인 것도 아니야."

"입마를 우습게 보지 마라. 마도를 걷는 자라면 누구나 광기의 선 위를 걷지만, 한 번 삐끗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어."

"알아. 나도 입마가 얼마나 무서운지 정도는 알고 있어."

그 화무천조차 극천일무기의 광기를 이기지 못해서 스스로를 봉인했다.

잘못 마도에 빠지면 미쳐 날뛰는 광인이 되고 말 뿐이다.

‘물론,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특별한 몇 가지를 명한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절망적이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그보다 대전의 결과가 나왔다면 식은 예정대로 진행되는 건가?"

"네가 깨어나면 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내각에 소식을 전달하면 나머지 행사도 곧이어서 하겠지."

"천하의 천마와 독대할 기회가 주어지는 건가?"

"후계자라는 자리도. 그쪽이 더 크다고 보는데."

"글쎄. 사람 따라 받아들이는 기준이 다른 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명한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천마를 독대하는 것.

후계자 자리는 원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모를 놈이로군. 일단 알았다. 내각에 소식을 전할 테니 쉬고 있어라."

"부탁하지."

의뭉스러운 표정의 육마완에게 손을 흔들며 명한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입마는 둘째 치고 여전히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포근히 감싸오는 천의 감촉에 스스로 눈이 감겼다.

#

뭔가 부산스럽게 지나갔다.

천마 대전의 승자, 신교의 후계자.

들어본 적 없는 칭송과 환대가 쏟아졌다.

지금껏 사십팔궁의 망나니라고 무시하던 사람들마저 이제는 후계자라며 칭송하기 바빴다.

우습기 짝이 없다.

명한은 한심스러운 얼굴로 환대의 파도를 넘겼다.

"이 안이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바라던 순간에 도착했다.

신궁의 가장 안쪽.

천마가 기거하고 있는 천마각의 입구였다.

화려한 문양의 문을 안으로 밀며 들어갔다.

"……천마."

그 가운데, 적색 왕좌에 앉아 있는 한 남자.

천상천하 유아독존.

신교의 정점, 천마였다.

"설혜의 아들인가."

"……!"

불쑥 날아온 천마의 첫마디에 명한이 움찔했다.

그가 언급한 ‘설혜’는 소백의 모친인 ‘서문설혜’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와라."

손짓에 명한이 천천히 다가갔다.

천마각의 창틀로 떨어지는 햇빛에 천마의 얼굴이 조금 더 자세하게 보였다.

각진 턱과 단단하게 솟은 광대.

어딘가 사납게 보이는 눈매에 단단하게 여문 입매까지.

이 사람이 천마구나, 싶은 인상을 자아냈다.

"닮았군."

"……누구 말이냐?"

명한은 배에 힘을 딱주고 응대했다.

천마의 위압감에 휘둘리는 것은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고집스러운 눈매도 닮았어. 어찌나 반항이 심하던지. 배필로 점지한 여인이 아니었다면, 뱃길에서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잘난 납치혼 말인가?"

"구명과 보은의 대가로 받았을 뿐이다."

"헛소리. 애초에 어머니를 노리고 판을 짠 거잖아."

"좋군. 머리도 잘 굴러가고 기개도 있어. 하지만."

"……!"

순간, 아득한 압력과 함께 명한의 몸이 천마의 손아귀로 딸려갔다.

목을 움켜쥔 손아귀 너머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넌 누구지?"

"크윽! 큭!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감히 나 천마의 눈을 속이려 하는 건가? 네 탄생은 내 눈에 모조리 담겨 있다. 거죽 안의 영혼은 내 아들의 것이 아니야."

"……놔!"

명한이 극천일무기를 끌어 올려서 반항했다.

"극천일무기. 하찮은 수를 쓰는군."

하지만 발버둥으로 그쳤을 뿐, 천마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명한의 상태가 안 좋기 때문이 아니었다.

천마의 힘은 극천일무기를 속속들이 찍어누르고 있었다.

여래의 손바닥 위에 놓인 손오공이 이러할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화무천이 남긴 전인이라도 되는 건가?"

"시끄러워! 지금껏 아비다운 짓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안 한 놈이 이제 와서 뭐라도 되는 척 지껄이지 마!"

"……"

그제야 천마의 손이 풀렸다.

명한은 목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거리를 벌렸다.

"너는 그 아이의 삶을 이해하는가?"

"……내가 소백이다."

"헛소리."

"그 말을 할 자격은 네게 없다, 천마. 삶을 받고 나아감을 택한 건 어디까지나 나야."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천마의 손끝에 칠흑과 같은 어둠이 모였다.

천마신공의 무언가.

아니, 무공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어떤 힘이었다.

명한은 머리가 아득해짐에 황급히 어둠에서 시선을 돌렸다.

보고만 있어도 속의 것을 게워낼 만큼 뒤틀린 힘이었다.

저런 건…… 상대할 수 없었다.

"답해라. 내 아들의 육신을 쓰고 있는 누군가여."

"큭. 잘도 아들이라고 부르는군. 그 아들이 부정을 찾아 헤맬 때 너는 뭘 했지? 어머니조차 죽은 뒤에 소궁의 삶이 어땠는지는 알지도 못하잖아!"

"그게 답인가?"

"그래! 나는 네 아들의 삶을 받았다! 하지만 너보다는 내가 더 소백과 가까워! 그의 얼굴과 이름으로 살기로 약속했으니까!"

"……"

천마가 말없이 힘을 거뒀다.

주변 공간의 뒤틀림도 사라지고 명한이 겨우 숨을 토해냈다.

"인간은 하늘을 이길 수 없다는 건가. 천리라는 것은 그 무엇보다 비정하군."

조금은 슬픈 눈이었다.

천마는 잠시 말없이 무언가를 되뇌다, 다시금 눈을 떴다.

그때는 이미 슬픔이 모두 사라진 후였다.

"네가 누구든 무엇이든 상관없다. 내 아들의 거죽을 두른 이상, 내 뜻을 이어라."

"그게 소감의 전부인가?"

"천마의 이름. 그 무게를 네가 이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빌어먹을 아버지로군. 그래, 좋아. 어차피 나도 그쪽하고 골육상잔하기 위해서 온 건 아니었어."

"받아들이는 것이 빨라서 좋군. 그럼 내 후계……"

"아니. 아쉽지만 그건 아니야."

명한이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나는 강유가 아니야. 그쪽 계획을 따라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무엇을 알고 있지?"

"처음부터 끝까지. 애초에 네 후계자는 강유로 정해져 있었어. 그만이 너와 대적하는 무리와 관계가 없으니까. 철저하게 네 계획을 위해 준비된 후계자 아닌가?"

"강유가 내정된 후계자였다?"

"사고가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그가 후계자 자리에 앉았겠지. 그래야 네 반대 세력이 더 이상 신교 안쪽으로 힘을 못 뻗으니까. 아닌가?"

습작의 정해진 결말이었다.

천마의 계획을 위해서 준비된 후계자, 강유.

"추종자도 광신자도 옛것도 모두 아니야. 어떻게 네가 그 모든 걸 알고 있지?"

"그야 난…… 밖에서 왔으니까."

"밖이라. 소백의 생명을 이어받은 네가 이 모든 것의 밖에서 왔다는 건가?"

"그래. 그러니 다른 누구보다 네가 의심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지."

"……"

천마의 눈이 명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전부 샅샅이 꿰뚫었다.

영혼마저 분쇄할 것 같은 지독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명한의 말이 진실을 담고 있음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았다.

"천리의 밖에서 온 존재라. 재미있군. 이 세상에는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것이 남아 있었어."

"그 재미에 한술 더 더하고 싶다."

"더해? 뭘 말이지?"

"네가 그리는 판에 내 계획을 더 했으면 싶다."

여러 가지 일들이 더해졌지만, 큰 틀은 여전하다.

명한이 소림사로 떠나고, 다시 돌아와 대전에서 목숨 걸고 싸운 이유.

그건 결국 천마와의 담판을 위한 것이었다.

"중원삼분지계(中原三分之計). 너와 나. 그리고 네가 견제하는 그들. 이렇게 셋으로 중원의 판도를 나눈다."

앞으로 있을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최적의 판도.

제갈량의 마음으로 명한이 속의 것을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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