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235)

어긋난 천기

커다란 정원 정문에 현패가 달렸다.

명필을 초청해서 정성껏 적은 이름 두 자가 멋을 뽐내고 있었다.

[귀문(鬼門)]

과거 은가의 집합이었던 곳이 옛 이름을 회복했다.

흰 소복 차림의 은영영이 감격한 얼굴로 현패를 바라봤다.

"조사님. 드디어 귀문이 정식으로 부활하는군요."

"고작 현패 하나에 감격하다니. 너도 꽤 늙은 모양이구나."

"여인에게 나이 운운하시면 안 돼요."

"귀찮기는."

그 옆에서 푸른색 영체의 형태로 은휘가 혀를 찼다.

속세를 초월한 그에게는 귀찮은 개념이었을 뿐이다.

귀문과 묵혼공에 대한 희미한 집착이 없었으면 이미 사라지고도 남을 그였다.

"그보다 조사님. 흑점에서 그 아이들 이야기를 전해왔어요. 보아하니 신교의 내부 사정도 뭔가 복잡해 보이던데. 다치거나 그러진 않았겠죠?"

"두 녀석 말이냐? 워낙 운명선이 짙은 녀석들이라 별일 없을 게다."

"조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맞겠지만…… 영 불안해요. 신교는 당대 최고의 집단이잖아요. 그런 곳을 뒤흔들 만큼 큰 암중세력이 있다는 게 믿기지도 않고요."

"아서라. 신교가 당대 제일의 세력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무림을 놓고 따질 때의 일. 세상은 그보다 훨씬 넓고 방대하다."

은휘가 현패 높이로 몸을 띄운 뒤 세상을 관조했다.

천지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통한 울음, 다급한 외침, 불굴의 의지, 꺼림칙한 악의까지.

천지간의 일은 그 수와 헤아림이 끝이 없었다.

신교는 고작 작은 점에 불과할 뿐이었다.

"조사님, 조사님. 그렇게 해탈한 고승처럼 말씀하시지 말고요. 두 아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이 없을까요?"

"쯧쯧. 속죄를 한다는 것이 그리 집착이 심해서야."

"하지만 소소 그 아이와 은공이 잘못되면 저는 견딜 수가 없을 거예요."

"번뇌 덩어리 같으니. 에잉."

은휘가 혀를 차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타박에 가깝게 말을 하지만 명한이 신경 쓰이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묵혼공의 유일한 전승자이며 귀문의 문주.

유일하게 남은 집착을 모두 가진 인간이었다.

"그 아이가 남기고 간 물건을 내려놓거라."

"은공이요?"

"그래. 작은 거라도 좋으니 그 앞에 두거라."

은영영이 잠시 생각하다 명한이 남기고 간 옷을 가지고 나왔다.

격렬한 전투에 이리저리 찢겼지만, 버릴 수는 없어서 가지고 있었다.

은휘는 곁눈질로 옷자락을 보고는 살짝 손짓했다.

물러나라는 신호였다.

웅―

공간이 나자 은휘의 몸이 백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빛은 이내, 넝마가 된 옷과 공명.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파장을 나누었다.

"흐음."

그러기를 반각.

은휘의 빛이 다시 줄어들었다.

"조사님, 뭐라도 보셨어요?"

"조금 묘하구나."

"묘해요? 어떤 부분이요?"

"천기에 어긋남이 생겼다. 무언가 하늘의 의지를 뒤틀었어. 인과의 규칙이 뭉개지고 법칙에 틈이 생겼다. 하지만 더 이상한 건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잠잠하다는 거지."

은휘가 손끝으로 하늘을 훑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수많은 인과의 선이 어긋난 울림을 토해냈다.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커다란 사건이 있어야 가능한 변화.

하지만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세상은 고요했다.

"……내가 그 아이를 인지하는 순간 변화가 보였다는 건가?"

"뭔가 안 좋은 건가요?"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렵다. 고요한 수면 위로 떨어진 물방울 하나. 그 파문이 어떤 일을 만들어 낼지는 호수 아래의 물고기들이 알기 어렵지. 밖에서 모든 걸 바라보는 어부가 아닌 이상에야."

"조사님은 어부가 아닌가요?"

"나? 나는 그저…… 호숫가에 놓인 들풀에 불과하다. 파문은 보지만, 그것도 일부분이지. 세상 전체를 관조하는 건 불가능하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핵심을 꿰뚫어 보던 은휘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

‘어쩌면 묵혼공의 다음 단계에 도달하면 볼 수 있는 그것일지도 모르겠군.’

세상을 초월하여 영령이 되기 전.

그가 찰나의 순간에 목도했던 무언가가 있었다.

"……흠. 영영아."

"네, 조사님."

"다음에 흑점 아이들이 오거든 이걸 소백 그 아이에게 전하도록 하거라."

은휘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찔러 푸른 구슬 하나를 꺼냈다.

색이 영롱한 기물이었다.

"이게 대체 뭔가요?"

"내 혼의 일부를 떼어서 만든 물건이다. 소백, 그 아이라면 쓰임을 알겠지."

"안 좋은 건 아니겠죠?"

"이것아, 내가 그 아이들에게 해코지할까. 앞길을 읽기 어려우니 이 영석이 작은 길잡이 역할 정도는 해 줄 게다."

"영석…… 꼭 전하도록 할게요."

은영영이 영석을 건네받으며 다짐했다.

대화재 이후 일주일이 다 돼가는 시점이었다.

#

"으아아아!"

다급한 외침과 함께 묘아가 난간을 발로 박찼다.

다리 아래로 날카로운 단검이 스쳤다.

고작 한 뼘.

식은땀이 바람에 날렸다.

"거기 서라!"

"저 도둑을 잡아라!"

쫓아오는 숫자는 수십.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그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신교는 넓지만 좁은, 그런 장소였다.

"에이잇! 그만 좀 따라와!"

뭐, 그렇다고 잡혀줄 생각은 없다.

묘아가 연막탄을 터뜨리며 그림자 사이로 스며들었다.

추격자 일부가 방향을 잘못 잡고 다른 곳으로 멀어졌다.

‘휴.’ 벽에 등을 기대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콰르릉!!

하지만 조금 일렀다.

벽이 통째로 무너지며 손이 튀어나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다.

엄청난 수준의 외공 고수였다.

"쥐새끼 같은 놈!! 감히 어르신의 처소를 뒤져!?"

"젠장! 그쪽을 노린 게 아니었다고! 실수야, 실수!"

"헛소리! 팔다리를 자르고 난 뒤에도 그렇게 떠들 수 있는지 보자!"

무쇠 같은 손이 묘아의 머리로 날아왔다.

맞으면 몸이 정상적인 형태로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몸을 돌려 옷에서 팔을 빼며 거리를 확보.

다리를 쫙 찢으며 공격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빗나간 손이 굉음과 함께 벽을 다시 날려 보내며, 파편으로 시야를 가렸다.

‘진짜, 사람 말 안 믿기는!’ 이 정도면 묘아에게는 큰 기회.

무게가 없는 듯 몸을 뒤집어 날려 거한의 어깨를 밟고 뛰었다.

뒤늦게 손을 뻗어 발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거리를 벌린 뒤였다.

"거기 서라!!"

"서란다고 서겠냐? 바보야!"

파편을 밟아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는 묘아.

성난 목소리와 뒤늦은 추격대가 따라붙었지만, 능파미보를 사용하는 그녀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흐엑. 헥. 잡힐뻔했네. 방향 한 번 잘못 잡았다가 골로 가면 신투 명성이 말이 아니지."

겨우 숨을 고르며 챙겨온 물건을 살폈다.

본래 그녀가 살펴야 하는 곳은 일군 강유가 머무는 처소.

하지만 이상하게도 중간에 길을 잃고 다른 장소를 정탐하고 말았다.

다름 아닌 팔반 중 한 명인 종리운이 머무는 처소였다.

‘이상한 진법이 있었지.’

무언가 비밀을 감추기 위한 듯한 보호책.

보물에 이끌리는 도둑의 본능대로 이를 파훼하고 물건을 챙겨서 도망쳤다.

다수에 쫓기게 된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근데 이건 뭐지?"

함에 들어있는 건 빈 서신과 작은 방울 하나.

함을 뒤집고 탈탈 털어봐도 숨긴 물건은 없었다.

목숨 걸고 쫓던 이유가 고작 이것 때문이라는 사실에 묘아가 살짝 울컥했다.

‘아니지, 아니야. 뭔가 있으니까 열을 낸 거겠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고쳐먹고 함을 다시 정리했다.

봐서 모르겠으면 알만한 사람을 찾으면 그만.

"낭군은 뭔가 알겠지?"

그녀의 상식 안에서 그런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

딸랑딸랑.

방울이 흔들리는 소리에 명한의 고개도 덩달아 흔들렸다.

묘아가 챙겨온 이 물건들은 그로서도 모호한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진법으로 보호되어 있었다고?"

"응. 응. 굉장히 어렵고 복잡한 진법이었어. 신투인 이 몸이 아니었으면 가져오지 못했을걸?"

"근데 그거까지는 왜 간 거야?"

"나도 모르겠어. 중간에 갑자기 길이 엉키더니 나와보니까 그곳이던데?"

"갑자기 길이 엉켰다?"

묘아의 경공은 굉장한 수준.

그런 그녀의 감각을 혼동시키려면 보통의 수법으로는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다치게 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 인도한 건가?’

강유가 아닌 팔반의 일원, 종리운을 노린 수였다.

"소백, 낭군. 그 종이에는 아무것도 없어?"

"아, 이거. 뭔가 숨겨져 있는 건 확실한데……"

빛에 비춰보고 살짝 물에 적셔봐도 변함이 없다.

"응? 그거 혹시 해선지 아니냐?"

"해선지?"

은소소가 명한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아예 물에 담가버렸다.

얇은 종이는 순식간에 물을 빨아들이며 흐물흐물해졌다.

"악! 뭐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안 뜨잖아!"

"가만히 있어 봐, 멍청아. 해선지라고 했잖아. 그냥 물이 아닌 염분이 필요해."

묘아의 불퉁한 목소리를 무시하며 소금을 물에 부었다.

알갱이가 천천히 가라앉아 종이에 달라붙었다.

그러자 희미한 색이 종이 위로 떠올랐다.

몇 자 되지 않지만, 확실히 글자였다.

"이건 지령서네."

명한은 눈으로 종이의 내용을 훑었다.

날짜와 시간. 장소가 적혀 있었다.

이런 식으로 특정 시점을 암호화해서 전달하는 건 명령 지령서밖에는 없다.

"이걸 종리운의 거처에서 찾았다고?"

"응."

"……"

어쩌면 단순히 종리운의 임무 내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발견하게 된 방법과 적힌 시간이 마음에 걸린다.

‘천마대전이 재개되는 날, 숙소와 연무장 사이의 공간.’

흐름이 제시하는 건 단 하나.

"암살인가."

"암살!? 누구? 낭군을?"

"적힌 장소는 두 곳. 하나는 내가 연무장으로 가는 중간 지점이고, 다른 하나는 파운의 숙소와 맞닿아 있어. 같은 시일에 두 사람의 행선지를 나눠서 적은 지령서. 나오는 답은 하나뿐이야."

"나형이군."

"응. 나형이야."

명한의 결론을 은소소가 받았다.

"나형이라니? 무슨 소리야?"

"나형의 폭주를 막고 그의 목숨을 뺏은 건 나와 파운. 즉, 나형을 지지하던 세력에게 우리 둘은 원수일 수밖에 없어. 이번 기회에 암살을 하겠다는 내용이야."

"헉! 그럼 큰일이잖아!"

"큰일이지. 몰랐다면."

신교 안에서 자행하는 암살.

그 부담을 모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전 정보를 몰랐다면 명한도 불시에 암살을 당했어야 했다.

"갑자기 길이 헷갈려서 방향을 잃었다고 했지?"

"응.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신기한 경험이었어."

"신투가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진법. 가능한 건 제갈가에서 나온 신기자 정도밖에는 없겠지."

"신기자. 그가 경고를 해줬다는 건가?"

"이래저래 나형을 잡을 때는 공투했으니까. 나름의 의리일지도 모르지."

"흐응. 그 인간은 이래저래 불안한데."

"그건 동의하지만, 이 정보는 확실히 도움이 되겠어."

허위정보일 가능성도 있지만, 대응 가능한 정보라는 점에서 쓸모는 있다.

적어도 의심은 하면서 움직일 수 있으니까.

"어? 근데, 소백 낭군. 그럼 저 방울은 뭐야?"

"아…… 방울도 있었지."

해석된 서신 말고 남은 방울 하나.

명한이 방울을 손끝으로 들어 흔들었다.

짤랑짤랑.

고운 울림이 이어졌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없었다.

[이름 : ???]

[등급 : ???]

[설명 : ???]

해석되지 않는 물건.

"글쎄. 일단은 지켜보자고. 방울이 우릴 잡아먹을 건 아니니까."

일단은 품 안에 쑤셔 넣었다.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기에는 아쉽게도 여유가 없었다.

천마대전의 재개는 이제 겨우 하루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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