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235)

마지막을 향해서

겨우 한고비 넘겼다.

명한으로서는 다행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다.

슬금슬금 터오는 동.

천마대전 4강, 강유와의 대전이 남아 있었다.

"소백, 괜찮겠어?"

"어떻게든 해봐야지."

내공의 손실은 둘째 치더라도 화륜이 소모됐다.

현재의 제어력으로는 연달아 사용하는 건 불가능.

강유와의 일전에서 한 팔 떼고 싸워야 하는 격이다.

"도련님, 경기를 미뤄 달라고 얘기해 봐요.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 팔반이 습격했는데 이대로 싸우라는 건 불공평해."

"말은 그럴듯하지만……"

명한이 슬쩍 육마완 쪽을 바라봤다.

결정권을 쥐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마창, 육마완.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불평해 봐야 의미가 없다.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

시선을 느낀 듯 육마완이 입을 열었다.

"그럼 경기를 미뤄주는 건가?"

"아니. 너와 강유의 대결은 강유의 기권으로 넘어갔다."

"……뭐? 강유가 기권했다고?"

"그래. 그 소식을 접하고 걸음을 하던 차였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번 대결을 포기한다고 하더군."

"아니, 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데 천마대전을 포기한다는 거지?"

"나도 그것을 묻고 싶었지만, 이미 출궁했더군."

"……신교 밖으로 나갔다는 건가?"

명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때.’

화재 당시 굉장히 빠르게 발을 빼던 강유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손해를 피하기 위한 수라고 여겼는데, 이제 보니 아니다.

다른 무언가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천마대전의 마지막은 너와 파운의 대결로 결정됐다. 하루를 줄 테니, 상처를 회복하고 대결에 임해라."

하루로 회복될 상처는 아니지만, 이건 괜찮다.

파운 역시 신기의 회복이 아직 덜 됐을 터.

순수하게 무력으로 붙는다면 이쪽은 승산이 충분하다.

"종리운에 대한 건 어찌할 생각이지?"

"그가 무슨 생각이든 소궁주에게 손을 댄 것은 사실. 추격조를 구성해서 쫓을 생각이다. 단, 천마대전이 우선인 이상 시일은 그 후가 되겠지."

"남은 팔반으로 움직이면 되는 거 아닌가?"

"내게는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있잖아."

"……"

"그래. 다른 말은 다 틀렸어도 하나는 종리운이 맞았네. 자식놈이 죽어도 움직일 사람이 아니야."

천마는 어디까지나 수수방관이 기본 방침.

종리운이 명한을 죽였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넌 시합에만 집중해라. 후계자가 되어 신교를 물려받는다면 다 이해가 될 거다."

"글쎄. 최근 들어 목도한 신교의 면모라는 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서."

"……"

"뭐, 그 쪽에게 할 말은 아니지. 상황은 알았으니까 그만 물러가."

명한은 가볍게 축객령을 내리고 처소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소백."

그때, 그런 그의 등을 육마완이 불러세웠다.

"왜? 아직 할 말이 남았나?"

"그분께서 매정한 것은 맞으나, 무정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측근이라 이거냐?"

"정점에 앉은 자는 언제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지. 그분께서도 그러고 있을 뿐이다."

명한이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천마에 대한 거라면 깊이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고개 흔드는 것으로 답을 한 채, 그대로 물러났다.

"……"

조용히 문이 닫혔다.

#

"쿨럭! 쿨럭!!"

신교 밖, 야산까지 물러난 종리운.

지독하게 밀려오는 고통에 검붉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내상도 내상인데, 폐부까지 침투한 화륜의 기운이 컸다.

대상이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는 불.

약해진 지금의 종리운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이런. 천하의 종리운의 꼴이 말이 아니로군."

"……너는?"

순간,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종리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적은 아니나 그렇다고 가깝게 지내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분께서 내려주신 화륜도 잃고 이젠 쌍령의 하나까지 빼앗긴 건가?"

"큭! 그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 수수방관한 건가?"

"뭔가 착각한 모양이군. 난 일의 흐름을 조율하기 위해서 움직일 뿐. 성패와는 관계가 없어."

"……"

한 걸음 다가와 종리운 앞에 서는 남자.

흰색 가면을 얼굴을 가리고 있는, 탁발귀였다.

"쯧쯧. 그분께서 왜 자네 같은 인물을 계획의 주도자로 앉혔는지 이해를 못 하겠군. 혈염마녀 건부터 시작해서 죄다 실패했잖아. 이 정도로 무능하면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와야 옳지 않나?"

"닥쳐라, 탁발귀! 지금껏 대계의 기반을 누가 닦았다고 생각하지? 신기를 모으고 각 부족의 생존자들을 규합한 것도 나였다!"

"후후. 열심히 발버둥 친 건 이해해. 그래야 자네에게도 기회가 있었을 테니까."

"……"

"왜? 모르고 있었을 줄 알았나? 자네가 죽은 아들을 되살리기 위해서 그분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거. 아비 된 마음은 감동적이지만, 너무 사사로워. 그러니 남은 혈육 하나의 죽음에 그렇게 발광을 하는 것 아닌가."

신랄한 말에 종리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혈교가 제대로 협력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아, 이젠 그 사교 핑계인가? 그런 맹신적인 자들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나? 필요에 의해서 서로 이용하면 그만일세. 그런 면에서는 자네 아들놈이 차라리 나았어. 배신자를 처리하기 위해서 악불군을 이용한다. 성공했다면 좋았을 것을."

"애초에 황제진경을 잃어버린 것도 그들이고, 전대 황제의 정보를 숨긴 것도 그들이다! 제대로만 움직였어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꼬이진 않았어!"

"황제진경이라. 이것 말인가?"

탁발귀가 품에서 양피지를 꺼내서 던졌다.

명한이 가지고 있는 황제진경과 정확하게 같은 물건이었다.

"이게 어떻게?"

"애초에 일월팔가의 적응을 위해서 뿌려 두었던 물건에 불과하다. 불사종법이라는 것도 편린이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씨앗에서 열매를 맺기를 원한 거지, 그 자체가 대단한 보물은 아니야."

"……그럼 내 행동을 방관한 것도 같은 이유였던 거냐?"

"하하하.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는군."

큰 웃음에 종리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을까.

아무리 신교 안이라도 수는 충분히 있었을 텐데.

"수를 읽기 위해서는 상대의 판을 봐야겠지. 그 아이 주변으로 모여든 여러 가지 파편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야. 자네의 분노가 그를 죽인다면, 거기서 끝. 하지만 살아남는다면 분명 개입한 힘이 있다는 의미겠지."

"고작 사십팔궁의 망나니였을 뿐이다."

"그 망나니가 지금은 후계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다. 만약, 파운마저 이긴다면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겠지."

"강유가 남아 있을 텐데?"

"그는 그런 사소한 일에 매달릴 때가 아니라서."

가슴 부근을 툭툭 치는 탁발귀에 종리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설마, 열쇠를 회수한 건가?"

"자네 아들이 신나게 불을 피워준 덕분에."

"……잠깐. 설마 네놈이!?"

무언가에 사고가 닿고 종리운의 몸에서 기운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보다 탁발귀의 손이 먼저였다.

목덜미를 움켜쥐고 기운의 흐름을 찍어 눌렀다.

"작은 조언 정도를 해 줬을 뿐이야. 결국은 그 아이의 선택이었지."

"네놈이…… 네놈이 그 아이를!"

"이제 와서 좋은 아버지인 척은 하지 말자고. 결국, 네놈은 먼저 간 큰아들을 살리기 위해 작은놈을 이용한 것 아닌가? 망가진 부자 주제에."

"닥쳐―!!!"

콰르르릉!!

굉음과 함께 탁발귀의 몸이 몇 걸음 밀려났다.

완벽하게 제압했다고 생각했던 일 수의 결과치고는 의외였다.

손을 툭툭 털며, 비틀비틀 일어나는 종리운을 바라봤다.

"생사초(生死草). 남몰래 숨겨둔 것이 있긴 했군."

"언젠가 네놈들이 내 뒤통수를 칠 것을 대비했을 뿐이다."

"후후후. 그런다고 뭐가 바뀔 것 같나? 화륜에 침식당한 네 육체는 이미 오 할은 망가졌어. 생사초로 진원진기를 태워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적어도 네놈은 데려가겠다!"

어딘가 어긋난 소리와 함께 종리운이 몸을 일으켰다.

기운이 급속도로 팽창해서 주변의 모든 공간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절대 고수에 걸맞은 위세.

"재미있군. 세간에서 팔반을 두고 동수라 평가한다지?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이번 기회에 보여주겠다."

하지만 탁발귀는 그런 위세에도 한 점의 동요가 없었다.

되레 우습다는 듯 바라보며 뒷짐을 졌다.

"자. 마지막으로 발악을 해 보라고."

아무도 모를 야산.

절대 고수가 격돌했다.

#

심상이 깊은 곳으로 침잠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원의 주변을 새빨간 화염이 맴돌았다.

무한하게 이어지는 영겁의 화염.

모든 것을 불살라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분노의 집착이었다.

"후우……"

깊은 숨이 명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주변 공기가 일렁일 정도의 뜨거운 숨이었다.

내식을 정돈하고 감았던 눈을 떴다.

"지독한 기운이네."

자연스럽게 볼멘소리가 나왔다.

나형에게서 강탈한 이 화륜은 한 번 숙였다고 고분고분해지는 그런 기운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타오르고 멈추지 않고 발악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걸 누르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릴 정도였다.

"회복은 된 거야?"

"내공이나 체력은 어느 정도. 다만, 이 화륜은 못 쓸 거 같다."

"으음. 아쉽네. 파운 정도의 고수가 상대라면 큰 무기가 되어줬을 텐데."

"뭐, 그쪽도 월익을 쓸 형편은 아닐 테니까."

다뤄보니 알 것 같다.

이 신기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극단에 치우쳐져 있다.

아무리 고수라도 부담 없이 다루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숨겨둔 수 하나 없이 파운하고 싸우는 건가?"

"그럴 수는 없지."

다만, 명한에게는 일반적인 것과 궤를 달리하는 무공이 있다.

깊은 곳에 침잠시킨 내공을 천천히 묵혼공을 통해서 정제했다.

온몸이 붉은색으로 달아오르더니 손바닥을 통해서 하나의 환(丸)이 만들어졌다.

"영환?"

"응. 화륜의 사념 중 일부를 떼어서 만들었어."

"그게 가능해? 영환은 혼기를 통해서 빚어내는 거잖아."

"말했잖아. 화륜은 황제의 념이 빚은 일종의 광기야. 그 하나하나에 황제의 혼이 실려 있다고 보면 돼."

"……그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이게 되지."

명한이 붉은색 환을 손 위에 올렸다.

엄청난 수준의 양강진기가 담겨 있는 영환이었다.

양공을 익힌 고수가 섭취하면 단번에 1갑자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신물.

하지만 그 안에 깃든 념을 감당하지 못하면 단번에 광인이 돼 버릴 마물이기도 했다.

"후우. 여전히 가늠이 안 되네. 그 옛날의 황제가 살아있다는 네 말도."

"뭐…… 나도 느낌으로만 아는 거니까. 황제진경도 그렇고 각 부족의 신기도 그렇고. 그 지독한 집착은 이미 죽고 없는 자의 것이 아니야. 어떤 식으로도 살아있다고 봐."

"어떤 식으로든. 쯧. 잘 이해가 안 가네. 후우, 그보다 그 환은 어떻게 쓸 생각이야?"

"승부를 가르는 건 언제나 마지막에서 쥐어짜는 힘이지."

손끝에 올린 영환이 붉게 빛났다.

"파운에게는 미안하지만, 대전에서는 질 수 없어."

비장의 한 수.

모든 준비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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