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235)

결착

어쩌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명한은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본래의 습작 결과가 강유의 승리로 정해져 있음에도 묘하게 파운과의 연이 짙었다.

그와는 결승에서 만날지도 모른다.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하! 결국, 네놈과 이렇게 만나는군."

"한 번은 승패를 가려야 했어. 되레 많은 늦은 것 같다."

"큭큭. 종리운의 습격을 받았다고 하던데. 꽤 자신감이 오른 모양이지?"

"역시 그쪽의 수작이었나?"

"화륜을 챙겼다면 소진시킬 필요가 있다고 하더군."

역시 신기자의 수작이 맞았다.

"화륜에 대한 걸 알았다면 왜 나형의 마지막을 내게 맡긴 거지?"

"그걸 알고 싶으면 힘으로 꺾어 봐."

"……그래. 안 그래도 궁금한 게 많았어. 바닥에 눕힌 뒤에 차근차근 물어보지."

"큭큭. 네가 감히?"

파운의 기세가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야생의 짐승같이 정제되지 않은 기운이었다.

나형 건으로 협력했다고, 봐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어 보였다.

명한도 그편이 편했다.

호흡으로 극천일무기의 기운을 뽑아 올렸다.

"하! 그 무공. 전대 천마의 절전된 신공, 맞겠지?"

"이제 와서 숨겨봐야 의미가 없겠지. 맞다."

"재미있겠군. 한때 천하제일이라 불리던 신공이라. 내 도의 제물이 되기에는 이보다 어울리는 것도 없겠어."

파운의 도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이었다.

"흑월광마도(黑月狂魔刀). 월익의 비전에 내 심득을 더해서 새롭게 창안한 도법이다. 첫 제물이 과거의 신공이라면 이놈도 만족하겠지."

"거창하기는. 뭐, 이쪽도 극천일무기라는 이름이니 과하기는 비슷하겠지."

"하! 마지막 싸움에 어울리는 이름 아닌가! 좋군, 좋아!"

송곳니를 내보이며 웃는 파운.

그야말로 싸움에 미친 투견의 모습이었다.

수많은 수와 셈이 교차하는 신교의 한복판에서도 그만은 순수한 투기를 유지했다.

분명 거칠고 오만하며…… 난폭하기 짝이 없는 광인이지만.

명한은 그런 모습이 싫지 않았다.

"마지막에 서서 웃는 사람이 누가 되는지 한번 해보자고."

"좋다, 소백! 네놈을 내 도의 호적수로 인정해주마! 자, 자질구레한 것들은 모두 벗어던지고 힘으로 겨뤄 보자!"

"바라던 바다!"

신호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

거리에 대한 우선권은 당연하게도 길이가 긴 봉이 쥐고 있다.

명한은 타구봉의 거리에 파운이 들어옴과 동시에 연격을 날렸다.

머리, 목, 가슴으로 이어지는 삼연격이었다.

팡. 팡. 팡.

연달아 터지는 충격파에 타구봉이 미친 듯이 떨렸다.

‘사선 베기.’

그리고 그 틈을 파운이 비집고 들어왔다.

터엉―!

맞서는 건 명한의 회선격.

찔렀던 봉을 대각선으로 회전시키며 도의 궤적에 쑤셔 넣었다.

맞물린 힘에 서로의 간격이 다시 벌어지고, 명한은 원심력을 더한 타구봉을 후려쳤다.

일타에 연무장이 쪼개지고 이타에 주변 석장 공간이 박살 났다.

파편이 중력을 거부하며 허공을 부유했다.

쉬쉭!

틈새를 뱀처럼 스며들어오는 도격.

타구봉을 회수할 시간이 없는 터라 명한은 몸을 낮추며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기세를 잡은 도수가 이를 포기할 리는 없다.

순식간에 땅을 밟으며 간격을 좁혔다.

서걱―!

단번에 잘려나가는 앞섬.

도가 얼굴 앞을 스치고 도기가 기막에 충돌해서 타올랐다.

동작의 기민함 면에서는 확실히 파운이 한 수 위였다.

‘쾌속함으로 싸우면 불리하다.’

병기의 속성에서도 봉으로 도를 누르는 것은 무리.

명한은 몸을 축으로 봉을 허리에 걸쳐서 회전시켰다.

이격으로 떨어지던 도가 봉에 걸쳐서 강하게 충돌했다.

그사이에 재빨리 거리를 벌리는 명한.

핑그르르르.

타구봉은 충격을 발판 삼아서 다시금 그의 손아귀로 돌아왔다.

‘흐읍―!’ 다시 잡은 거리를 유지하는 핵심은 연격.

폭풍 같은 연속 찌르기에 파운의 도격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했다.

충분한 거리가 있다면 큰 공격도 가능하다는 의미.

명한의 몸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어마어마한 속도로 타구봉을 찔렀다.

[극천일무기 - 절(絶)]

점에서 점으로 잇는 고속의 일격.

소리마저 앞서 붉은색 선이 파운을 관통했다.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꿰뚫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유령보!"

연무장 주변에서 지켜보던 은소소의 외침.

절전됐다고 알려진 극상승의 보법이 파운의 발에서 펼쳐진 것이다.

고속의 찌르기를 유령처럼 회피.

그 간격으로 파고들어 그대로 상단 베기를 시도했다.

거대한 강기가 도신에 실려 파도처럼 쏟아졌다.

쩌어어엉―!

회피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순간.

명한은 가이신공으로 몸을 보호하며 찔러 넣었던 타구봉을 그대로 횡으로 그었다.

힘의 궤적을 억지로 비트는 것이라 무리한 동작이었지만, 극천일무기의 강제력은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도강이 명한의 어깨를, 타구봉이 파운의 옆구리를 각각 후려쳤다.

"큭―!!"

"으윽!!"

서로 두 걸음씩 물러나는 두 사람.

상처는 도에 베인 명한이 더 컸지만, 타구봉에 의한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내 도를 견디다니. 네놈 몸은 뭐로 만들어진 거냐?"

"반토막이 되는 걸 각오했던 일격이야. 두 걸음이면 성에 안 차는데."

"흥. 다음번에는 확실히 갈라주마."

"보법에 놀라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해."

호흡을 가다듬고 두 사람이 다시 자세를 취했다.

간격을 잡고 수를 견제하며 큰 공격을 자제하는 것은 이제 충분하다.

상대에 대한 견적이 나왔으니, 남은 건 필살의 수법뿐.

"내 도에 죽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라."

파운의 도신이 완전히 먹색으로 물들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그야말로 칠흑과 같은 도였다.

기세 또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무겁게 가라앉았다.

폭력성을 지운 것이 아닌, 철저하게 압축하여 한 번의 폭발로 모았다.

‘흑월광마도,’

습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도.

예전의 명한이라면 이를 파악하기 위해 몇 가지 수를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모하고 멍청해 보이더라도 맞서야 할 때가 있음을 안다.

꾸욱.

극천일무기로 통제되는 모든 기운을 타구봉으로 모았다.

찰나의 파괴를 잡아먹는 마물이라면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이길 수 있다.

반야의 눈이 본질을 꿰고 극천의 기운이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찰나의 승부에 모든 것을 걸었다.

"……"

"……"

흐르는 침묵.

무거워지는 기세.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대치가 이어졌다.

"아."

그러던 한순간.

누군지 모를 한 사람의 숨소리가 정적 위로 떨어졌다.

이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파운과 명한은 동시에 움직였다.

흑색의 도가 하늘과 땅을 양분하는 거대한 균열을 만들고.

하나의 봉이 선과 선을 이어 공간을 무너뜨리는 나락을 떨어뜨렸다.

두 힘은 찰나의 순간에 충돌하고 상쇄와 증폭을 반복한 뒤……

마치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사라졌다.

"쿨럭―!!"

"크윽!!"

하지만 현상이 사라졌다고 힘이 지워진 것은 아니다.

파운과 명한이 도시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창백한 얼굴은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음을 증명했다.

"……도의 궤적을 지우다니. 세상에 가르지 못할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나야말로 놀랐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도 남을 멸(滅)의 기운이 설마하니 도에 베일 줄이야. 천지간에 이렇게 날카로운 도는 처음 봤다."

서로에게 빈말 없이 감탄했다.

이번 일격에는 그 어떤 여력도 남기지 않고 모든 걸 쏟아냈기 때문이다.

공멸의 순간에서 서로의 역량이 어느 수준인지를 확실히 알았다.

외력의 도움이 없이는 완전한 동수였다.

"이번 싸움에 후계 자리가 걸리지 않았다면 네게 양보했을지도 모른다, 소백."

"그런 아량은 바라지도 않아."

"아니, 이건 아량이 아니다. 내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널 꺾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미안함이다."

"……뭐?"

화아악―!

갑자기 파운을 중심으로 바람이 거칠게 불어왔다.

단순히 내공의 유동으로 만들어낸 현상이 아니었다.

"일천(日天). 내 어머니는 월륜 부족과 일천 부족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기가 두 개라고?"

"아직 다루는 것이 서툴지만……"

바람이 멎고 파운의 주변으로 후광이 드리워졌다.

신기를 통한 힘의 현현이었다.

"이번 대전은 내가 가져가야겠다, 소백."

두 번째 신기.

명한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

쉬운 싸움이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한 번도 그렇게 호락호락 대한 적은 없다.

하지만 두 번째 신기라니.

이건 예측 범위를 벗어나도 너무 벗어났다.

‘이 정도 뒤틀림이면 아예 원작과 벗어났잖아.’

습작 속으로 보낸 신이 눈앞에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을 판이다.

"포기해도 비난하지는 않는다."

"……흥. 됐어."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서 백기를 흔들 수는 없다.

짧은 코웃음으로 답한 명한이 영환을 꺼내서 물었다.

화륜의 기운이 몸 안으로 스며들어 굳어있는 수레바퀴를 돌리기 시작했다.

"화륜?"

"비장의 수라면 나도 가지고 있거든."

거칠게 날뛰는 기운은 제어의 한도를 아슬아슬하게 건드렸다.

시전자인 명한 자신이 타죽지 않으려면 길어봐야 1분 남짓이었다.

‘파운이 일천을 완전하게 다루면 애초에 승산은 없다.’

승산은 숙련도.

퍼엉―!!

땅이 터짐과 동시에 명한의 몸이 가속했다.

주변 배경이 뒤로 밀려나고 파운의 가슴팍에 타구봉이 닿았다.

폭발력을 바탕으로 하는 속도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카앙.

하지만 가슴에 닿은 타구봉은 무언가 강한 반발력에 튕겨 나갔다.

속도에 힘입은 파괴력이 그대로 돌아와서 명한을 흔들었다.

"쿨럭……!"

내상이 더욱 깊어져 죽은피가 토해졌다.

"일천 부족의 신기는 힘을 반사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아쉽지만, 네 신기와는 상극이야."

"……쯧."

"이런 외력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다."

"그만 구시렁대. 일천을 쓴다고 아직 네가 이긴 건 아니다."

소매로 피를 닦아내며 명한이 다시 가속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이어졌다.

충격으로 단축된 시간을 고려하면 앞으로 길어야 30초.

‘각 신기의 힘은 소유자가 쓰기 나름이야.’

파운의 선택은 절대적인 방어.

하지만 그 파괴적인 파운이 방어적인 쓰임새를 택한다?

아무래도 어색하다.

꾸우우욱―!

알기 위해서는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명한이 가속한 힘 그대로 다시 파운과 충돌했다.

일격, 이격, 삼격, 사격……

파운을 중심에 둔 채 끝없이 공격을 쏟아부었다.

"크으윽!!"

어마어마한 반발력이 몸을 흔들었다.

내상이 악화하고 통증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차라리 이즈음에서 포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적당히 물러나는 건 인생을 넘겨준 소백을 봐서라도 할 수 없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언제나 모든 걸 걸어야 할 때는 아는 법.

명한은 지금이 그 순간이라 판단했다.

퍼어엉―!

이어지는 폭음.

돌아오는 충격.

아찔한 고통에 멀어지는 정신.

‘아니야.’

명한이 이를 악물고 다시 타구봉을 뻗었다.

퍼엉. 펑.

물결이 겹치든 충격의 파문이 허공에 그려졌다.

"……"

그제야 그려지는 의문이 하나.

‘왜 움직이지 않지?’

반격을 위한 힘이라고 한들 파운은 절정의 도법이 있다.

지금처럼 약해진 명한이라면 도를 들고 공세에 나서는 것이 정석.

이렇게 멈춰있는 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멈춰있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면……

"움직이지 못하는구나!"

그것이 부족한 숙련도의 제약.

명한이 타구봉으로 점과 점을 이어서 잘라냈다.

파운이 서 있던 공간의 아래쪽이 잘리며 그대로 무너졌다.

제아무리 단단한 금강석이라도 땅이 없으면 무용지물.

휘청거리는 파운의 몸 주변으로 파문이 흐려졌다.

"하! 지독한 놈!"

"그래! 그게 바로 나다!"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서 가속했다.

파운 역시 황급히 자세를 가다듬어 일천의 파문을 다시금 집중시켰지만, 능숙하지는 않았다.

흐려진 파문의 중심에 타구봉이 닿고……

챙―!

거대한 균열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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